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41층
성장한 권능. 그를 통해 읽어 낼 수 있는 정보가 더욱 늘어났고, 그 대상에 칭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39층, 메글릿을 잡으며 얻은 칭호.
[역사를 새롭게 쓴 등반자]
-등반자 신분으로 탑에 기록된 역사를 고쳤습니다.
-예상치 못한 혼돈에 탑이 반응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혼돈이 부여됩니다. (현재 수치: 15)
여기까지는 이전과 설명이 같았지만 그 밑에 세부 정보가 드러났다.
[세부 정보]
-39층이 재설정되었습니다. 메글릿은 패배했으며, 게일은 제4마계 원형에 가까운 악마가 되었습니다.
-혼돈 수치 10점을 부여받습니다.
-스스로의 업적으로 혼돈을 얻었습니다!
-외부 요인으로 획득한 혼돈 수치가 정산됩니다.
-99층까지 오른 알리오스 페르노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보유했던 혼돈의 일부를 받습니다.
-혼돈 수치 5점을 부여받습니다. (권능의 싱크로율이 오를수록 점수가 증가합니다.)
-100층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어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이 중요했다.
100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혼돈 수치가 필요하다는 것.
만약 혼돈 수치가 낮다면?
“능력과는 상관없이 100층을 클리어할 수 없어.”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99층까지 올랐다 좌절한 이들 역시 한두 명이 아니겠지.
어째서 릴카가 내가 혼돈 수치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놀랐는지 알 것 같다.
혼돈 수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100층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했다는 것이니까.
단순히 계승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거였으면 24층에서 알리오스의 계승자가 된 시점에서 얻었을 테니.
릴카가 놀랄 일도 없었을 거다.
계승자가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알리오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10층 안전지대, 금천황후 역시 계승자를 구한 것 같다고.
설명에도 나와 있다시피 혼돈 수치는 직접 뭔가를 해야만 했다.
난 하나의 층 자체를 바꿔 버렸고.
이제 막 40층을 오른 사람 중 하나의 계층을 바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없지 않을까?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 같은데.
“잠깐만, 그럼 혼돈 수치를 얻으려면 앞으로도 층을 바꿔야 한다는 건가?”
하나의 층의 역사를 새로 써 얻은 점수가 10점.
단순 계산해도 9번은 더 해야 한다는 건데.
아니면 다른 NPC의 계승자가 되어 추가 점수를 얻든지.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고.
“릴카!”
“궤에에엑!”
난 릴카를 찾았다.
나 혼자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 * *
대장간으로 들어가자 화로를 살피는 릴카가 보인다.
여전히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녀석.
살짝 뒷골이 당겼지만 참아 냈다.
“저번에 말한 거 있지, 혼돈 수치.”
“악! 그거 함부로 말하지 말라니까!”
“우리밖에 없잖아. 설마 착하고 멋지고 귀엽고 사랑스러울뿐만 아니라 세계 제일의 장인인 동시에 상인인 네가 말하고 다닐 것도 아니고.”
“크, 크흠! 그럼!”
얼씨구 좋단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에 앉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릴카한테라면 말할 수 있다.
친화도도 높았고, 나 아니면 퀘스트를 깨 줄 사람도 없으니.
날 엿 먹이려면 옛날 옛적에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자.
“이거 어떻게 얻어? 난 이번에 39층을 바꾸면서 얻었거든? 게일이랑 힘 합쳐서 메글릿을 잡았어.”
“뭐, 뭣. 켁! 켈록!”
사례가 걸렸는지 기침을 내뱉는 릴카의 등을 두들겨 줬다.
괜찮다며 손을 드는 녀석.
“으으. 갑자기 고객 명단이 바뀌었다 했더니 네가 한 거였어? 하긴 그 정도는 돼야 30층대에서 혼돈을 얻지.”
“혼돈 수치 100점을 모아야 100층에 도전할 수 있잖아. 앞으로도 이런 걸 계속해야 하는 거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나중에 알게 될 거긴 하지만… 흐응.”
짧은 다리를 용케 꼰 릴카가 미간을 찌푸린다.
“정보비.”
“뭘 원해?”
“어차피 알게 될 정보니까 B급 아이템 2개.”
“콜.”
아낌없이 줬다.
난 무한 코인을 가지고 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100층을 깨야 한다는 것.
혼돈 수치는 중요하다.
충분히 모으지 못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될 테니.
