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44층
머리가 깨질 거 같다.
술을 잔뜩 먹고 일어났을 때 느낌.
탑에 들어오고 술을 마신 적이 없으니 숙취일 리는 없고.
“끄으으, 만드레이크.”
만드레이크의 비명을 듣고 기절한 게 틀림없다.
검은 웅덩이에 쓰러졌으니 익사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언제 옮겨졌는지 그늘진 나무 아래에서 눈을 떴다.
옆에서는 덕춘이는 날 핥고 있다.
덕춘이가 도와준 거겠지.
피식 웃으며 녀석을 쓰다듬는데.
“으엥? 얘는.”
“게헤헤헤헥.”
예상치 못한 게 같이 있다.
내가 뽑았던 만드레이크.
어떻게 됐나 했더니만 덕춘이가 제압한 모양이다.
사람 얼굴처럼 생긴 뿌리가 퉁퉁 부어 있다.
뺨을 때렸던 게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
와, 식물도 때리면 붓는구나?
덕분에 새로운 상식을 알았다.
“끼, 끼에에.”
얼마나 맞았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떨고 있는 만드레이크.
구원을 요청하듯 내게 손을 뻗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으나.
“그에에.”
“끼이…….”
덕춘이가 한번 노려보자 바로 꼬리를 말고 쭈그러들었다.
그러게 킹갓 덕춘 님한테 빽빽거리지 말았어야지.
나도 맞으면 목이 돌아가는 게 덕춘이 손바닥인데.
“나이스, 덕춘이.”
“궤엑!”
손바닥을 내밀자 하이 파이브 하는 녀석.
진짜 덕춘이 아니었으면 바로 40층 안전지대로 다이빙했을 거다.
그런데.
“넌 왜 괜찮냐?”
보호 스킬을 가지고 있던 나도 버티지 못했다.
덕춘이는 관련 특성도 없는데.
설마 피지컬로 때운 건가.
아니면 종족값이 있어서 버틴 걸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덕춘이도 영물이잖아, 만드레이크는 영약이고.
“그엑. 그엑.”
내 생각이 맞다는 듯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영물과 영약의 승부.
승자, 영물 덕춘이!
뭐가 됐든 좋은 소식이다.
그것보다 여긴 어디지?
분명 땅굴 속에 있었는데, 지금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숲이다.
저 멀리 절벽도 보이고 햇볕도 따뜻하다.
[44층]
[선택하기 (0/1)]
“위로 올라왔구나.”
“그에에.”
정신을 잃은 상태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만드레이크를 제압하면서 선택을 한 거로 판단된 것 같다.
난 알림 로그를 살폈다.
[두 갈래의 위험을 제압했습니다.]
[선택 완료.]
[44층으로 이동합니다.]
역시나.
준비해 둔 위협을 모두 처리한 시점에서 클리어 조건을 채운 건가.
43층은 위험했다.
메스토카 유충 때도 까딱 잘못했으면 죽었겠지.
만드레이크는 복병이나 다를 바 없었고.
“도전과 보상.”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선택지는 분명 기회를 줬다.
되돌아가는 것만으로도 클리어할 수 있도록 해 뒀으니까.
욕심이든 호기심이든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만드레이크나 유충을 만났겠지.
죽으면 헛수고지만 이겨 낸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스킬북 2개와 장신구, 영약인 만드레이크를 얻지 않았는가.
그 외에도.
“장난 아니네.”
스킬 레벨이 상당히 올랐다.
만드레이크의 비명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
[정신 보호 (B) Lv.4]
[저주 내성 (C) Lv.6]
이 정도면 단기간에 오른 거로는 신기록 달성이다.
그 말은?
“덕춘아, 한 번 더 하자.”
효율 높게 스킬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
“그에?”
뭔 미친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
내가 생각해도 정신 나간 소리 같기는 하지만 이만한 방법이 없다.
“어차피 네가 옆에 있으면 적당히 조절할 수 있잖아.”
“그에에.”
스윽, 덕춘이가 만드레이크를 바라본다.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는 꼴이 서열 정리가 완전히 끝난 게 분명하다.
느끼지 않았던가.
‘고작 영약 따위한테 당하다니.’
부끄럽다. 반성하자, 조현수!
벌써 나태해지면 안 되지.
