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데미 데몬이 제안합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선택지라니.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
이대로 도망치든지 아니면 성물을 재배치해 봉인을 강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기껏 얻은 기회를 날려 버리는 셈이지.”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지만, 막상 비밀 공간에 들어오니 제작 관련 스킬 올리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마련되어 있는 재료도 훌륭하거니와 오컬트에 빠진 백작이 구성해 둔 연구실까지
연금술에도 관심이 있었던 건지 상점창에서 본 적도 없는 것들도 상당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를 얻을까. 지금 할 수 있을 때 다 해야지.
그렇다고 저 관을 그냥 놔두자니.
“봉인이 풀리면 그건 그것대로 선택한 결과가 될 텐데.”
“그에에.”
41층에서도 비슷하지 않았던가.
선택지로 주어진 몬스터와의 싸움을 모조리 해 버렸다.
어느 한쪽과 싸운다는 선택지 자체를 없애 버린 것.
그것도 나름의 선택으로 판단했는지 바로 42층으로 전송됐다.
그렇다고 봉인을 위해 관에 박힌 말뚝을 재배치했다가는 그것대로 선택한 결과가 될 거고.
“이놈의 관! 망할 선택지!”
-콰앙!
급 짜증이 나 관을 걷어찼다.
그 와중에 혹시나 망가질까 적당히.
안에 봉인되어 있는 데미 데몬인지 레몬인지 으르렁거렸지만 신경도 안 썼다.
[데미 데몬이 봉인에서 풀리면 당신을 찢어 죽일 것이라 경고합니다.]
어이구. 이제는 이런 것도 말을 다 하네.
어이가 없어 관을 몇 번 더 차 주다가.
“이거 따지고 보면 신성력으로 봉인시킨 거 아니야. 일단은 악마고.”
“그엑. 그엑.”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덕춘이.
그렇다는 건?
[러브 앤 피스 (A) Lv.4]
-사아아아악!
난 관에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칭호.
[잊힌 교단의 팔라딘-칭호]
-얼음과 불의 교단의 명예 팔라딘에게 주어지는 칭호.
-당신이 활약하는 만큼 교단의 명성 또한 높아질 것입니다.
-잊힌 교단의 대표로 업적을 쌓고 칭송을 받으세요. 그에 따라 신성력이 증가할 겁니다.
그동안 내가 벌인 일이 몇 개고, 나를 따르는 사람이 몇 명이냐.
알게 모르게 신성력이 크게 성장했다.
지금에 와서는 100을 훌쩍 넘을 정도.
-그으아아아악!
데미 데몬이 비명을 지른다.
악마는 마기를 지닌 존재.
신성력과 마기는 상극이다.
서로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
관이 신성하게 빛나며, 놈이 발버둥 치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이 정도로는 선택지에 영향이 가지 않는 모양.
[봉인이 소폭 강화됩니다.]
조용해진 녀석을 놔두고 몸을 돌렸다.
까불고 있어.
급한 불은 껐으니 작업을 시작하자.
선반에서 약재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이번 기회에 포션 제작 스킬 레벨도 올리고 레시피도 정리해 둬야지.
상점창에서 펜과 두툼한 공책을 구매해 책상 위에 펼치고 재료를 분류했다.
포션이라는 게 단순히 약초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당장 상급 포션 역시 몬스터의 부산물을 사용하니까.
그거야 뭐 상점창에서 구하면 된다.
상점창에서 안 팔면 개인 거래로 얻어도 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냥펀한테 부탁하면 돼.”
녀석은 화조국 소속인 만큼 몬스터 부산물도 취급할 테니까.
준비는 완벽하다.
완벽한데.
“단순히 이것만 하면 좀 아쉽지?”
“그에?”
“전에 하던 거 하자.”
“그에에에에.”
시간은 금이랬다.
42층에서 포션을 연구하는 시간 동안 다른 내성 스킬도 올릴 계획.
화기나 냉기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패스하고.
“덕춘아, 저번처럼 독침이랑 산성침 부탁한다.”
“궤에에에.”
이걸로 독 내성과 물리 공격 내성, 강체의 스킬 레벨을 올릴 것이며.
-서각
“어으, 따끔하다.”
보물 주머니에서 꺼낸 단검으로 피부를 살짝 그었다.
한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물건.
[혈괴의 저주 단검 (E)]
-주인 한정, ‘혈괴의 저주 (A)’를 쓸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평범한 단검
31층에서 고대진이 준 저주 내성을 키우기 적절하다.
아직 저주 내성 레벨이 낮으니 조심해서 사용하도록 하고.
[일레트릭 쇼크 (A) Lv.5]
“끄그그그극!”
