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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73화 (173/740)

173화 벨슈타인 백작의 비밀 공간

열쇠를 보물 주머니에 넣고 편지를 살폈다.

핏자국에 글씨가 번졌지만 단어가 완전히 뭉개질 정도는 아니다.

유려한 문체. 화려한 사인.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못 읽겠다.”

“그으에에.”

뭐, 왜. 내가 이쪽 세계 언어를 어떻게 알아.

이 사람들도 한글 모를 거 아니야.

역시 이럴 때는 권능이 답이다.

난 눈에 집중했고.

“오컬트, 이단 심문관?”

곧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써 놨지만 세 줄 요약하자면 이거다.

백작은 오컬트에 심취해 온갖 주술과 마법이 걸린 물품을 사 모았다.

그중에 굉장히 위험하고 사악한 물건도 존재한다.

이단 심문관이 가는 중이니 빠르게 모은 물건들을 처분하라.

“결과를 보니 처분하기도 전에 다 죽은 것 같지만 말이지.”

곳곳에 공격받은 흔적이 남은 성벽이 그걸 증명한다.

벽 너머로 보이는 고성 역시 불에 탄 흔적이 있고.

이단 심문관이라고 적혀 있지만 거의 전쟁에 가까운 전투가 있었던 모양.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물품을 모아 둔 방의 열쇠가 여기 있는데 처분을 무슨 수로 해.

편지가 도달하지도 못했으니 이단 심문관이 오는 것 역시 몰랐을 거다.

“곳곳에 있는 몬스터의 사체, 반면에 시체는 마땅히 없고.”

성 밖에 남은 유골은 마차에 있는 게 전부다.

왜 이 사람들만?

참으로 묘한 조합이다.

정황상 이단 심문관이 쳐들어온 건 확실한데.

시체는 그쪽 사람들이 치웠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난 잠시 생각에 잠겼고.

“순서가 있군. 이 사람은 늦게 도착한 거야,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이단 심문관의 공격. 그들은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떠났고 이후에 몬스터들이 습격한 거다.

이미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편지와 열쇠를 가진 사람이 이곳에 도착. 후에 변을 당한 거고.

그렇게 생각해야 앞뒤가 맞다.

[합당한 추리!]

[42층의 배경을 알아차렸습니다.]

[5,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봐라.

시스템도 내 말이 맞다고 하잖아.

그건 그렇다 치는데.

“한 층의 배경이 되었다는 거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거든.”

단순히 이단 심문관한테 백작가가 사라졌다 정도는 부족하다.

적어도 내가 그동안 겪어 온 곳들은 그랬다.

19층의 지배자와 29층의 지배자가 엮여 있는 곳이자 마을 사람들이 생매장을 당한 15층.

냉동 인간이 되어 멸망을 피하고자 했던 이들의 흔적, 25층.

제4마계의 통합 전쟁의 결과를 보여 줬던 39층.

따로 배경이 없어 보이는 층도 많았지만, 배경이 있는 곳들은 하나같이 뭐가 있었다.

여기도 그럴 거 같은데.

“그 사악한 물건이라는 게 아직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그거 아니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당장 열쇠도 여기 있고.

성이 저 꼴이 난 것도 이단 심문관이 사악한 물건을 찾기 위해 저지른 짓일지 모른다.

뭐든 확인해 보면 될 일.

우선은 하던 것 먼저 끝내고.

아직 성 밖의 필드를 전부 둘러보지 못했다.

또 다른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전부 둘러보자.

* *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성 밖의 필드는 별다른 게 없었다.

영지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숲 안에도 특별한 식물이나 숨겨진 아이템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개구멍이라.”

성벽 북쪽.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을 발견했다.

은밀하게 바위로 가려져 있는 곳.

행운 스텟이 반응하지 않았다면 무심코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수상하지 않은가. 몰래 성 밖을 오가기 위해 만든 것 같으니까.

성벽 정도야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다만 이런 게 있다면 이쪽을 쓰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

갑옷을 입고 있어 부피가 늘었지만 어떻게 밀어 넣으면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궤에에엑.”

