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42층
갈대밭이 펼쳐진 평원.
드문드문 나무가 자라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고, 유독 모양이 다른 나무가 하나 보였다.
다른 나무보다도 월등히 크다. 특이점이 있다면 색이 검다는 것.
난 파사스 나무의 위치를 기억해 두고 그쪽으로 움직였다.
가까이 갈수록 정체가 분명해진다.
저것도 파사스 나무기는 한데.
[100번의 낙뢰를 맞은 파사스 나무]
-왜 나한테만 그래!
-나무의 외침이 들리나요?
-모난 돌은 깨지기 마련이고, 큰 나무는 벼락 맞기 마련이죠.
-너무 튀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낙뢰의 힘이 깃들었습니다.
무려 낙뢰를 100번이나 맞았단다.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엄청난 확률이다.
그만큼이나 맞았는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가.
그것보다.
“낙뢰의 힘이 깃들었다라.”
난 권능을 사용했고.
-우우우우웅
두 군데에서 반응이 보였다.
하나는 시커멓다 못해 반들반들해진 나뭇가지.
다른 하나는 뿌리가 있는 땅.
검을 휘둘러 가지를 잘랐다.
“제대로 익었네.”
“그에에.”
단면을 보니 안까지 새까맣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다면.
-치지지직
손에 잡자마자 스파크가 튀어 오른 것.
이래서 낙뢰의 힘이 깃들었다는 뜻이 이건가.
[낙뢰를 머금은 나뭇가지]
-스태프 재료로도 OK!
-무기 손잡이로도 OK!
-훌륭한 제작 재료입니다.
-높은 확률도 아이템에 전격 옵션이 붙습니다.
-전격 계열 스킬을 인챈트 하기 용이합니다.
“나쁘지 않은데?”
아직까지는 등급도 붙어 있지 않은 재료에 불과하나 잘만 만든다면 괜찮은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상점이나 다른 제작자한테 팔아도 좋지만.
[장비 제작 (C) Lv.6]
내게는 이 스킬이 있다.
이번 기회에 레벨을 올려 봐도 좋지 않을까?
좋았어. 나뭇가지는 보물 주머니에 넣어 두고.
[디그 (D) Lv.1]
나무뿌리가 있는 곳을 파냈다.
이쪽에도 반응이 보였으니 뭐가 있긴 하겠지.
말라비틀어진 뿌리가 드러난다.
조금 더 파 보자. 디그를 한 번 더 사용했고.
“그래, 이거지.”
[전격 내성 (E)]
-전격에 내성을 가집니다.
스킬북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익혔다.
내성 스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이것도 공략에 올려야겠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도로 파사스 나무로 돌아와 진액을 챙기고 다시 전진했다.
여전히 평화로운 곳.
“좀 질리네. 그치, 덕춘아.”
“그에에?”
살짝 무료하다.
덕춘이 역시 졸린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투구 위로 올라간다.
보나 마나 왕관 안에 들어가 자려는 거겠지, 속 편한 녀석.
함정이 가득했던 곳을 제외하면 이렇게 몬스터가 없던 곳은 없었다.
안전하면 좋기는 한데 그것도 그거 나름이지, 지금처럼 명확한 클리어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는 답답함이 생긴다.
도대체 뭘 선택하라는 거야.
난 눈살을 찌푸리며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지 살폈고 노력이 통한 걸까.
“찾았다.”
“궤에?”
몬스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덕춘이도 정신을 차리고 어깨에 앉는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몬스터.
그것도 두 종류다.
모두 4성급.
무리마다 다섯 마리.
서서히 긴장하며 다가갈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1번-메탈 버팔로 무리]
[2번-더블혼 무스탕 무리]
[어떤 무리와 싸우시겠습니까?]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움직이던 두 몬스터 무리가 멈춰 섰다.
일제히 자리에 서서 날 노려보는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소름 돋는다.
“무어어어어어!”
“히이이잉!”
놈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명백한 적의를 내뿜는다.
선택 구간이라더니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였나.
재밌네.
“어느 쪽이든 만만한 선택은 아니지.”
메탈 버팔로?
4성급 몬스터로 네 발로 서 있음에도 체고가 2미터가량.
특히나 머리는 전체가 쇳덩이로 되어 있다.
들이박기만 해도 어지간한 건물은 부수고 들어가겠지.
돌진력도 대단하지만 맷집도 굉장하다.
옆에 있는 더블혼 무스탕?
야생마와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로 메탈 버팔로와 같이 4성급에 덩치도 비슷하지만 더욱 날쌔고 지능적이다.
무리를 이루어 몇 마리는 뿔로 들이박고, 몇 놈은 퇴로를 봉쇄하고 버티니까.
보통이라면 한두 마리도 무리 단위로 놈들을 상대하라 한다면 피하는 게 낫다고 말할 거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이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각자의 특기에 따라 상대하기 쉬운 놈을 고르는 게 정답인 것 같다만.
