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75화 (175/740)

175화 단합을 위하여

선택지가 바뀌었다.

데미 데몬.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제안을 할 줄이야.

그런데 어쩌나.

난 선택지를 고를 생각이 없는데.

아직 비밀 공간에는 사용하지 않은 재료가 가득했다.

퉁. 관을 두들겼다.

“뭘 또 그래. 때 되면 알아서 간다. 좀 더 기다려.”

[데미 데몬이 당신의 사악함에 치를 떱니다.]

[악마에 대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사의 사주냐고 묻습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이거 왜 이래? 나 ‘악마의 친구’ 칭호도 있는 사람이야.”

[……?]

뇌 정지가 왔는지 움직임을 멈춘 관을 놔두고 몸을 돌렸다.

슬슬 쉴 시간이다.

초인이 되면서 체력과 집중력 모두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하루 일정이 워낙 빡빡해야 말이지.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포션을 만들고 있다.

게다가 내성 스킬 단련까지 하고 있으니, 마력도 많이 쓰고 신체적인 부담도 제법 있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

사실 잠들고 나서도 제대로 쉬는 건 불가능 하지만…….

[수면 전투 복기 (A) Lv.8]

-수면 중에 전투를 재경험합니다.

-현재 알리오스의 경험을 토대로 전투 복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알리오스에게 받은 스킬.

잘 때마다 자동으로 사용되어 어느새 레벨이 8까지 올랐다.

덕분에 ‘굴하지 않는 검귀’의 싱크로율도 많이 올랐지만.

“이 녀석도 정상인은 아니야.”

도대체 살면서 전투를 얼마나 많이 했으면 아직도 전투 재현이 끝나질 않냐.

괜히 혈혈단신으로 제국을 위협한 게 아니라는 건가.

가끔 때려 치우고 싶은 마음도 들기는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게 다 뼈가 되고 살이 된다.

확실히 올라간 검술 실력. 알리오스의 전투 센스도 어느 정도 흡수했다.

이전보다 강해진 게 실감 날 정도로.

단순히 스킬 레벨이 높고 낮은 것과는 다르다.

경험에서 나온 바운스라고 해야 하나.

“잠이나 자자.”

머리를 긁적이고 비밀 공간 한쪽에 설치한 간이침대에 누웠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재료는 모두 써 보고 위로 올라갈 거라 상점창에서 싼 거로 하나 사 뒀다.

“그에에에.”

덕춘이는 먼저 자리를 잡은 상태.

선반에 박혀 있던 발열석을 깔고 그 위에 방석을 올려뒀더니만 그곳에서만 잔다.

사람의 물건으로 따지면 전기장판 비슷한 거겠지.

개구리 팔자가 상팔자다.

나 역시 침대에 누워 커뮤니티를 켰다.

탑에 불려오기 전에는 자기 전에 뷰튜브를 봤었는데, 탑에 들어오니 이것 말고는 할 게 없다.

전체적으로 한번 쓱 훑어보고.

[쁘띠공듀]: 냥이 펀치, 냥이 펀치!

[냥냥펀치]: 나를 불렀는가, 소환사여.

[쁘띠공듀]: 오오오!

냥펀에게 말을 걸었다.

이 녀석도 점점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멤버들한테 너무 물든 게 아닐까.

그나마 정상인이라고는 나랑 얘밖에 없었건만…….

[쁘띠공듀]: 흠흠, 재료 좀 사려구욧.

[냥냥펀치]: ㅇㅇ? 요즘 많이 사넹.

[정수리 핥짝]: 또 뭔 짓을 하려고. 그것보다 너 ㅇㄷ?

[쁘띠공듀]: 요정은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답니닷☆

[정수리 핥짝]: 흐흐. 그 정도의 도발은 통하지 않는다. 난 이미 41층에 올라왔으니까!

핥짝이면 올라올 만하지.

나랑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으니까.

[니머리 탈모]: 나도 좀 있으면 40층 도착임

[정수리 핥짝]: 구라 ㄴㄴ, 너 30층대 들간 지 얼마 안 됐잖아.

[니머리 탈모]: 팀 경쟁이라 걍 돌진하니까 되던데?

[냥냥펀치]: 저 ㅅㄲ 미친놈임. 목적지까지 일자로 가더라. 터널 뚫리는 거 실시간으로 봄

[니머리 탈모]: 뭐야, 너 같이 있었어? 말을 하지. 어디냐?

[냥냥펀치]: 냥?

정신 나간 놈들.

탈모맨 녀석 전에도 느꼈지만 잠깐 주춤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번 공략을 시작하면 엄청난 속도로 돌파한다.

특히 30층대면 더 그렇겠지.

팀 단위로 등반을 하는 구간이고, 따로 챙길 만한 히든 피스도 없는 곳이니 오로지 경쟁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의외인 건 냥펀.

냥펀은 평소에도 등반에 열중하는 타입이 아니다.

뭐랄까. 자기 할 거 다 하면서 올라오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모맨이랑 비슷하게 올라오고 있다.

