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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76화 (176/740)

176화 43층

순간 감동했다.

데미 데몬, 이 녀석! 이별을 느끼고 내게 선물을 주려고 하는구나!

“그에에.”

덕춘이가 띠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왜, 어차피 위로 올라갈 거 서로 윈윈하면 좋잖아.

녀석은 생명수를 얻고, 난 아이템이랑 팁을 얻고.

앞으로 또 언제 보게 될 줄 알고.

그런데…….

“얘 NPC였나?”

등반에 대한 팁이라니. NPC가 아니라면 줄 수 없는 조언이다.

그렇다고 NPC라고 하기에는 따로 표시도 안 됐는데.

이런 허접하게 생긴 관에 봉인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는 특별한 몬스터인가도 했지만 등급조차 뜨지 않았다.

즉,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

[데미 데몬이 생명수를 달라고 외칩니다!]

“알았어. 기다려 봐.”

뭐든 이야기를 해 보면 알겠지.

난 박스에 담아 둔 생명수를 꺼냈다.

숙련된 만큼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물건.

뚜껑을 여니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냄새가 난다.

척 보기에도 악마와는 상극일 것 같았지만.

얘는 뭐 좋아라 하니까.

말뚝에 병을 대고 천천히 생명수를 부었다.

관 안으로 스며들기까지 10분.

-그그그그극!

놈이 부르르 떤다.

오랜만에 맛보는 거라 그런지 반응이 좋은데.

회사를 다닐 때 금연한답시고 일주일 참다가 다시 담배를 피운 과장이 저랬었다.

금단 증상이 무섭기는 하구나.

[데미 데몬이 경탄합니다.]

[타락! 타락하는 이 기분, 짜릿하구나!]

난 잠시 놈이 즐길 수 있도록 놔뒀다.

지금 뭘 물어봤자 답도 안 해 줄 거 같고.

악마가 타락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착해지는 건가?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두 번째 생명수를 부었다.

그동안 신세 진 것도 있고 하니 아낌없이 줄 생각.

“적당히 맛봤으면 약속한 거나 주지?”

[데미 데몬이 아공간 반지를 지급합니다.]

[신성! 타락! 완성되지 않았기에 누릴 수 있는 쾌락이라며 소리칩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며 위에서 떨어진 물건을 집었다.

얇은 금속 반지.

금이나 은은 아닌 거 같다. 굳이 따지자면 검은 쇠로 만든 것 같달까.

[악마의 외출용 아공간 반지 (AA)]

-귀속 아이템

-용량은 대단하지 않지만 간편합니다!

-데미 데몬이 소유권을 양도했습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자 아공간과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쓰는 물건이었지만 사용법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쑤욱

“오오!”

아공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팔을 뻗자 공간이 일렁이며 손이 들어갔다.

용량 자체는 보물 주머니보다 작지만 훨씬 편하다.

아무래도 주머니는 사용할 때마다 열고 해야 하니까.

반면에 이건 손만 뻗으면 아공간이 열린다.

마음에 든다. 이 정도면 인벤토리랑 비교해도 손색없다.

살펴보니 건물로 치자면 3평 정도의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

잠시 데미 데몬을 놔두고 한곳에 모아 두었던 포션을 아공간 반지에 넣었다.

생명수 몇 병 빼 두는 것도 잊지 않고.

난 계속해서 생명수를 부으며 물었다.

“그래서 팁이 뭐야. 네 정체부터 말해 봐, 악마 맞아?”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육신을 매개체로 현신하는 중이었다.]

[헌신 도중에 봉인되어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됐지만 말이다.]

[아아… 신성이 차오른다!]

헌신이라.

그래서 저 모양이었구나.

완전히 악마가 되지 못한 상태.

본래의 힘이 온전히 깃들기 전에 봉인된 거다.

이단 심문관이 백작가를 박살 낸 이유도 알겠다.

놈을 완전히 없애기 위함이겠지. 혹여나 봉인이 풀리고 헌신에 성공한다면 악마가 돌아다니게 될 테니까.

[잘 들어라, 생명수 공급자여.]

[내가 있던 제1마계는 멸망했다.]

[우리는 헌신을 통해 인간계로 이주하려 했지.]

이주라.

예전에 미궁에서 만난 리치도 비슷한 말을 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킬더레스와 계약했다고.

데미 데몬과는 상황이 반대기는 했지만 하려던 짓은 비슷했다.

[제1마계부터 제7마계까지. 마계는 다른 세계보다 빠르게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 아아! 신성이 스며든다!]

“그래그래. 계속 말해.”

세 번째 생명수를 부었다.

이어서 네 번째 생명수까지.

[마음이 평온해지는구나.]

[마계는 필연적으로 멸망을 불러온다.]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 단지 누가 먼저냐의 차이일 뿐이다.]

[생명수가 몸에 깃든다!]

어째 점점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하는 거 같은데.

계속 줘도 되는 걸까.

슬쩍 생명수를 멈춰 봤지만.