이번에 얻은 전격 내성 스킬도 올릴 생각.
적한테 쓸 때는 몰랐는데 나한테 직접 쓰니 몸이 절로 떨린다.
하지만 걱정 마라.
[펠라인의 주황 오른 다리 (F)]
-힘 +1
-체력 +2
-방어력 +3
이번에 얻은 펠라인의 주황 오른 다리.
등급은 F에 옵션마저 쓰레기라는 소리가 절로 나지만.
[펠라인 세트 효과 (4/7)]
-올 스텟 +40
.
.
.
-각 파츠별 속성이 개화됩니다.
-각 파츠별 속성의 저항력이 올라갑니다.
세트 효과로 인해 각 파츠의 속성 저항력이 올라간다.
주황 오른 다리의 속성은 전격.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치직, 치지지직
온몸에 스파크가 튄다.
단백질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도 피어오르는 것 같지만 무시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료를 끌어모았다.
정신 번쩍 들고 좋군그래.
“해 보자.”
스킬 레벨을 올릴 시간이다.
“그에에.”
덕춘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42층에 들어온 지 5일이 지났다.
사람은 규칙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나 역시 나름의 생활 루틴을 짰는데.
일단 일어나자마자 몸을 풀고 식사.
레시피가 정리된 물약을 만들며 감을 익히고, 아직 제대로 된 조합을 알지 못하는 포션을 연구.
점심 먹을 때까지 계속하다가.
-끄아아아아아!
내 스트레스 해소제.
아니, 관에다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권능으로 살펴봐도 언제 봉인이 깨진다는 말이 없으니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를 해 두는 셈.
안에 들어 있는 데미 데몬이 부들대는 꼴을 보면 은근 재밌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미 데몬은 이 치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만 살살 해 주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봉인이 풀리는 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처벌을 내릴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렇게 반응을 잘해 주니 내가 안 하고 배기나.
무료한 삶의 활력소 같으니.
얘가 없었다면 42층에서의 고된 시간은 더욱 힘들었을 거다.
내가 따로 줄 건 없고.
-파아아앗!
신성력을 한 번 더 뿌려 줬다.
들썩이는 관.
그래. 너도 좋지? 활발한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하네.
“그에에.”
덕춘이가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돌린다.
너무 그러지 마라. 사람이 한곳에 갇혀서 하던 것만 반복하면 맛탱이가 가기 마련이니까.
후우. 장난은 이쯤하고.
“테스트하러 가자.”
신성력도 뿌려 주고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는 내가 만든 포션을 테스트할 시간이다.
비밀 공간을 세세하게 살핀 결과, 성 내부로 이어져 있는 통로도 발견했다.
내가 들어온 곳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탈출 용도로 만들어 둔 거였으니 이쪽이 정문이다.
-구구구궁
열쇠를 넣고 돌리자 벽이 갈라지며 계단이 드러난다.
발광석을 심어 어둡지 않게 해 둔 곳.
위로 쭉 올라가면.
“여긴 언제 와도 바람이 잘 분단 말이지.”
반쯤 무너진 침실이 나온다.
원래라면 백작이 사용했을 게 분명한 곳.
투석기라도 맞았는지 테라스 쪽이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뻥 뚫린 구멍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퀴퀴한 냄새가 섞여 있다는 것.
어쩔 수 없다.
난 무너진 벽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어어어
-으어어어
성벽 안. 성 내부로 진입하는 필드 위에 언데드가 득실거린다.
악취의 원흉.
만약 내가 숨겨진 통로가 아니라 성벽을 뛰어넘었다면 저놈들이랑 싸워야 했겠지.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신성력이 있는 만큼 사냥 자체는 쉽겠지만 썩은 살덩이랑 놀고 싶지는 않아서.
4성급 몬스터 더미 구울.
얼기설기 시체를 엮어 만든 거인이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는 발화 물질이라 불길에 한 번만 닿아도 자폭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살 파편에 접촉하면 독성이 옮는단 말이지.”
한마디로 여러모로 기분 나쁘고 죽어서까지 피해를 끼치는 놈들이다.
지능은 낮지만.
내게는 좋은 실험 재료들.
보물 주머니에서 제작한 포션들을 꺼냈다.
총 35병.
현재까지 완성된 레시피는 5개다.
이전에도 만들었던 상급 포션.
마비 독과 분노 유발 포션.
화상 방지 포션도 있고, 근력을 올려 주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이번에 만들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중급 무기력 포션]
-액상에 묻은 대상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풀립니다.
이거다, 무기력 포션.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목적이 있어서 포션을 만드는 게 아닌 만큼 일단 만들었다.
새삼 느끼는 건데 포션도 종류가 다양하다.
