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통로
팬 미팅이라니!
그런 끔찍하고도 사악한 발언을 할 줄이야.
[이준석]: 물론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준석]: 커뮤니티 내에서 할 생각이니까요. 무엇보다 공듀 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걸 아는 놈이 내 멘탈은 걱정해 주지 않는구나.
그래, 녀석도 내 정체를 모르니 당연한 건가.
아니지, 알면서도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
핥짝이도 유추해 냈는데 이준석이라고 못 하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멤버들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교류를 한 게 이준석 아닌가.
이 자식, 날 멘붕시켜 암살하려고!
[쁘띠공듀]: Q&A가 정말 필요할까요오오오?
[이준석]: 쁘찡연합은 공듀 님을 바라보고 모인 사람들! 손 한 번만 흔들어 줘도 열광할 겁니다!
[이준석]: 모인 인원 중 일부를 추첨해서 자필 사인도 준다면 대대로 가보로 여기며 충성을 다할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준석]: 탑은 폐쇄된 공간.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공듀 님이 계신바.
[이준석]: 연합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사인까지 하라는 녀석.
이놈은 글러 먹었다. 이미 머릿속에 Q&A와 추첨 상품이 가득해.
처음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도 비슷했던 거 같은데.
사생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열혈팬에 가까운 녀석.
아니다, 사생팬 같다. 나중에 만나면 두들겨 패야지.
“후우.”
심호흡을 하며 진정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게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인지도가 올라갈수록 공략을 보는 사람은 늘어난다.
그뿐일까. ‘잊힌 교단의 팔라딘’ 칭호도 있으니 신성력도 어느 정도 오를 거다.
포션 중에는 생명수와 같은 신성력 기반의 물약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 인권은?
콘셉트질을 유지하면서 하하, 호호 떠들라니. 그것도 추종자들이랑 함께.
어떤 질문이 나올까.
막 쓸데없는 질문이 나오지는 않겠지?
[이준석]: Q&A에서 공듀 님의 신상 정보를 요구하거나 이상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쳐 낼 생각입니다.
[이준석]: 많은 사람이 몰릴 테니 제가 몇 가지 질문을 추려 공듀 님께 전달할 예정이고요. 공듀 님은 그 질문에만 답해 주시면 됩니다.
[이준석]: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에는 모두 탑을 오르는 사람들이니까요.
내 걱정을 눈치챈 걸까 이준석이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 준다.
이준석이 말한 대로다. 쁘찡연합이니 뭐니 해도 모두 탑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
다른 건 몰라도 등반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임하겠지.
이렇게까지 해 준다면 어쩔 수 없지.
이준석 역시 나랑 대형 길드에 관해서는 약간 맛탱이가 간 반응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똑똑한 사람이다.
연합을 만들고 관리하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거기에 등반까지 하고 있으니 대단한 놈이긴 하다.
일단은 내 팬이니까 곤란한 질문은 받지 않겠지.
조금은 믿어 보자.
[쁘띠공듀]: 좋아욧!
[이준석]: 오오오! 감사합니다!
이왕 하는 건 좀 더 적극적으로 해도 될 것 같다.
겸사겸사 처치 곤란한 것들도 정리하고.
[쁘띠공듀]: 사인과 함께 다른 경품도 준비하도록 하죠, 이름하여 랜덤 포션 박스!
[쁘띠공듀]: 추첨으로 1,000명 뽑아서 주는 거예요.
[이준석]: 1,000개나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쁘띠공듀]: 엣헴☆ 전부 유용한 건 아니에요.
[이준석]: 그게 더 재밌지 않겠습니까.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쁘띠공듀]: 포션은 개인 거래로 보내겠습니닷.
난 42층에서 만든 포션 절반을 보냈다.
나머지는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을 생각.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탑. 쓸 수 있는 패는 많을수록 좋겠지.
[이준석]: 40층에 도착한 후에 Q&A를 가질까 합니다. 현재 36층이니 안전지대에 올라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쁘띠공듀]: 때가 되면 알려 주세용.
[이준석]: 알겠습니다!
예정에 없던 팬 미팅이 잡혔다.
이준석이 40층에 올라오는 대로 진행할 거 같으니 나도 그 전에 자리를 잡아 놔야겠다.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서 놀 수는 없으니까.
가능하면 44층까지는 올라가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동굴부터 돌아다녀 봐야겠지?”
