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84화 (184/740)

184화 다 왔다

호수를 건너기 위한 무식한 방법.

먼저 호수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한 번은 건너야 할 호수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봤다.

파이어 밤을 이용해 날아가 본 결과,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반대편까지 2킬로미터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폭풍이 불기 시작했으나, 도착지까지 500미터 남긴 시점에서는 폭풍이 잦아든다.

수생 몬스터는 발견된 적 없고.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수심은 사실상 무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호수를 돌아가는 건 시스템적으로 불가능.

땅 밑으로는 갈 수 없고, 하늘로 이동하기에는 모빌리딕의 무게가 문제.

이렇게만 봐서는 답이 없어 보였지만.

“정공법으로 불가능하면 편법을 쓰는 수밖에.”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고, 시도할 생각조차 안 했겠지만.

“할 수 있어.”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상의 컨디션과 충분한 마력, 모빌리딕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해 보자.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난 두 NPC를 불러 모아 계획을 설명했고.

“와, 너 진짜 또라이구나?”

[모빌리딕이 경탄합니다!]

[경악도 같이합니다.]

치히린과 모빌리딕 모두 입을 딱 벌리곤 눈을 깜빡였다.

맞아, 내가 봐도 미친놈 같기는 해.

“더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하고.”

“으으음, 성공만 한다면 가장 빠르게 넘어가는 방법이기는 한데. 역시 폭풍 구간이 가장 위험하지?”

“너도 잘 해야 해. 중간에 폭풍에 날아가면 답 없다?”

“걱정 마시지! 찰싹 붙어 있을 테니까!”

[모빌리딕이 한번 해 보겠다고 의지를 밝힙니다.]

좋았어.

불완전하고 위험 요소가 크지만 도전할 만하다.

“그럼 다들 작업 개시!”

“요정의 힘을 보여 주마!”

[모빌리딕이 힘차게 꼬리를 찹니다.]

“그에에에에!”

그렇게 사람 한 명과 정령 하나, 요정, 개구리의 작업이 시작됐다.

더덕이는 인벤토리에 박아 놨다.

혹시나 잃어버리면 큰일이라.

* * *

다시 이틀이 지났다.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노동하는 기분은 오랜만이었지만 나쁘지는 않다.

은근히 체질에 맞는 것도 같고.

“그에에에.”

덕춘이는 불만이 좀 있어 보이지만.

“너도 고생했다.”

톡톡, 녀석의 코를 두들겨 줬다.

날름, 내 손가락을 혀로 붙잡아 꺾는 녀석.

“야야야야! 아파! 야!”

“궤에에에.”

“아, 알았어. 다음에 헬다잉 키친 한 번 더 사 줄게.”

그제야 손가락을 놔준다.

못돼 먹은 개구리 같으니.

주인을 협박해 먹을 것을 뜯어낼 줄이야.

언제 한번 단단히 교육을 해 줘야겠어.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어림도 없다며 메롱을 해 댄다.

“이제 준비는 끝났네?”

작업을 마무리된 상태.

컨디션을 위해 쉬다가 호수 건너기를 할 계획이다.

날개를 파닥이며 근처에 날아와 앉는 치히린.

가장 많이 고생한 모빌리딕 역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땅속에 가라앉아 있다.

“어.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난 성공할 거라고 믿어.”

치히린의 말에 모빌리딕도 고개를 끄덕인다.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여 휴식을 취하는 모양새가 됐다.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도 꽤 운치 있는 것 같다.

조금 있으면 꼴 보기도 싫은 장애물로 느껴지겠지만.

“있잖아.”

잠시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데 치히린이 말을 걸어왔다.

“넌 왜 이렇게까지 해?”

“뭐가.”

“보통은 우리를 두고 가거든. 가끔 퀘스트도 할 겸 호수를 건너려 시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간부에 접어들며 포기하고 위로 향해. 우리 퀘스트는 실패해도 나쁠 게 없으니까.”

그렇겠지.

한 번 시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관둘 수 있는 퀘스트.

남들에게 있어 이 녀석들의 퀘스트는 그 정도 가치밖에 없다.

쉬워 보이다가도 막상 해 보면 난이도가 꽤 높으니까.

무엇보다.

‘한쪽만 구해서는 어차피 못 깨는 퀘스트야.’

지금 와서 느끼는 건데 모빌리딕과 치히린, 누구를 구출하느냐에 따라서 공략 방법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나야 둘 다 구한 관계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쓸 예정이지만.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치히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모빌리딕을 두고 가지 않았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사실 치히린은 비교적 데리고 가기 편했다.

덩치도 작았고 가벼웠으니까.

확실한 이동기를 가지고 있거나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무작정 헤엄쳐 건너가는 수도 있다.

