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안전지대를 향해
탑에 들어오고 이상한 꼴도 많이 보고, 상식을 벗어나는 모습도 많이 봤다.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고 직접 겪은 일도 있어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 못 했네.”
정령과 요정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라니.
세상이 바뀌기 전에는 환상 속에서 볼 법한 존재들.
탑이 생성되고 나서부터는 범접할 수 없는 초인으로 인식되는 NPC.
릴카처럼 뇌가 순수한 녀석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뛰어난 이들이었는데.
“덕춘아, 어쩔까?”
“그에에에.”
양손을 펼치며 날 바라보는 녀석.
그래, 너도 잘 모르겠지?
사람이나 두꺼비나 보는 눈은 비슷한 모양.
영특한 녀석 같으니.
일단은 침착하게 메시지를 살폈다.
[땅의 정령, 모빌리딕을 구한다.]
[요정, 치히린을 구한다.]
[조현수 님은 한 대상만 구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선택지가 아니다.
클리어 조건으로 주어지는 선택지는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같이 뜨니까.
진짜 선택지는 나중에 뜬다는 건가.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양자택일.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나랑 쟤랑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야?
이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모빌리딕이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나, 나 맥주병… 살려!”
애처롭게 구조를 바라는 녀석들.
모빌리딕은 직접 말을 거는 게 아니라 메시지로 의사를 전해 왔지만, 그거야 42층에서 만난 데미 데몬도 그랬으니까.
어디 보자.
“내가 구해야 할까?”
“궥?”
커다란 눈으로 굴리며 나를 바라보는 모빌리딕.
잘못 들었냐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물에 가라앉는 치히린.
“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주어진 선택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상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선택지를 정한 적이 없기도 하고.
사람이 일관성이 있는 게 이쯤 되니 선택지를 따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뭐가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모빌리딕이 농이 지나치다고 외칩니다.]
[당신은 정령의 친구! 자신을 구해 줄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합니다.]
아, 생각해 보니 그렇다.
눈의 정령 여왕, 하이누의 퀘스트를 깨면서 그런 칭호를 얻었었지.
녀석이 굳건한 신뢰의 눈으로 날 응시한다.
물을 먹어서 그런가, 눈가가 촉촉한 것도 같고.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요정이 팔을 휘저으며 물 위로 올라온다.
“아, 아냐! 메스토카 유충을 죽인 애라고! 날 구해 줄 거야!”
유충?
맞네. 유충을 죽이고 요정족 NPC의 친화도가 올랐다고 했었지.
요정족과 메스토카.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초조한지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둘.
“이상해.”
난 턱을 까딱였다.
“아무리 그래도 NPC씩이나 돼서 물에 빠져 죽는 건 말이 안 되지.”
모빌리딕?
중급 정령이다.
정령은 몬스터로 분류해야 하니 마니 말이 많은 종족.
요정과 마찬가지로 신비로운 존재기는 하나 아예 정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정령이 나오는 게이트도 드물지만 존재했으니까.
환경에 따라 한없이 강해지기도 하고, 엉뚱한 짓을 하다 자연적으로 소멸하기도 하는 녀석들.
워낙 다양한 경우가 있어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중급 정령이면 못해도 4성급 이상이야. NPC 정도 되면 훨씬 강할 게 분명해.”
권능을 통해 보인 정보.
땅의 정령은 헤엄치지 못한다.
그게 뭐?
그냥 가라앉은 다음에 땅속으로 들어가면 되지.
“요정족은 날개가 젖으면 날 수 없다고 했는데 말이야… 말 그대로 날 수가 없는 거지 다른 능력 전부가 봉인된다는 말은 없거든.”
맥주병이라도 이동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법하잖아.
공격 스킬이든 방어 스킬이든 뭐든 변형시켜서 탈출할 수도 있을 거고.
딴 걸 다 떠나서.
“벌써 10분째 그러고 있잖아.”
“그에에.”
정말 위급했다면 그럴 수 있을까?
치히린이라고 했나.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걸 본 것만 수십 번이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 바다에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다행히 주변에 안전 요원이 있어 구해 냈지만 어릴 때라 큰 충격을 받아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때 그 사람, 세 번도 물 밖으로 못 나오고 가라앉았다.
저 녀석은 무슨 수로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걸까.
단순 피지컬?
그 정도 능력이면 진작에 나왔을 거 같은데.
가만히 선택지를 바라봤다.
탑은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는다.