“궤에에.”
따로 빛이 들어오는 곳이 없어서 그런지 동굴은 어두웠다.
야간 시야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바람마저 불지 않았다.
출구와 연결된 곳이 없거나 먼 곳에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바닥에서 미약한 빛이 올라온다.
[발광 이끼]
-빛을 내뿜는 이끼
-생각보다 보드랍습니다.
-다양한 물약과 일부 장비 제작에 쓰입니다.
“이거 좋지.”
42층에서 포션 만들 때 종종 썼던 거다.
생명수를 만드는 재료기도 하고.
은근히 비싸서 많이 못 샀던 건데, 이참에 좀 챙겨가야지.
탑의 생태계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아니면 지식이 늘어서 그런가.
평소였다면 조금 신기해하고 넘어갔을 것도 소중한 재료로 보인다.
재밌는 게 이 발광 이끼라는 건.
“물을 잔뜩 주면 주변에 있는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지.”
그런 식으로 빛을 모아 발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탑 생성 이후 말이 안 되는 게 뭐가 있겠나.
주변에 놓인 이끼를 잔뜩 뜯어 아공간 반지에 넣었다.
다시 전진.
30분 정도 걸었을까.
“두 갈래 길이라.”
길이 나뉘었다.
[한번 통로로 진입하면 다른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선택지는 아니었다.
주의 사항 정도.
한쪽을 고르면 다른 곳은 갈 수 없다는 말인데.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어느 쪽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
“음?”
난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지만 뭔가가 그려져 있다.
왼쪽 통로에는 까만색 동그라미가, 오른쪽 통로에는 노란색 별이 그려져 있다.
야간 시야 레벨이 좀만 더 낮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
[스킬 레벨 업!]
[야간 시야 (E) Lv.8]
어두운 곳에 계속 있었기 때문인지 스킬 레벨이 올랐다.
레벨이 오르며 시야가 한층 뚜렷해진다.
다른 흔적은 없나 살펴봤지만 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
통로는 길었고 어두웠기에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스킬도 만능은 아니라 이거겠지.
조금 더 밝으면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웠다.
[인챈트 (A) Lv.6]
-돌멩이에 파이어 (D)를 인챈트 합니다.
화륵. 돌멩이에 불이 붙었다.
순간 눈이 아팠지만 참아 냈고, 그대로 좌측 통로에 집어 던졌다.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돌멩이.
불길이 지나가며 내부의 모습이 얼핏 보였고.
“오우.”
찰나지만 수많은 해골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으로 보이는 것부터 해서 짐승으로 보이는 뼈까지.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인다.
오른쪽은 어떨까.
똑같이 불에 휩싸인 돌멩이를 던지자.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
뼈는 없었지만 위험해 보이는 흔적이 보였다.
통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축축한 액체.
마치 거대한 민달팽이가 지나간 것만 같다.
범위로 봤을 때 덩치는 최소 대형급.
“사람들과 몬스터가 죽어 나가는 통로냐, 아니면 거대 괴수가 있는 통로냐.”
이건 뭐 어떻게 죽을지 고르라는 거 아닌가?
그것보다 통로에 있던 표식은 어떤 의미일까.
모르겠다. 가 보면 알겠지.
“오른쪽으로 가자.”
“그에에.”
왼쪽에는 뭐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반면에 오른쪽 통로는 거대한 괴물이 있다는 걸 안다.
그 차이만으로도 대응할 수단이 생기는 거지.
-쯔으으억
벽면에 묻은 체액을 만졌다.
미끈거리면서도 묘한 점성이 있다.
눈에 힘을 집중해 권능을 발동시켰다.
[메스토카 유충의 진액]
-네임드 몬스터, 메스토카의 유충의 몸에서 나오는 진액입니다.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좋아질지도?
-가끔 요리에 쓰기도 합니다.
“메스토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난 앞으로 걸어가며 고민했고.
“이런 미친!”
곧 기억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메스토카.
탑이 생성되고 수많은 몬스터가 튀어나왔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큰 피해를 입힌 괴수가 존재했다.
재앙이라 불린 세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
기존의 몬스터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강력함에 수많은 헌터가 좌절하고 국가 단위의 피해를 입었다.
도심이 초토화되는 건 물론이고,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놈은 나라 하나를 아작 냈다.