“으음? 뭐, 뭔 소린지 잘 모르겠네!”

“시치미 떼기는.”

보나 마나 중간에 사고인 척 폭풍에 휘말려 날아갔을 거다.

모빌리딕 혼자 놔두기 싫었을 테니까.

며칠간 지켜보면서 확신했다.

둘 사이에는 이미 유대의 끈이 이어져 있다.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는 무언가.

같은 처지. 오랫동안 45층에서 방치되어 있던 NPC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최소 10년이 넘는 세월을 말이다.

어물쩍 말을 돌리는 치히린을 무시하고 모빌리딕에게 시선을 던졌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니까 괜히 장난치고 싶어지네.

“모빌리딕, 넌 치히린을 두고 안전지대로 넘어갈 수 있다면 넘어갈 거야?”

“그, 그게 무슨!”

황급히 일어선 치히린이 내 입을 찰싹 때렸지만 내가 더 빨랐다.

눈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땅속으로 들어간 모빌리딕이 고개를 흔든다.

하여간 똑같은 놈들.

삽시간에 낯설어진 공간.

어색한 건지 수줍은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두 녀석 눈치를 볼 내가 아니다.

“너희 말이야, 내가 둘 중 하나만 데려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는지 모빌리딕과 치히린 모두 그 자리에 굳었다.

“미리 말하지만 남은 한쪽이 방해해도, 같이 가게 된 녀석이 날뛰어도 난 데려갈 수 있어.”

다른 NPC면 모르겠지만 시스템 제약에 걸린 NPC라면 충분히 떨쳐 낼 수 있다.

물 속이라면 더욱더.

적어도 호수 안에서는 겨우 숨만 쉬는 신세나 다를 바 없으니까.

“누가 나랑 갈래?”

난 최대한 사악하게 웃으며 둘을 노려봤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로를 붙잡고 있던 녀석들이 몸을 웅크린다.

좀 더 압박하듯 다가갔다.

“내, 내가 남을게!”

빼액, 소리치듯 대답하는 치히린.

그에 질세라 모빌리딕도 고개를 흔들어 댄다.

[모빌리딕이 치히린을 데려가는 게 더 편할 거라며 자신이 남겠다고 전합니다.]

“왜! 왜, 이 흙돼지야! 올라가고 싶다며!”

[모빌리딕이 자신은 좀 더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나 혼자 가서 뭐 하라고! 덩치만 커 가지고 네가 나 없으면 여기서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오케이, 여기까지.

더는 눈물겨워서 못 봐 주겠다.

덕춘이는 진작에 양팔을 비비며 질색하고 있고.

“농담이야, 농담. 약속했잖아. 둘 다 데리고 간다고. 퀘스트 보상도 제대로 받아야 하고, 전에 말한 것들도 호수 건너편에서 받기로 했던 거 잊었어? 그리고 말이야…….”

난 뒤에 있는 우리의 합작품을 가리켰다.

“기껏 다 같이 만들었는데 누구 한 명 놔두면 섭섭하지. 정령이랑 요정이라 그런가, 순진해 아주.”

덕춘이에게 배운 얄미운 표정을 짓자 두 NPC가 부르르 떤다.

“이이이익! 나쁜 새끼! 이것도 농담이라고!”

[모빌리딕이 몹시 나쁜 말을 합니다.]

별 데미지 없는 주먹질을 하는 치히린과 시스템이 해석을 포기한 문장을 내뱉는 모빌리딕.

이러니 좀 보기 좋네.

내가 변태라서 그런 건 아니고.

“너희 안전지대가 무섭다고 그랬지. 텃세도 그렇고, 신분이든 힘이든 대단한 놈들도 많다고. 지금처럼만 해.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둘이 같이 가는 건데. 서로 으쌰으쌰 하란 말이야, 쫄지 말고.”

이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어느 안전지대로 가는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

10층이나 20층, 내가 이미 지나왔던 곳으로 간다면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이겠지.

그간 정도 들었고, 잘되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30층대에 너희처럼 80층 언저리까지 올랐던 악마 있거든? 걔 지금 그 층 메인 NPC 됐다. 등반은 끝났지만 너희 삶 자체가 끝난 건 아니라고.”

굳이 게일이 어떻게 39층의 메인 NPC가 됐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동족을 죽여 흡수했다는 말은 분위기에 맞지 않았으니까.

할 말은 이걸로 끝.

치히린과 모빌리딕이 촉촉하고 그윽하며 부담스러운 눈길을 건넸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짝짝

손뼉을 쳐 주목을 시키고.

“쉴 만큼 쉬었다. 이제 가자.”

녀석들에게 턱짓했다.