앞으로 어떤 괴물을 만날 줄 알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하기 전에 안전 확보부터.”
난 주변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혹시라도 훈련 중에 몬스터가 덤벼들면 곤란하니까.
뭐, 만드레이크의 비명을 듣고도 이쪽으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5성급 몬스터인 메스토카 유충도 만드레이크가 있는 곳은 피했었다.
아무튼 이걸로 준비는 끝.
“덕춘아, 사운드 온.”
난 정신을 다잡으며 긴장했다.
침을 삼키며 만드레이크를 노려보자, 덕춘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만드레이크를 비튼다.
“끼에에에에엑─!”
[영혼의 절규 (S)]
“크으으읍!”
다시 들어도 굉장하다.
괜히 S급 스킬이 아니라 이건가.
정신 보호와 저주 내성 스킬이 곧장 활성화되며 놈의 공격에 대항했다.
그럼에도 정신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대로라면 저번처럼 쓰러질 게 분명할 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왜냐.
“출력 조금만 낮춰 줘!”
“궥궥.”
-찰싹!
“끼, 끼에에에.”
물리치료사 덕춘 님이 적정선을 유지해 주고 있으니까.
뺨따귀 한 번에 소리가 반으로 준다.
여전히 힘들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한계점에 가깝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수준.
딱 내가 원하는 강도였고.
“조금씩 올려 줘.”
“그에에에.”
내 마음을 읽은 덕춘이는 만드레이크를 꼬집으며 훌륭한 컨트롤을 보여 줬다.
머리 위로 올라오는 스킬 레벨 업 메시지.
만드레이크의 울음소리와 함께 시간이 흘렀다.
* * *
학습 효과라는 게 있다.
비록 지능이 낮더라도 반복적인 자극과 보상, 교육을 통한다면 충분히 교육할 수 있다는 거.
조건 형성.
파블로프의 개와 스키너 상자.
여기, 내 앞에 있는 만드레이크도 비슷했다.
자그마치 전설적인 영약.
영물인 덕춘이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신비롭고 지성이 있었기에 어떻게 해야 평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더덕아, 소리 키우자.”
“끼에에에에엑!”
“오바 하지 말고, 한 톤 낮춰.”
“끼에으에에에.”
이제는 간단한 단어도 알아듣는다.
대부분 손짓으로 알아차리는 거 같기는 하지만.
계속 영약, 만드레이크라고 부르기도 뭐해서 더덕이라고 이름도 지어 줬다.
“오케이, 여기까지. 수고했다.”
“끼엑! 끼엑!”
-쏴아아아아
훈련을 도와준 더덕이한테 워터로 물을 줬다.
이제 나한테 몸을 비비며 애교까지 부린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 애완용으로도 키운다고 설명이 적혀 있었지.
그래그래, 고생했으니 이것도 먹어라.
[집착하는 망령 (A) Lv.4]
-영체를 소환해 상대를 구속합니다.
-물리 공격에 강한 내성.
원래라면 속박기로 사용해야 하는 스킬이었지만 더덕이 앞에서는 다르다.
“끼헤에엑!”
[만드레이크]
-전설적인 영약
-최상위 마법 재료
-흑마법사의 보물
-애호가들의 귀염둥이
-죽인 대상의 영혼을 흡수하고 시체는 거름으로 씁니다.
자그마치 영혼을 먹고 자라는 괴이한 생물이었으니까.
망령 역시 영체. 훌륭한 영양분이었다.
-끼아아아아아!
호로록, 더덕이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망령이 불손한 눈빛으로 날 노려본 거 같지만 착각이 분명하다.
당근과 채찍.
겸사겸사 내 스킬 레벨도 올리고.
집착하는 망령도 레벨이 4까지 올랐다.
원래 목표였던 정신 보호와 저주 내성?
[정신 보호 (A) Lv.6]
[저주 내성 (B) Lv.8]
등급까지 올릴 수 있었다.
역시 S급 스킬을 견딘 보람이 있다.
이것도 이제 끝이지만.
효율이 좋더라도 같은 것만 반복하니 점점 성장이 제자리걸음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기도 뭐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네.”
이제는 등반을 해야 한다.
44층에 올라온 지 나흘째.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에 쏟았지만 필드에 관심을 끈 건 아니었다.
이곳 역시 어딘가에 선택지가 존재할 것이며, 난 그것을 찾아내야 했으니까.