당장 주어진 선택지를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말하지 않은 것처럼.
“으아아! 시스템 제약이 걸려 있다고, 똥멍청아!”
[모빌리딕이 이 호수는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몸이 흩어져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두 녀석이 추가 정보를 내뱉는다.
시스템 제약이라.
그렇다면 조금은 납득이 되는데.
“똥멍청이?”
“저 자신한테 한 말이었습니다! 나 똥멍청이야!”
슬쩍 째려보자 바로 쭈그러든다.
왜지. 왜 저 낯선 요정한테서 릴카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모빌리딕이 자신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어필합니다.]
찡긋. 눈을 깜빡이는 녀석.
오케이, 너 1점 가산점.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요정의 표정이 다급해진다.
“쟤 무거워! 엄청 무거워! 난 가볍, 그르륵!”
잠시 물속으로 들어간 치히린의 말도 맞다.
모빌리딕.
생긴 것도 고래 같지만 덩치도 어지간하다.
스텟도 높아졌으니 못 꺼낼 건 아닌데 고생 꽤 할 건 분명해 보인다.
자, 어쩐다.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에 발을 담갔다.
적당히 시원한 감촉.
물은 잔잔했고, 수생 몬스터도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둘 중앙으로 걸어갔다.
무릎이 잠길 때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모빌리딕이 말한 대로 이 앞으로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두 녀석과의 거리는 대충 50미터 남짓.
얼굴이 환해진 모빌리딕과 치히린을 지긋이 바라봤다.
어떻게 할지는 이미 정해 놨다.
하지만…….
‘그냥 구해 주기는 좀 아쉬워서 말이야.’
난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각자 구해 주면 뭘 해 줄 수 있는지 말해 보도록.”
[예상치 못한 전개에 모빌리딕이 경악합니다.]
“이, 이이! 나쁜, 꼬르르. 새끼!”
쓰레기 같다고 해도 좋다.
내가 봐도 인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발언이다만.
‘여긴 탑이고, 안전지대를 넘어서면 아래층으로는 갈 수 없어.’
각 층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챙겨가야 한다.
야속하다며, 인정머리 없다고 욕할 수는 있지만 나도 궁지에 몰린 건 마찬가지라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100층까지 무조건 가야 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이 부분은 타협할 수 없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둘도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모양.
경쟁이 붙었다.
[모빌리딕이 땅의 정령의 가호를 내려 줄 수 있다고 전합니다.]
“날개 잘 말려서 요정의 날개 가루 줄게!”
[모빌리딕이 코웃음을 칩니다.]
[자신은 땅속에 묻힌 귀한 광물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미스릴 원석이 있는 위치를 안다고 말합니다.]
“으이익, 흙고래 녀석! 요정의 입맞춤! 이거 대단한 버프… 르그그륵.”
[모빌리딕이 지하 도시의 출입증을…….]
“요정계에서 훔쳐 온 꿀벌주……!”
오우.
뭐가 많네.
시간을 좀 끌어 봤지만 더 얻을 건 없어 보였다.
어느새 내용이 이상해지고 있었으니까.
[모빌리딕이 공중 3회전 쇼를 보여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나 안마 잘해!”
이쯤 해 두자.
두 NPC가 불쌍하기도 하고.
흙고래가 묘기 부리는 거 봐서 뭐 하겠고, 팔뚝만 한 요정이 어깨 주물러 봐야 얼마나 시원하겠나.
-짜악
난 손뼉을 쳐 과열된 듯 과열되지 않은 경쟁을 마쳤다.
숨죽여 내 선택을 기다리는 녀석들.
“오케이, 약속은 지켜야 한다?”
[모빌리딕이 정령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요정의 신비를 걸고 약속해!”
두 NPC의 발언과 함께 빛이 쏘아져 나와 연결된다.
계약 비슷한 느낌인 거 같은데.
그럼 해 볼까.
“덕춘아, 고.”
“그에에에에.”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혀를 내두르더니 요정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모빌리딕이 있는 곳으로 발장구를 쳤다.
애초에 둘 다 구할 생각이었다.
[조현수 님은 한 대상만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게 조건이었지.
어디에도 덕춘이에게 걸린 제한은 없었다.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일까.
덕춘이는 별다른 방해 없이 치히린을 혓바닥으로 감싸 올렸고.
“어으, 무게가 좀 나간다?”