준비만 철저하면 포션만 써서 층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할 듯싶은데.
반응을 봐 보자.
무기력 포션 30개를 놈들에게 던졌다.
-쿠어어! 쿠어어어.
처음에는 머리를 맞아 분개하던 녀석들이 서서히 바닥에 드러눕는다.
눕지는 않더라도 흐느적거리며 걷는 놈도 있었고, 멀뚱히 서 있는 경우도 있다.
효과가 있기는 하구나.
그럼 다음 포션을 확인해 볼까.
[생명수]
-신성력을 머금었습니다.
-성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화 능력과 디버프 완화 효과를 지녔습니다.
-상처도 일부 회복됩니다.
-꿀꺽, 마시면 머리까지 맑아질걸요?
-언데드와 악마에게는 극독!
오늘의 메인.
제작자가 신성력을 쓸 수 있어야지만 만들 수 있는 물건.
상급 포션보다 치유력을 부족하지만 다른 효과가 좋다.
상대에 따라서는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고.
이렇게.
-파삭
-치이이이익
남은 다섯 개의 생명수를 던져 더미 구울을 맞췄다.
가뜩이나 덩치가 큰 놈인데 무기력증에 걸려 가만히 있으니 빗나갈 확률은 제로.
목표는 편하게 앉아 있는 놈.
덩치가 크니 다섯 병 모두 먹여 주는 게 맞겠지.
“쿠으아어어!”
“그아아아!”
신성력이 놈들의 몸에 침투하며 정화가 시작된다.
뿌옇게 올라오는 연기.
살덩이가 떨어져 나가고 피부가 부식된다.
언데드는 본디 망자.
부정한 존재였고, 생명수는 성수의 하위 격이었으니 놈의 몸을 갉아 먹을 것이다.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놈이 발광하며 돌아다닌다.
동료를 밟기도 하고 포악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나 이미 묻은 생명수를 떨쳐 낼 수는 없었고.
약 1시간.
생명수의 힘이 다할 때까지 날뛰던 놈이 고꾸라진다.
반쯤 몸이 녹아내렸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아무리 언데드에 극독으로 적용한다지만 놈의 덩치가 워낙 크고 등급도 높다.
자그마치 4성급이니까.
저 정도면.
“10개 정도만 던지면 잡겠는데.”
“그에에.”
나쁘지 않은 가성비다.
나야 직접 잡으면 그만이지만 그게 불가능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지금 던진 것도 따지고 보면 실험작.
숙련도도 부족했으며, 신성력도 더 넣으려면 넣을 수 있다.
개량하고 보다 완벽하게 만든다면 서너 병으로도 충분할 거 같다.
재료도 조금 손보면 좋을 거 같은데.
난 입술을 씹으며 고민했고.
“실험해 보면 되겠지.”
다시 비밀 공간으로 내려갔다.
아직 재료는 많으니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지금부터 잠들기까지는 각 내성 스킬 단련 및 포션 제작이다.
하다 보면 는다고 이제는 좀 감이 잡힌다.
머리에 떠오르는 개량법들.
난 포션 제작에 몰두했고, 마력도 슬슬 부족해질 때쯤 3개의 생명수를 더 만들 수 있었다.
테스트, 테스트를 하자.
이번에는.
“얘한테 해 볼까?”
스윽. 구석에 있는 관을 바라봤다.
말뚝이 박혀 있는 만큼 미세한 틈이 있다.
잘 부으면 안에 들어갈 것 같은데.
데미 데몬이라고 하니 밖에 있는 놈들보다 강할 건 분명하고.
반응도 잘하는 놈이니 피드백도 괜찮게 줄 것 같단 말이지.
흐흐흐. 웃음을 흘리며 관 앞에 쪼그려 앉았고.
“무럭무럭 자라라.”
말뚝을 타고 스며들도록 조금씩 생명수를 부었다.
일단 한 병만.
인내심을 가지며 기다린 지 10분.
-쿵!
-까드드드득!
관이 들썩일 정도로 놈이 날뛰었다.
제대로 만든 것 같은데.
그런 내게 떠오르는 메시지.
[데미 데몬이 당신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신을 찢어 죽일 것을 맹세합니다!]
어우. 살벌해라.
얘는 어째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살인 예고만 하냐.
그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한 병 더 먹어라.”
졸졸졸. 정성껏 생명수 한 병을 더 부었다.
이제는 어떻게 나오려나.
은근히 기대했고.
[데미 데몬이 선택지를 제안합니다!]
[전 서버 최초! 선택지가 변경됩니다.]
[10,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변경된 선택지]
[생명수를 뿌리지 마시오.]
[봉인을 놔두고 탈출하시오.]
새로운 선택지가 생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