“고민할 필요가 있나?”
몬스터면 다 죽어야지.
선택지 어디에도 한 무리만 상대하라는 조건은 없었다.
4성급 무리 정도는 이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백해무익한 놈들, 싹을 잘라야 한다.
[절삭 (A) Lv.1]
-촤아아아악
검을 낮게 휘둘렀다.
단번에 일대의 갈대가 쓰러져 시야가 트인다.
이걸로 무대는 완성.
“뭘 꼬나 봐. 바로 덤비지 않고.”
[오로라 빔 (A) Lv.6]
[오로라 빔 (A) Lv.6]
공평하게 한 방씩 쏴 주었다.
노리는 곳은 다리.
-콰아아아앙!
빛이 뿜어지며 가장 앞서 있던 객체의 다리가 그대로 날아간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녀석들.
이어.
“무오오오오!”
“무으으으아!”
“히이이잉!”
놈들이 일제히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종류가 다른 몬스터가 합심해서 덤비는 경우는 잘 없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격을 받은 것도 있고, 시스템적인 작용이 적용되어 내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몸풀기로는 제격이겠지.
“무어어억!”
가장 먼저 덤빈 건 버팔로.
장거리라면 몰라도 단거리를 돌파하는 건 이놈이 더 빠르다.
흡사 덤프트럭이 덤벼드는 것과 같은 박력이 느껴졌지만.
“한번 타 보고 싶었는데.”
내게는 그리 빠르지 않았고, 뿔을 내밀고 달려드는 녀석을 붙잡았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뿔을 중심으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놈의 등에 올라탔다.
거칠게 몸을 흔들어 댔지만, 허벅지로 목을 꽉 조이자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이거 은근 재밌다!”
“게헤헤헥!”
카우보이가 된 것 같다.
아, 카우보이는 소가 아니라 말을 타나?
하여튼 간에.
“후─ 아!”
난 소리를 지르며 경치를 구경했다.
전투 중에 할 짓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걸.
그렇다고 마냥 놀 수는 없다.
나를 기다리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있었으니.
-푸욱!
-뚜둑!
검을 역수로 잡고 놈의 척추를 끊었다.
크게 한 번 떨더니 주저앉는 녀석.
몬스터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생물이다.
머리가 사라지면 죽고, 척추가 끊기면 마비가 온다.
물론 아닌 놈들도 있지만 이놈은 그러했고.
[중량 팔찌 (C)]
-빠직!
무게를 한껏 늘려 놈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쇳덩이로 된 머리가 우그러지며 핏물이 쏟아진다.
피 냄새를 맡고 더욱 흥분한 녀석들.
너, 나 할 거 없이 각자의 뿔을 들이밀며 덤벼든다.
“읏차.”
정면으로 오는 뿔을 몸을 돌려 피하고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알리오스의 계승자가 되며 향상된 검술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히아아악!”
앞다리가 잘린 더블혼 무스탕이 비명과 함께 자빠진다.
이게 참 신기해.
다리가 두 개든 네 개든 하나만 잘라 놓으면 제대로 못 움직인단 말이야.
특히나 이렇게 무게가 많이 나가는 놈들은 더 심하고.
빙글 검을 돌리며, 옆구리를 들이박으려는 버팔로의 뿔을 막았다.
-카아앙!
불똥이 튄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 무오오?”
수백 킬로그램이 넘는 녀석이 뒤로 물러났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
하지만 난 이미 중량 팔찌를 통해 무게를 한껏 늘린 상황.
체급은 깡패라는 말이 있다.
사이즈도 중요하지만 체급을 나누는 기준은 무게.
지금만큼은 놈보다 내 체급이 높다.
단순히 무게만 그런가 하면.
“무어어억!”
-콰가가가강!
힘 역시 마찬가지다.
뿔을 붙잡고 크게 몸을 틀어 넘겼다.
땅이 파이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놈의 등뼈가 아작 나는 소리가 들린다.
4성급. 굉장한 몬스터가 맞다.
한 마리만 도심에 풀어놔도 일대가 마비되며 수많은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그런데…….
“그런 놈들 잡는 게 헌터라서 말이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수호자의 의지 (AA)]
나를 기준으로 생성시킨 보호의 장막.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적들에게 탈출할 수 없는 감옥이 되기도 했다.
“고기 굽는 냄새 나겠네.”
[파이어 밤 (AA) Lv.1]
망설임 없이 사방에 폭발을 일으켰다.
불길이 장막 안을 가득 덮을 때까지.
땅이 시커멓게 죽고 연기가 휘몰아치도록.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달려가는 녀석들. 그래 봤자 탈출구는 없다.
[파이어 밤 (AA) Lv.1]
[스킬 레벨 업!]