[네노오오오옴! 약속하지 않았더냐!]

[생명수를 다오!]

[악마는 약속을 지킨다! 이런 악마보다 악독한 자가 존재하다니!]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난리를 쳐 댄다.

어쩔 수 없이 다섯 병째를 부었다.

관 뚜껑 사이로 생명수가 넘치는 것도 같고.

괜찮나 이거?

서서히 걱정이 들기 시작하는 타이밍.

[황홀하구나.]

[탑을 오르는 이여, 우리는 실패했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 역시 정답이 아니다.]

[멸망을 가속할 뿐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파아아아앗!

관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온화하면서도 강렬한 신성력의 폭발!

[데미 데몬이 완벽히 봉인되었습니다.]

[데미 데몬이 안식에 빠져듭니다.]

[전 서버 최초! 데미 데몬을 완전 봉인시켰습니다!]

[혼돈 수치가 5 증가합니다!]

[42층 클리어]

[43층으로 전송됩니다.]

데미 데몬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완전하게 봉인당했다.

신성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관.

찬란한 빛과 함께 난 포탈에 집어삼켜졌다.

* * *

[43층]

[선택하시오. (0/1)]

눈을 떴을 때는 이미 43층.

그동안 정들었던 비밀 공간은 보이지 않았고 축축한 동굴 내부만 눈에 들어왔다.

끝까지 말을 듣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고생했다, 데미 데몬.”

앞으로 볼 일 없을 녀석을 위해 가볍게 묵념을 해 주고 주변을 살폈다.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놔둬야지. 미련 가져 봤자 뭐 하겠나.

42층에서 얻은 것도 많고.

자, 이제 어쩐다.

내가 있는 곳은 동굴.

뒤편은 막혀 있다. 앞으로 뚫린 곳으로 가야 하는 거 같은데.

폭발을 일으켜 길을 아예 새로 만들어 버릴까.

41층과 42층을 겪어본바 굳이 주어진 선택지대로 할 필요는 없다.

상황에 맞춰서 선택지가 바뀌기도 하는 것 같고.

다만…….

“괜히 잘못 터트렸다가 무너지면 안 되겠지?”

“그에에에.”

이 동굴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

가능성은 낮지만 어디 심해 깊은 곳에 있는 동굴이면 말할 것도 없이 사망.

안전지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 42층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서 조금 뒤처지기도 했고.

듣자 하니 핥짝이는 44층 돌파 중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다른 애들은 어쩌려나.

커뮤니티를 켰다.

[니머리 탈모]: 냥펀아, 슬슬 나오지?

[냥냥펀치]: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음

[니머리 탈모]: 39층인 거 다 안다. 그만 버티고 올라와.

[냥냥펀치]: 으응? 아냥. 나 41층임.

[니머리 탈모]: 구라 ㄴㄴ. 내가 39층 1등으로 깼는데.

[냥냥펀치]: 엇갈렸나 봄ㅎㅎ. 41층 안 가냥?

[니머리 탈모]: 응, 너랑 손잡고 갈 거야^^.

[정수리 핥짝]: 포기하면 편해, 냥펀.

[쁘띠공듀]: 데이트 잘 하세욧. (찡긋!)

[정수리 핥짝]: 다음 타자 어서 오고

40층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구먼.

기어이 냥펀을 보려는 것 같다.

냥펀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놈이 무슨 수로 찾아내려고.

다 방법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아니다. 탈모맨이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버티는 걸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냥펀만 못 만났네.

어떤 녀석이려나.

-띠링

오늘도 어김없이 뻘짓을 하는 멤버들과 놀고 있는데 이준석으로부터 개인 메시지가 왔다.

[이준석]: 공듀 님, 강녕하십니까! 저도 이제 등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쁘띠공듀]: 오오! 올라오는 건가요?

[이준석]: 예. 대형 길드 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여 줬으니 위로 향해야죠.

이준석. 연합을 만들고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녀석.

이래저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본인도 내 덕을 좀 봤지만.

대형 길드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현 상황에 누구보다 만족스러워할 거다.

[이준석]: 이제 30층 중반을 달리고 있습니다.

“얘도 멤버들이랑 비슷하게 올라오고 있네.”

나보다 먼저 탑에 불려왔으니까 당연한 건가.

죽은 형에게 들은 정보와 아이템도 있으니 등반하는 건 다른 이들에 비하면 더 수월할 테고.

[이준석]: 여러 일이 있었던 만큼 탑 내부에서는 대형 길드가 설치기 힘들겠지만 밖은 아닐 겁니다.

[쁘띠공듀]: 그렇겠죠. 사실상 본진은 그쪽이니까요.

[이준석]: 공듀 님의 공략 덕분에 이전과는 달리 전체적인 생존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눈부신 성과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칭찬해 대는 걸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칭찬 듣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준석]: 하지만 아직 상위층에 도달하려면 멀었습니다. 사실 상위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요

상위층이라.