거점을 잡고 하루 3시간씩은 주변을 순찰했다.
어떤 몬스터가 돌아다니는지, 위협이 될 만한 건 없는지.
확인 결과 44층 필드에는 두 종류의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었다.
하나는 숲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녀석.
[철면귀]
-4성급 몬스터
-무리를 이루어 움직입니다.
-어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네모난 쇳덩이로 된 가면을 쓰고, 지푸라기인지 털가죽인지 모를 것을 덮고 있는 놈들.
그림자같이 요동치는 연기가 몸을 대체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이빨이 나간 박도를 쥐고 있다.
그리 강해 보이지 않지만 4성급. 게다가 집단생활을 한다.
움직일 때도 6마리씩은 꼭 붙어 다니고, 무리 전체를 합친다면 수십 마리는 가뿐히 넘길 것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백 단위일 수도 있고.
깊숙한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아서 확실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놈들이 최근 들어 수상한 낌새를 보였다.
어둠 속성이라 그런지 어지간해서는 숲 바깥까지는 나오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숲 밖을 들락거리니까.
나를 노리는 건 아니다.
목표는 저쪽, 절벽.
-키헤아아아악!
[괴익조怪翼鳥]
-5성급 고룡족 몬스터
-거대한 날개를 펄─럭!
-저 커다란 게 납니다! 신기하죠?
와이번의 조상 격 되는 몬스터이자, 일전에 마주했던 화갑룡과 친구 먹는 놈이다.
고룡족인 만큼 브레스까지 살벌하게 뱉어 낼 게 뻔했고, 덩치 역시 어마어마하다.
몸뚱이만 봐도 굉장한데, 날개까지 전부 펴면 순간적으로 하늘이 가려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피지컬 좋은 건 척 봐도 알겠고.
슬쩍 시선을 내렸다.
“저기 둥지가 있단 말이지.”
내 관심을 끄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절벽 끄트머리.
바위를 깎아 만든 둥지에는 탐스럽게 생긴 알 3개가 있었다.
거대한 크기와는 달리 생긴 건 메추리알 같다.
-키하아아아악!
-까그극, 까극
-까그그그
괴익조는 날개를 펼쳐 위협하고, 철면귀는 무리를 지어 절벽을 오르려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
선택지가 주어진 건 그때였다.
[철면귀는 동족을 먹이로 삼는 괴익조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괴익조는 알을 지키기 위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괴익조와 철면귀 무리의 전쟁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누가 이길 것인가.]
[선택하시오.]
[괴익조의 승리]
[철면귀 무리의 승리]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선택지를 준다는 건가.”
난 덕춘이에게 얼차려를 받고 있는 더덕이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슬슬 44층에서 생활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선택지, 얼핏 보면 운을 시험하는 것도 같다.
5성급이지만 한 마리인 괴익조.
4성급이지만 어둠 속성을 지니고 수십, 수백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철면귀.
솔직히 어느 쪽이 이길지 가늠이 안 된다.
그래도 등급이 있는데 괴익조가 이길까 싶다가도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말도 떠오르고.
한마디로 찍으라는 거 아닌가.
“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시험하는 거다.
전력을 가늠할 눈썰미가 있는지.
혹은…….
“직접 전세에 영향을 줘 승리를 만들 수 있는지 말이야.”
선택지 어디에도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는 조건은 없다.
내가 이기기를 원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쪽의 편을 들어 주면 그만.
이게 이번 선택지가 바라는 게 아닐까?
비등비등한 전력이라면 내가 지원해 주는 곳이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안 그래도 두 몬스터한테는 볼일이 있다.
[릴카의 부탁 (3)-강제 퀘스트]
-당신은 릴카의 훌륭한 노예 아니, 재료 수급자!
-이번에도 훌륭하게 재료를 모아 오기를 기대합니다.
-돌바위 거북의 등껍질 (0/30)
-만드레이크 (1/1)
-괴익조의 알 (0/3)
-철면귀의 가면 (0/5)
만드레이크는 얻었고.
남은 알이랑 가면, 등껍질뿐.
그중 두 재료를 여기서 얻을 수 있다.
결국 답은 하나.
“어느 쪽이 이기냐고?”
난 선택지를 바라봤다.
그야 당연히.
“내가 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