덕춘이가 먼저 앞장선다.

덩치가 작으니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혹여나 위험이 있으면 미리 경고해 줄 수도 있고.

[야간 시야 (E) Lv.7]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통로가 꽤 깊다.

성벽이라면 진작에 통과하고도 남았을 거리인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경사도 은근히 있고.

정면을 향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아래로 이어진다.

확실하다.

이 통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맞다.

겉모습과 달리 다듬어진 내부.

조명은 없었으나 공기 순환이 잘 되는지 고인 냄새가 없다.

“게에에엑.”

“뭐 있어?”

앞에 가던 덕춘이가 한쪽을 가리킨다.

손바닥만 한 크리스털. 그 안에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복잡한 수식.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식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마법진일까, 아니면 어떤 집단을 증명하는 문양?

혹시 모른다. 함정일지도.

전에 미궁에서도 소멸 마법진을 겪지 않았던가.

여차하면 안개 질주로 탈출할 준비를 하며 정보를 읽었고.

[뭔가 있어 보이는 크리스털]

-멋집니다!

-그게 다예요.

“벨슈타인 백작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쪽으로는 문외한인 건 맞는 것 같군.”

아무런 의미 없는 문양을 대단히 있어 보이게 박아 뒀으니.

팔랑귀였을 게 분명하다.

사기꾼이 쓱 다가와 이건 고대의 마법진으로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으며 어쩌고저쩌고하면, 그거 좋구나! 하고 샀을 게 분명하다.

오컬트에 심취했다더니 쓸데없는 데서 디테일 하네.

덕분에 하나는 알겠다.

이 통로, 백작이 직접 만든 거다.

그 말은 곧 비밀의 방인지 뭐 신지 그곳이랑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고.

-우우우웅

크리스탈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뀐다.

희미하게 바람이 느껴진다.

향냄새 비슷한 것도 느껴지는 것 같고.

문제는.

“그에에.”

“막다른 길인 것 같지?”

계속 이어질 것 같던 통로가 막혔다는 것.

여기가 어디쯤인지 짐작조차 안 간다.

성의 규모와 구조도 모를 뿐더러 알더라도 구불구불하게 연결되어 있는 통로를 이동하다 보면 방향 감각이 사라지기 마련.

난 통로 바닥을 쓸었다.

미끈하게 가공된 타일.

흙먼지가 좀 쌓이기는 했지만 제법 품질이 좋다.

아까 본 크리스털을 기점으로 좀 더 마감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드문드문 보이는 이끼와 작은 벌레들에 주목했다.

이놈들도 뭔가 먹을 게 있고 환경이 갖춰졌으니까 살아 있는 거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벌레조차 살지 않으니.

어딘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닐 곳이 있는 걸까.

난 유심히 벌레가 움직이는 것을 쫓았고.

-스스슥

미세하게 갈라진 틈으로 벌레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을 뻗어 주변을 두들겼다.

-툭, 툭

-퉁

퉁?

미묘하게 다른 소리.

일정한 간격을 두며 다시 한번.

-툭, 툭, 툭

-퉁

여기다.

-콰직!

망설임 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박살 나 흩어지는 잔해.

오, 손끝이 시원하다.

-쾅! 콰앙!

연달아 벽을 두들겼다.

그러다 파삭!

벽에 구멍이 뚫리더니 그대로 손이 통과된다.

공간이 있다!

“덕춘아.”

“궤엑!”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덕춘이.

영특한 개구리 같으니라고.

바로 내 의지를 읽고 확인에 나선다.

제대로 도착한 걸까? 아니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까.

권능으로 확인하고 싶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SS급으로 오른 만큼 성능은 확실하지만 완전한 답을 내놓는 건 아니라서.

보다 공략이 편해질 뿐이지 일정 부분은 내 힘으로 해내야 한다.

기다린 지 10분 정도 됐을까.

“그에엑.”

덕춘이가 돌아와 손을 내민다.