둘 모두 내일 아침은 안전지대에서 맞이하게 될 거다.

뒤를 바라봤다.

길게 이어진 그림자 하나.

그림자의 원인은…….

[정령과 요정의 힘이 깃든 흙 탑]

-모빌리딕과 치히린, 두 NPC와 등반가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거대한 흙 탑입니다.

-이게 되네요.

무려 높이만 1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흙 탑이었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자체로 신비나 마찬가지인 흙의 정령과 요정이 힘을 합친다면 어떨까?

말이 안 되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는 게 탑.

상식은 버려라. 불가능성을 의심해라.

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터이니.

이번 작전명은…….

“외나무다리 전법.”

우린 저걸 타고 넘어간다.

* * *

가방을 꺼내 열었다.

“치히린, 탑승.”

“라져!”

팔뚝만 한 녀석이라 그런지 가방 안에 쏙 들어간다.

혹시 몰라 예전에 만들어 뒀던 인면어 마스크도 씌워졌다.

물에 빠지더라도 숨은 쉴 수 있을 터.

다음은.

“모빌리딕, 위치로.”

-쿠르르르르

내 손짓에 모빌리딕이 탑을 헤엄쳐 오른다.

가장 높은 곳까지.

보기만 해도 아찔한 광경이었지만 해내야 한다.

이미 저 탑을 만들기 위해 주변에 있는 흙은 죄다 긁어모은 상황.

두 번 하라고 하면 솔직히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다.

이제 내 차례.

이틀 동안 흙 탑만 만든 게 아니다.

흙 탑과 호수를 연결하는 수로도 만들었지.

아직 통로를 연결하지 않아 물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여기다 구멍을 뚫으면!

[파이어 밤 (AA) Lv.3]

-콰직

-쿠구구구구

-콰아아아아아앙!

그동안 레벨이 오르며 강력해진 파이어 밤이 벽을 부수자 호숫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물은 파둔 수로를 타고 전진.

흙 탑 밑 부분은 비스듬하게 깎아 놨다.

저기에 세차게 달려온 물이 들이박으면.

-콰드드득

-뿌드드드드득!

그때는 흙 탑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가는 거지.

물이 수로를 타고 흐르는 걸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난 호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여기부터는 속도전이다.

흙 탑이 완전히 호수에 떨어지기 전에 모빌리딕과 합류해야 한다.

왜냐면.

“곧 폭풍이 칠 거야!”

흙 탑의 길이는 1킬로미터.

1킬로미터는 호수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었고, 이곳에 도달하면 폭풍우가 몰아친다.

마력을 쏟아부어 출력을 높였다.

-콰르르르릉!

-솨아아아아!

무리하면서까지 속도를 높인 결과,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고.

쓰러지는 흙 탑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빌리딕과 눈이 마주쳤다.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결연한 표정을 짓는 녀석.

이제 곧 추락이다.

“뛰어어어어!”

흙 탑이 완전히 호수에 빠지기 직전, 난 소리를 질렀고.

[모빌리딕이 힘차게 뛰어오릅니다!]

타이밍에 맞춰 모빌리딕이 위로 솟아올랐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탄력.

넘어지는 흙 탑의 가속도가 녀석을 도왔다.

최선을 다해 하늘로 몸을 날린 모빌리딕이 고점에 오른 타이밍.

“아파도 참아!”

[수호자의 의지 (AA)]

[강철의 의지 (A) Lv.2]

녀석에게 성물과 버프 스킬을 둘렀다.

그와 함께 사용한 건.

[되갚기 (AA) Lv.1]

-콰아아아아아앙!

-푸화아아아악!

강력한 에너지의 방출이 일어나며 모빌리딕을 날려 버렸다.

반발력으로 나 역시 호수에 처박혔지만 괜찮다.

[안개 질주 (A) Lv.4]

입에 들어간 물을 뱉어 낼 새도 없이 안개 질주를 사용.

짧은 시간이지만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폭풍을 지났어!”

가방 틈으로 얼굴을 내민 치히린의 말대로 폭풍 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모빌리딕이 끝이 보인다고 외칩니다!]

“아직 안 끝났어.”

가장 고비인 폭풍 지대를 지난 건 맞다.

하지만 아직 호수 끝까지 가려면 500미터는 더 남았다.

서서히 떨어지는 모빌리딕.

폭풍우가 걷힌 하늘은 청명했으며 호수는 반짝였다.

가볍게 튄 물방울이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

-꾸우욱!

난 모빌리딕의 몸을 붙잡고 위로 올라탔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낙하하며 위로 몰리는 피.

다리가 근질거리면서 소름이 돋는 동시에 해방감이 느껴진다.

“다들 꽉 잡아.”

호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새집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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