[모빌리딕이 자신은 중급 땅의 정령치고는 굉장히 호리호리하고 비율 좋은…….]
“그래그래. 읏차.”
나 역시 모빌리딕과 접촉할 수 있었다.
묵직하다.
그나마 물속이라 잡아당기면 딸려 오기는 하니 다행.
수영만 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스킬을 사용했다.
프로즌 브레이크.
-쩌저저저적!
호수 바깥까지 연결된 얼음 다리.
마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었지만 버텨 냈다.
얼음을 붙잡고 모빌리딕을 당기기를 반복.
10분 정도를 씨름하자 겨우 땅에 닿을 수 있었다.
[모빌리딕 구출 성공]
[치히린 구출 성공]
나와 타이밍을 맞춰 덕춘이가 땅에 올라오자 구출에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고르는 치히린.
중간중간 물을 뱉어내기도 한다.
흙고래인 모빌리딕은 세차게 몸을 털어 물기를 없애더니만 땅속으로 몸을 집어넣었고.
자유롭게 땅에서 헤엄치는 걸 보니 고래는 고래구나 싶었다.
잠시 놔두자.
쉴 시간은 줘야지.
“우리도 밥이나 먹을까?”
“그에에에!”
좋다고 손을 벌리는 덕춘이.
상점창에서 도시락을 구매해 식사를 했다.
탑은 시간 개념이 애매하다.
낮과 밤이 변화하지 않는 곳도 있고, 포탈을 넘어 다른 층으로 가면 낮이 계속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즉, 생체 리듬에 맞춰 스스로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는 말.
-꼬르르륵
도시락을 반쯤 먹었을 때 들리는 소리.
회복을 마쳤는지 바닥에 앉은 치히린이 군침을 흘리며 날 바라보고 있다.
정확히는 도시락.
모빌리딕도 비슷하다.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고정하는 중.
슥, 도시락을 들어 올리자 눈길이 따라 올라간다.
먹다 체하겠네.
먹을 거로 박하게 구는 것도 치사하고.
“너희도 먹을래?”
“응! 너 착하구나?”
“내가 좀 착하지.”
덕춘이가 언짢은 표정으로 날 노려봤지만 이 정도 경멸하는 시선이야 이미 내성이 생겼다.
[모빌리딕이 정령은 정령석이나 마력이 깃든 게 아니면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도시락을 하나 더 구매해 치히린에게 건네는 타이밍.
모빌리딕이 구슬프게 꿈틀거린다.
정령이라 그런가 까다롭네.
적당한 게 있을까.
정령석은 좀 비싸고.
“이런 것도 먹을 수 있나?”
난 아공간 반지에서 와이번 고기와 메스토카 유충의 살덩이를 꺼냈다.
뭐가 됐든 5성급 몬스터의 부산물.
많지는 않지만 마력이 깃들어 있다.
독도 같이 있어서 그렇지.
끄덕끄덕!
열심히 고개를 움직이는 걸 보니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적당히 꺼내 하늘 위로 던지자.
-텁!
잽싸게 땅 위로 솟아올라 물고 내려온다.
흙먼지가 튈 법도 하건만, 땅의 정령이라 그런지 아무런 저항 없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놈에게는 이곳이 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거겠지.
은근 재미있어서 몇 번을 반복했고.
[모빌리딕과의 친화도가 올랐습니다.]
친화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친해지기 쉬운 녀석이네.
그것보다.
‘얘네 왜 이렇게 모자라 보이지?’
다른 NPC랑 비교하면 뭐랄까.
허술? 허접해… 이건 말이 좀 심하고.
살짝 맹하지만 착한 친구 같은 느낌이 강하다.
덕춘이도 비슷한 감상인지 슬쩍 치히린 옆에 다가가 장난을 쳐 댄다.
“잘 먹었다.”
식사를 마무리한 시점.
난 두 녀석을 불러 모았다.
슬슬 보상도 얻고 이야기 좀 나눠야겠다.
첫 번째 질문은.
“너희가 왜 물에 빠져 있었는지부터 말해 봐.”
역시 이거지.
시스템 제약이니 뭐니, 힘 일부가 봉인되어 있다는 건 알겠다.
다만 그게 물에 빠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본인들이 가장 잘 알 거 아닌가.
물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난 답을 기다렸고.
[모빌리딕이 안전지대로 가기 위한 고난이 있다고 전합니다.]
“나도 안전지대에서 살고 싶어서?”
둘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이거.
퀘스트의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