[정수리 핥짝]: 탈모 쉐키, 너 몇 층이라고?

[니머리 탈모]: 36층 클리어, 예아! 자고 내일 37층 깨려고. 공듀, 기다려. 내가 간다!

[정수리 핥짝]: 왜 빨리 깨나 했더니ㅋㅋㅋ엌ㅋㅋㅋㅋㅋ 꿀잼 예약. 나도 얼른 50층대 가서 대기 타야겠다.

[냥냥펀치]: 맞네. 너희 50층대에서 만나기로 했었징. 잘가라, 공듀.

[쁘띠공듀]: 냐… 냥펀도 같이 만나.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지.

[냥냥펀치]: 어림도 없다!

[니머리 탈모]: 맞아. 너 왜 나 피하냐? 40층에서 딱 기다리고 있는다 ㅅㄱ.

[냥냥펀치]: 아앗…….

[쁘띠공듀]: 오붓한 시간 보내시구욧^^

좋았어. 이걸로 자연스럽게 탈모맨의 시선을 돌렸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냥펀으로부터 물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구매했다.

[냥냥펀치]: 공듀… 나 대신 만나주면 50퍼센트 깎아 줄겡.

[니머리 탈모]: 그 정도로 만나기 싫다고?

[정수리 핥짝]: ㅉㅉ, 그러게 평소 행실을 잘했어야지

[니머리 탈모]: 내가 뭐 했다고!

[정수리 핥짝]: 응, 네 셀카 다시 봐.

탈모맨이 셀카를 올렸던가.

종종 커뮤니티에 사진을 올리는 거 같기는 했는데.

목록을 살펴봤다. 탈모맨이 올린 사진이…….

“아, 이건 좀.”

그놈의 쫄쫄이를 여태 입고 있었냐.

커다란 몬스터를 잡고, 다리 한쪽을 걸친 모습이 당찼으며.

-으, 극혐.

-왜, 그게 좋은 거야!

-형, 사랑해! 타이즈 바뀌었네. 그것도 멋져!

-이 남자… 갖고 싶다.

-탈모파는 손을 들어 주세요.

-손.

-(손)

.

.

.

밑에는 댓글이 주르륵 달려 있다.

역시 세상은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다.

다들 삭막한 탑의 생태계에 맞춰 인격을 내려 둔 게 분명해.

그 와중에 댓글 말마따나 타이즈가 바뀌었다.

저번에는 초록색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노란색이다.

오래된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볼 법한 차림.

목에 보타이는 대체 왜 단 거야.

[냥냥펀치]: 탈모맨 옆에 붙어 있기만 해도 수치사 할 것 같음.

[니머리 탈모]: 당당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정수리 핥짝]: 넌 좀 덜 당당할 필요가 있어.

냥펀이야 알아서 하라 그러고.

“이준석한테도 메시지가 와 있네.”

쁘찡 연합의 장이자, 내 조력자인 이준석에서 온 개인 메시지를 살폈다.

[이준석]: 공듀 님! 잘 계십니까? 대형 길드와의 결전을 치른 지도 시간이 꽤 지났군요.

[이준석]: 큰일도 마무리되었겠다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모양이 잡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기운은 넘치는 것 같다.

뭘 꾸미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쁘띠공듀]: 넵! 기다리고 있겠습니닷!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개인 거래로 냥펀이 재료를 준 걸 확인한 후 커뮤니티를 껐다.

쉴 시간이다.

은은하게 퍼지는 약초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 * *

42층 비밀 공간에 들어온 지도 15일이 흘렀다.

[전 서버 최초!]

[42층에서 선택을 하지 않고 보름을 버텼습니다!]

[소수의 천족 NPC가 관심을 보입니다.]

나같이 행동한 사람이 없었는지 메시지가 들려왔다.

천족의 관심이라.

NPC와 가깝게 지내서 나쁠 건 없지.

나중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받을지 모르니까.

그것보다.

“이제 거의 다 사용했네.”

“그에에에.”

보름 동안 미친 척 포션 제작에만 열중했기 때문일까.

비밀 공간에 비축되어 있던 재료를 거의 다 소모했다.

테이블에 올려 둔 공책을 살폈다.

그동안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고 개량을 거듭한 성과가 기록되어 있다.

포션의 종류는 많았다. 상점창에서 파는 건 일부일 뿐. 세상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포션이 있었으니까.

물론 뭐에 쓰는 건지 알기 힘든 것도 존재했다.

예로 들자면.

[맛없어 포션]

-음식에 뿌리면 음식이 맛없어집니다!

-물로 씻어도 우엑!

-양념을 둘러도 웩웩!

-다이어트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이딴 게 대체 왜 있는 거지?

정말 다이어트 용도인가 싶어 덕춘이에게 줘 봤다.

스페셜 도시락에 적당히 뿌려 줬는데.

“그때 맞은 뺨이 아직도 아프네.”

풀스윙으로 혓바닥을 휘둘러 내 뺨을 때렸지.