열쇠를 내놓으라는 거 같은데.

마차에서 얻은 열쇠를 주자 녀석이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쿠르르르릉

“으앗!”

내가 있던 통로 바닥이 열린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추락했겠지만 난 초인.

몸을 웅크리며 균형을 맞추고 안전하게 착지했다.

머리 위로 보이는 통로.

두께 40센티미터가량의 문이 열려 있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공격에도 버틸 수준.

이러니 두들겨도 반응이 없지.

덕춘이가 통과한 곳은 환기를 위해 만들어 둔 통로였다.

[벨슈타인 백작의 비밀 공간에 입장했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른다.

제대로 도착한 모양.

“오, 이게 다 뭐야.”

난 작게 감탄했다.

백작 정도 되면 수집하는 클래스도 다르다 이건지 넓게 펼쳐진 공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 있었다.

기괴한 석상부터 시작해서 오묘한 빛을 내뿜는 크리스털.

악마처럼 보이는 그림이 그려진 양피지와 알 수 없는 수식이 적힌 종이 더미.

기하학적인 무늬가 돋보이는 카펫 위에는 원목 책상이 있었고, 반쯤 녹아 버린 촛대가 위치해 있었다.

굉장히 수상쩍은 동시에.

“약간 중2병 같네.”

“그에?”

덕춘이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런 게 있다, 자식아.

아주 무시무시한 병이지.

내 또래는 겪을 시기도 없었다.

중2병이고 나발이고 진짜 세상이 판타지스럽게 바뀌어 버렸으니까.

판타지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대부분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물건들. 오오! 저건 좀 멋진데?”

벽 쪽에 장식되어 있는 갑옷. 게임에서나 볼 법한 디자인이다.

실용성은 없어 보이지만 라인이 잘 빠진 게 내 펠라인 세트랑 비교하면 100배 낫다.

물론 내 것도 세련되기는 했지만 이놈의 색이 문제라.

“규모가 너무 큰데.”

이 정도면 예전 미궁에서 본 보물 창고보다 크다.

여기는 보물이 없지만.

대신.

[칠색조의 눈알]

-왜 눈알을 보관할까요?

-깃털과 부리가 훨씬 값질 텐데.

-부패 물약의 재료로 쓰입니다.

[크라켄의 이빨]

-강력한 고대 괴수의 이빨

-엄청난 강도를 자랑합니다.

[요정의 날개]

-신비로운 힘은 잃었지만 아름답습니다.

-환각제의 재료로 쓰입니다.

갖가지 기묘하지만 재료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있었다.

그뿐일까.

갖가지 광석과 원석.

말린 약초와 꽃, 부패 방지 약물에 담긴 식물의 뿌리 등등도 있다.

동화 속 마녀가 사용했을 것 같은 물건들.

실제로도 사용이 가능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재료 창고.”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백작 본인은 그저 있어 보여서 산 것 같지만 내게는 아니다.

-버프 포션의 재료

-하급 은신 포션의 재료

-후각 마비 포션의 재료

권능으로 통해 보이는 정보.

한곳에 모인 재료들.

포션 제작 레시피가 보인다.

평소에는 이런 걸 볼 기회가 없다.

이건 행운이다.

안 그래도 포션 제작 스킬 레벨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던 때.

-쿵, 쿵

비밀 공간 구석에서 소음이 들렸다.

길이 2미터가량의 관.

신성력이 느껴진다.

탁한 색깔의 금속관.

신성력을 머금고 있는 말뚝이 관을 뚫고 다섯 개가 박혀 있다.

모서리가 닳아 있는 것이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그르르륵

“안에 뭐가 있어?”

관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

[데미 데몬을 봉인한 관]

-벨슈타인 백작가를 몰락시킨 원흉.

-이단 심문관은 관을 찾아 성을 파괴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데미 데몬이 잠들어 있습니다.

-봉인이 약해졌습니다.

-곧 봉인이 풀릴 것 같습니다.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무시하고 도망치십시오.]

[성물을 재배치해 봉인을 강화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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