등반자인데 NPC나 다를 바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보통 등반가가 혼돈 수치를 얻는 건 60층대부터얌. 끝! 더는 못 말해 줘. 다른 질문도 놉! 정보 거래를 요즘 너무 많이 했어. 한동안은 안 돼.”
릴카도 말할 수 있는 정보에 제한이 있는 것 같다.
모든 NPC가 제약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나마 릴카니까 이 정도다.
60층. 60층이라는 거지.
난 속으로 되씹었고.
“고맙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
“올라가야지.”
“우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심심하다고오오오. 놀아 달란 말이야아아!”
발라당 자빠져서 생떼를 쓰는 녀석.
얘를 어떻게 하지. 딱밤도 하도 때려서 하기 무섭다.
내가 자꾸 때려서 저렇게 된 건가 싶어서.
바둥거리는 녀석을 잡아 올렸다.
가벼워서 그런지 한 손으로 들린다. 내가 힘이 세진 것도 있겠지만.
파닥거리며 얼굴을 때리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정보도 줬으니 내가 참아야지.
아니, 그보다.
“너도 작업한다며. 지금도 하던 거 아니야?”
“아. 맞다. 헤헤. 이것도 의뢰받은 지 8년 지난 건데.”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길래 8년이나 묵혔냐.
그동안 퀘스트를 클리어해 재료를 가져온 게 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빨리 안 가? 작업하는 데 방해된다구!”
바로 태도를 바꾸는 녀석.
허리에 손을 얹고 언짢게 쳐다보는 게 가관이다.
와, 진짜 얘는…….
더 나사가 빠질까 봐 꿀밤은 못 때리겠고.
“아아! 으아아.”
쭈욱, 볼을 잡아당겼다.
잘 늘어나네, 찹쌀떡인가.
묘하게 촉감이 좋은데 습관 될 것 같다.
얘가 이래서 덕춘이를 주물럭거리는 건가.
장난은 이쯤 하자, 나도 갈 길이 머니.
“간다. 작업 열심히 해.”
“다음 퀘스트도 50층에서 확인하는 걸로?”
“중간에 만날 수는 없잖아.”
“흐음, 글쎄. 아무튼 잘 가! 난마저 할게. 잠깐만, 에헤헤. 덕춘이.”
“궤, 궤엑?”
묘한 소리를 낸 녀석이 미련 가득한 손길로 덕춘이를 조몰락거린다.
충분히 즐겼다 이건가, 덕춘이를 돌려준 릴카가 손을 흔들었고.
“작업하는 동안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심심하면 죽어서 놀러 와!”
“응, 절대 안 그래.”
난 미련 없이 거실로 나와 준비를 했다.
짐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따로 할 일이 있다.
먼저 공략.
[쁘띠공듀]: ##$%♡ 40층에 권능 등급을 올려 주는 곳이 있다? #[email protected]☆
여러분, 여러분 대☆박!
그거 아시나요? 40층 동쪽에 있는 이면의 성소에 가면 권능 등급을 올릴 수 있다는 사. 실!
모른다구요? 멍청이라서 그래요! 낙담하지 말아용. 가끔은 스스로 관대해질 필요가 있답니닷!
흠흠! 아무튼. 잔잔한 연못이 멋진 그곳! 물에 비친 본인의 얼굴을 보며 나르시시즘을 느끼고 있으면 공동으로 이동을 해요. 거기서…….
이면의 성소에 대한 정보를 커뮤니티에 올렸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쁘띠공듀]: 참, 핥짝찡. 39층 공략을 부탁해욧!
[정수리 핥짝]: ㅇㅇ? 내가 왜?
[쁘띠공듀]: 저눈… 고런고 몰라여. 핥짝이가 잘할 것 같단 말이에요☆
[정수리 핥짝]: 우… 우욱! 그, 그래. 알았어.
39층 공략을 핥짝이에게 부탁했다.
40층에 올라온 만큼 30층대를 다시 내려가는 건 불가능.
바뀌어 버린 층인 만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쓸모가 없다.
다른 누군가가 해 줘야 한다는 것.
핥짝이의 반응 덕에 마음이 미어졌지만 스스로 칭찬하며 극복했다.
그래. 내가 한 말처럼 가끔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해질 줄 알아야지.
난 훌륭하게 탑을 오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착한 사람이다!
오케이. 자존감 상승 완료!
눈가가 좀 촉촉해진 것 같지만 착각이다.