그나마 단일 객체로 나타났기에 어떻게든 잡아낼 수 있었던 녀석들.
메스토카 역시 그중 하나였고.
“독일과 프랑스가 연합해서 겨우 잡은 녀석이잖아.”
나라 두 개가 힘을 합칠 정도로 강했다.
S급 헌터 두 명이 사망.
A급 헌터 역시 54명이 희생됐다. B급 이하? 아예 공개 자체를 막았다.
언론에 보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당했을 게 분명하다.
민간인과 군인들까지 포함한다면 사상자가 천 단위는 가뿐히 남긴다는 말이 있다.
막바지에는 다른 나라에서 파견 나온 이들까지 가담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게 벌써 6년 전인가.
언론을 압박했는지, 아니면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건지 참상의 규모에 비해 빠르게 잊혔다.
뉴스에서도 다루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는 괴담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야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전부 찾아봤지만.
분명 곤충형 몬스터였다.
초대형종.
미사일도 막아 내는 강력한 갑주.
일대에 있는 건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식탐까지.
그런 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쿠르르르
“크흡.”
통로가 울리며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뒤를 돌아봤다.
[한번 진입한 통로는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시스템적으로 막힌 입구.
뒤는 아니다.
그렇다면.
“위?”
처음에는 짐작.
지금은.
“젠장!”
확신이 들었다.
진동이 가까워짐에 따라 놈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메스토카. 놈이 성체가 되기 전의 유충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닐 건 분명했다.
왜냐.
“이 통로, 전부 놈이 만든 거야.”
전력으로 달려가는 와중에도 벽과 바닥, 천장에 묻은 진액은 여전했다.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덩치만 해도 위협적이건만 움직이는 속도도 엄청나다.
난 통로를 달리고, 놈은 땅을 파며 돌진하는데 속도가 비슷하다.
날 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쫓아오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동안의 경험이 없었다면 조급함과 두려움에 페이스를 잃었을 정도.
“쿠하아아아아악!”
방금 지나간 곳이 무너지며 거대한 뭔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거대한 살덩이 같은 무언가.
마치 기차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콰르르릉!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통로 일부가 주저앉았다.
사람 몸통만 한 바위가 어지럽게 떨어진다.
진동을 느끼고 따라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
냄새를 맡는 걸 수도 있다.
놈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더 수월하게 대응하겠지만 이미 모습을 숨긴 상태.
찰나의 순간 정보를 읽으려고 했으나.
[메스토카 유충]
-네임드 몬스터, 메스토카가 되기 전의 유충입니다.
-5성급 몬스터…….
[대상이 시야에서 이탈했습니다.]
[권능 사용이 종료됩니다.]
알아낸 거라고는 5성급 몬스터라는 것뿐이다.
유충 주제에 5성급이라니. 태생 자체가 다른 몬스터다.
진정하자.
머리를 굴리자.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며 생각했다.
5성급 몬스터. 위험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상대할 수 있다.
이미 30층대에서 팀원들과 사냥하지 않았던가.
보조해 줄 사람은 없지만 나 역시 성장했다.
다만 환경이 좋지 않다.
놈은 움직임이 자유로운 데 반해 난 뚫려 있는 통로를 통해 움직이고 있으니까.
기동력에서 지고 들어간다.
이대로라면 기습을 당하는 건 놈이 아니라 나다.
그래도 한 가지 알아낸 게 있다면.
“적어도 해저 터널은 아니야.”
그랬다면 저 덩치 큰 녀석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테니까.
해저였다면 물이 들어와도 진작에 들어왔을 거다.
전체적인 지반이 튼튼하다는 것.
[디그 (D) Lv.1]
벽에 손을 대고 디그를 사용했다.
폭발로 벽을 뚫는 건 안 된다. 내 위치가 드러나는 건 물론이고, 지반이 단단하다고 하더라도 통로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가그그극
쑥 들어가는 벽면.
등급이 올라서 그런가 범위가 제법 넓다.
연달아 디그를 사용하며 앞으로 달렸다.
가능하다면 지하를 벗어나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
적어도 폭발을 일으켰다가 파묻히는 꼴은 피할 수 있도록.
-쿠르르르르!
진동이 가까워진다.
따라붙은 건가!
난 소리의 근원을 노려봤고.
“크아아아아!”
땅에서 솟은 메스토카 유충이 나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