목 돌아가는 줄 알았다. 잘 먹고 잘 자서 그런가 애 힘이 엄청나.

덕춘이가 음식을 거부하는 건 처음 봤다.

어느 정도인가 싶어 먹어 보니 바로 납득했지만.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맛이다.

정말 놀라운 게 음식 냄새는 그대론데 입에 넣고 씹는 동시에 말도 못 할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바로 봉인.

이건 한동안 쓸 생각이 없다.

“포인트는 많이 깨졌지만 성과는 괜찮군.”

“그에에에.”

침대에 걸터앉은 채 스킬창을 띄웠다.

그동안의 성과가 드러난다.

[러브 앤 피스 (A) Lv.9]

먼저 러브 앤 피스.

주기적으로 신성력을 주입하다 보니 이만큼이나 올랐다.

딱히 얘는 레벨을 올리려고 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일렉트릭 쇼크 (AA) Lv.1]

하루도 빠짐없이 몸을 지진 덕분에 일에트릭 쇼크 역시 AA등급을 돌파.

[전격 내성 (C) Lv.1]

그에 대한 저항값으로 전격 내성 역시 C등급으로 성장했다.

이것뿐일까.

[저주 내성 (C) Lv.3]

[물리 공격 내성 (A) Lv.2]

[강체 (AA) Lv.1]

[독 내성 (B) Lv.8]

[강철의 의지 (A) Lv.2]

각종 내성 스킬과 방어 스킬이 크게 올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저주 단검을 찌르고, 지지고, 덕춘이의 산성 침과 독 침을 맞으며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솔직히 중간중간 위험하기도 했다. 독에 중독된다거나, 데미지가 누적되어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던가.

한 번은 진짜 죽을 뻔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덕춘이가 미친 듯이 나를 핥고 있었지.

녀석이 회복시켜 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릴카랑 하이파이브 하고 있지 않았을까.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과하게 성장하기는 했지만 이것도 한계다.

“단순 노가다로 올릴 수 있는 건 이 정도까진가.”

어느 시점부터 레벨이 잘 오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성 스킬이 올라가면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올라간 모양.

그렇다고 더 무리하자니 도저히 포션을 제작할 컨디션이 안 나와서 말이지.

역시 등반이 답이다. 실전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물약 제조 (A) Lv.8]

맨 처음 목표였던 물약 제조의 등급이 오른 게 가장 마음에 든다.

하면서 느낀 건데 한 가지 물약만 계속 만들어서는 레벨이 잘 안 오른다.

전보다 다양하고 완벽한 물약을 만들어야 오르지.

“쯧. 아직 해 보지 못한 게 많은데.”

난 비밀 공간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포션들을 바라봤다.

무려 2,000여 개의 포션.

더미 구울이 남아 있으면 던져 반응을 살폈을 텐데. 아쉽게도 이미 다 죽었다.

하루에 수십, 수백 개를 뿌려 댔으니 별수 있나.

만들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많기는 하다.

처분하는 것도 골치 아픈 상황.

보물 주머니에 넣을까도 해 봤지만.

[보물 주머니의 용량이 가득 찼습니다.]

이것 또한 만능은 아니었다.

용량에 제한이 있었으니까.

“슬슬 42층에서 볼일도 다 끝났으니 결정을 내려야 하기는 하는데.”

힐끔, 관을 바라봤다.

[데미 데몬이 외칩니다.]

[생명수를 좀만 더! 더 내놓아라!]

“설마 중독될 줄이야.”

“그에에에.”

처음에는 미쳐 날뛰더니 이제는 생명수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아니, 데몬이라며.

데미 데몬은 반쪽짜리 악마니까 괜찮다 이거냐.

애초에 정체가 뭔지도 모르겠다. 몬스터도 아닌 것 같고, NPC도 아닌 것 같고.

[어서 생명수를 내놓지 못할까!]

요 며칠 상태가 걱정되어 생명수 공급을 끊었더니 더 저런다.

얘를 어떻게 할까.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막대하기는 그런데.

그동안 한 짓도 있고.

편하게 보내 주는 게 도리인가.

[Tip. 탑에 오래 머물 경우 인성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뭐야, 이 팁 메시지는.

나랑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니 무시하자.

난 선택지를 살폈다.

그동안 몇 번 더 선택지가 바뀌어서 지금은.

[선택지]

[데미 데몬을 놔두고 탈출하십시오.]

[데미 데몬의 봉인을 해제하십시오.]

이 상태가 되었다.

좋다.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즐거웠다, 데미 데몬. 너의 숭고한 희생은 잊지 않으마.”

42층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언제까지고 여기에 머물 수는 없으니 이제 그만 보내 줘야지.

스윽. 손에 신성력을 머금은 그때.

[데미 데몬이 생명수를 갈구합니다!]

[생명수를 준다면 아공간 반지와 등반에 대한 팁을 주겠노라 선언합니다!]

데미 데몬이 제안을 걸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