현재까지 밖에 나온 헌터 중 가장 높은 곳을 오른 자가 64층.

그가 말한 것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60층 이후의 정보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이준석]: 아실지 모르겠지만 60층을 넘어선 이들도 존재합니다. 대형 길드 루키 중에도 존재하죠.

[쁘띠공듀]: 루☆키요?

[이준석]: 기밀이기는 합니다. 저도 형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아니, 형 역시 구룡 길드의 루키가 아니었다면 몰랐겠죠.

[이준석]: 다른 대형 길드와 달리 구룡은 관리하는 층이 없습니다.

언제 한번 이준석이 말했다.

층별로 관리하는 길드가 있다고.

6층에서는 산군이, 10층은 다성과 이클립스가 있었다. 50층대는 무학성이었던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만 서도.

당장 40층대에 있을 때도 그랬다. 예전이었다면 청룡 길드가 관리했을 터.

“60층대는 관리하는 곳이 없다고 했었지.”

사실상 60층까지 올라가는 인원이 거의 없으니 관리할 이유가 없다.

나선다 하더라도 60층까지 오른 헌터가 따를지도 의문이고.

60층은 현재 기준, S급 헌터로 분류되는 층.

그럼 구룡 길드는 무엇을 하는가.

자타 공인 1위 길드인 만큼 탑 관리에는 손을 떼겠다는 걸까.

[이준석]: 구룡 길드는 탑 공략에 전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준석]: 다른 대형 길드도 루키를 배출하기는 하지만 성과는 그리 좋지 않죠.

[쁘디공듀]: 루키 정도면 꽤 대단한 거 아닌가요?

[이준석]: 밖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습니다만 제가 말하는 건 좀 다릅니다.

잠시 뜸을 들인 이준석이 메시지를 보냈다.

[이준석]: 60층을 너머 아직 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이준석]: 구룡 길드에 2명, 무학성에 1명, 산군의 루키도 바깥 시간으로 3년째 나오지 않고 있죠. 60층대를 돌파했거나 돌파 중일 가능성이 큽니다.

몰랐던 사실이다.

아니, 약간은 짐작했다.

탑이 생성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누군가는 여전히 탑에 살아남아 위로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그렇다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대형 길드에서 광고를 안 했을 리가 없다.

그전에 한 번이라도 커뮤니티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탑은 폐쇄된 공간. 할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는데 커뮤니티를 안 한다?

정체를 밝히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가.

사람이 과시욕이라는 게 있는데 한 번도 내색을 안 한다고?

[이준석]: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길드장과 루키에게만 전해지는 정보니까요. 혹시나 상위층으로 올라 그들과 합류할 때를 대비해서 말이죠.

[이준석]: 대형 길드도 자세한 건 모르는 눈치입니다. 어쩌면 상위층에 있는 이들이 연락을 끊은 걸 수도 있어요.

[이준석]: 따지고 보면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없으니까요. 실질적으로 길드의 손을 떠났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쁘띠공듀]: 이 정보를 알려 주는 이유가 뭐죠?

덕분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위에도 등반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니까.

솔직히 부담감이 있었다. 난 무조건 100층을 클리어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서는 혼자서 말도 못 할 정도로 오랜 기간 탑을 떠돌아다닐지도 몰랐다.

공략을 뿌리고 멤버들이 낙오 없이 위로 향하기를 바라는 이유도 혼자이기 싫은 심리가 컸다.

그런데 이준석은 이걸 왜 말하는 것인가.

[이준석]: 저는 그들의 목적을 모릅니다. 길드를 떠났다는 것 역시 저의 희망 사항일지 모르죠. 그들이 밖으로 나간다면 전례 없는 강자의 출현일 것이고…….

[이준석]: 만약 그들이 대형 길드와 뜻을 같이한다면 그들의 입지는 확고해질 겁니다.

[이준석]: 이후에는 지금까지의 일이 되풀이되겠죠. 그만한 힘이 생기니까요.

[이준석]: 공듀 님, 전 믿습니다. 공듀 님과 탈모맨, 핥짝이, 냥펀 님이 높은 곳까지 오를 것이라는 걸요.

[이준석]: 저와 연합 사람들 역시 그럴 겁니다. 그렇게 만들 겁니다. 대형 길드와 대항할 수 있게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감이라면.

설마.

[이준석]: 밖에 나가서도 하나로 힘을 합칠 수 있다면 그들과 맞설 수 있습니다.

[이준석]: 그런 의미로 쁘띠공듀 님.

난 침을 삼켰고.

[이준석]: 날 잡아서 Q&A 시간을 가지죠! 공듀 님을 더욱 덕질 아니, 칭송하기 위해!

[이준석]: 공듀 님은 저와 연합 사람들의 은인! 영웅! 공듀! 세상에 더 알려져야 마땅합니다! 이참에 굿즈도 만들고 어록집도……!

그의 메시지를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커뮤니티를 껐다.

한마디로.

“팬 미팅을 하라는 거잖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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