[파이어 밤 (AA) Lv.2]
[화기 내성(C) Lv.8]
[스킬 레벨 업!]
[화기 내성 (C) Lv.9]
스킬 올라가는 소리가 달콤하다.
이게 참 좋아.
폭발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따로 뭘 하지 않아도 화기 내성 스킬이 오른다.
팽창된 열기와 폭발의 여파로 보호막이 위태롭게 부푼다.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것도 같고.
성물을 해제했다. 이미 살아남은 몬스터는 없다.
-푸화아아악!
압축됐던 공기가 일시에 터져 나온다.
하늘로 솟구치는 연기.
그 안에서 반짝이는 포탈.
[선택지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제3의 선택을 마쳤습니다.]
[41층 클리어!]
[42층으로 전송됩니다.]
무형의 에너지가 포탈에서 쏟아지더니 나를 감싼다.
클리어하기 쉽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40층대는 어떤 식으로든 선택으로 판단되면 위로 올라가는군.”
다른 곳은 포탈이 생성된 후 이동하는 건 본인의 마음이었는데.
아쉬워라. 필드 전체를 뒤지고 싶었건만.
나를 휘감은 광채.
밝은 빛이 절정을 이르렀을 때 시야가 바뀌었다.
* * *
[42층]
[클리어 조건- 선택 (0/1)]
여전히 단출한 설명.
선택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41층처럼 일단은 돌아다녀야 하나.
이번 무대는.
“성이네.”
어디 루마니아에나 가야 볼 법한 오래된 고성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성의 입구.
군데군데 부서진 성벽과 물이 말라 버린 해자.
곳곳에 몬스터의 뼈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슬쩍 봐 보니 성벽의 규모가 제법 크다.
벽 너머로 보이는 건 성뿐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다른 건물도 있겠지.
성이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운데.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문은 닫혀 있다.
진입하려면 성문을 부수거나 벽을 넘어야 한다.
높이가 대략 4미터 정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바로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선택지가 뜨기 전에 최대한 많이 필드를 돌아다닐 생각.
“필드가 엄청 크지는 않구나.”
“그에에에.”
42층의 메인은 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요새 전체라고 해야겠지.
그 외 내가 있는 외곽 지역은 그리 넓지 않았다.
푸르게 휩싸인 장막이 필드의 끝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못 가게 막아 둔 게 아니다.
[42층의 끝]
-시스템적으로 넘어설 수 없습니다.
대놓고 끝이라 적혀 있다.
시스템적으로 뚫을 수 없다고도 되어 있고.
저쪽은 무시하고 다른 곳을 살펴보자.
억센 풀이 자라난 평원. 농경지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공간은 황폐해져 잡초조차 자라지 않았다.
돌로 포장된 도로가 숲과 성 입구를 연결하고 있었는데, 관리되지 않아 곳곳이 파손되었으며 길 구석에는 망가진 마차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상인들이 사용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사람이 타는 용도?
호기심이 동해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혹시 아는가 뭔가 특별한 게 숨겨져 있을지.
“시체 썩는 냄새는 안 나서 다행이네.”
“그에에에.”
탑을 오를 때도, 오르기 전에도 시체는 여러 번 봤지만 굳이 보고 싶지는 않다.
뭐 그리 좋은 거라고. 특히 부패가 일어난 시체의 냄새는 언제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부석에는 가슴팍에 창이 꽂힌 해골 하나가 있다.
완전히 풍화됐을 정도면 시간이 굉장히 오래됐다는 건데.
어디에 걸린 건지 공격받아 부서진 건지 마차 바퀴가 망가져 있다.
덕분에 마차가 기울어 들어가기는 쉬워졌지만.
“실례합니다.”
-콰직!
마차 문을 잡아당기자 별다른 저항도 없이 뜯겨 나간다.
먼지와 곰팡냄새가 코를 찌른다.
눈을 찌푸리며 안을 살피는데.
“상자?”
해골 하나가 상자를 끌어안은 채 박혀 있다.
색이 바래기는 했으나 옷이 꽤 화려하다.
높은 신분인 건가, 부자?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상자에 눈길이 간다.
자세히 보니 외투 안주머니에 노랗게 바랜 편지도 하나 있는 것이 뭔가를 전해 주려던 것 같은데.
죽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좀 봐야겠다.
-뚝
“엇, 부러졌네. 죄송합니다.”
상자와 편지를 꺼내다 팔뼈를 부러트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잠시 잊어두고 난 상자의 내용물을 살폈다.
열쇠 하나.
[벨슈타인 백작가의 비밀 공간 열쇠]
-피엔느 왕국의 백작, 바이네 벨슈타인.
-그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특별한 힘이 필요하다 느낍니다.
-세상의 진실을 파헤치고 현자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던 그는 위험한 물건을 입수합니다.
냄새가 난다.
뭔가가 숨겨져 있다.
난 곧장 편지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