미간을 집은 난 덕춘이를 어깨 위에 올렸다.
“이걸로 할 건 끝났고.”
이제 위로 올라가자.
40층대. 거긴 어떤 곳인지 좀 봐 봐야겠다.
릴카의 별장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혹시나 가는 길에 팀원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봤지만 보이지 않았고.
-우우우웅
안전지대 북쪽. 포탈에 도착했다.
확연히 줄어든 사람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포탈을 지나는 이들을 잠시 바라봤고.
[41층으로 이동합니다.]
난 포탈에 몸을 맡겼다.
* * *
세상이 일그러지며 시야가 바뀌었다.
[41층]
[41-49층은 선택 구간입니다.]
[당신이 어떤 유형인지 판단합니다.]
[부디 후회 없는 선택 하길 바랍니다.]
“선택 구간이라.”
말만 들어서는 가늠이 안 잡힌다.
그동안 겪었던 다른 층계와도 성질이 다르다.
튜토리얼 구간, 성장 구간, 열기 지대와 냉기 지대.
최근에 겪었던 건 팀플레이 구간.
모두 탑을 오르는 데 필요한 소양을 기른다는 목적이 있었다.
선택이라.
“따지고 보면 계속해서 선택의 연속 아니었나?”
어떤 식으로 공략을 할지, 누구와 힘을 합치고 어떤 전략으로 도전할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랑은 좀 다른 건가?
모르겠다.
애초에 탑이라는 게 이해하기 힘든 곳이라.
먼저 주변 지리부터 확인하자.
“딱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갈대가 가득한 평원.
허리까지 자란 풀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었지만 날카로운 감각은 주변에 적이 없다고 알렸다.
내가 자만하는 걸 수도 있다.
오로지 내 경험과 육감,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만으로 내린 결론이니까.
40층까지 올 정도면 몬스터와 함정, 기습과 매복 정도는 충분히 겪었으니 스스로 믿을 만도 했지만.
“확실한 게 좋더라.”
“그에에에.”
난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해서 말이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감각이라는 게 정답만을 보여 주는 건 아니니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시야가 넓어진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세세하게 포착된다.
사각지대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보이는 것처럼 약간의 자극도 예민하게 느껴졌으며 어디에도 위험 신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몬스터가 없는 것 같고.
난 검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갔다.
따로 시스템이 지시를 내려 주지 않으니 움직여 보는 수밖에.
“하!”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가 없길래 좀 안전한가 했더니.
-사각
-끼이이익
고작 몇 걸음 움직였을 뿐인데 이곳의 위협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결코 갑옷에 풀이 스쳐서 날 리가 없는 소음.
그도 그럴 것이.
[실톱 갈대]
-1미터 정도로 자라는 갈대
-작지만 날카롭죠!
-이파리에 피부가 뜯기지 않게 조심하세요.
환경 자체가 이미 위협적이다.
쯧. 40층대부터는 이런 식물 하나까지도 범상치 않네.
플레타가 만들었던 무대에도 이런 것들이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머리를 긁적였다.
탑의 부름을 받자마자 이런 곳에 떨어졌다면 어디 움직이지도 못하고 갇혔겠는데.
지금이야 딱히 상관없지만.
펠라인 세트의 옵션에는 감각 공유가 있다.
갑옷을 입어도 맨몸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
아프냐?
전혀.
“까슬까슬하구먼.”
손끝으로 이파리를 비벼 보니 미세한 가시가 톱날처럼 박혀 있다.
내게는 칫솔 정도의 느낌이지만.
갈대 하나를 꺾어 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를 멀리 던지자 처음 보는 식물이 많다.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
“이참에 탑의 식물들도 좀 알아봐야겠군.”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쓸 수도 있으니까.
저 멀리 솟은 나무도 그렇다.
[파사스 나무]
-텁텁한 냄새의 진액을 가진 나무.
-진액을 바르면 코볼트를 비롯한 냄새로 적을 쫓는 몬스터를 속이기 유용합니다.
-방수 효과도 있으니 필요하다면 진액을 발라 보세요!
-피부에 바르면 보습이 될지도?
반가운 나무.
튜토리얼 구간 2층. 코볼트를 상대했을 때 처음 봤던 거다.
여기서도 있었구나.
그때도 이게 있어서 놈을 잡을 수 있었는데.
탑에서 정보는 힘이고 생존이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단검을 하나 꺼내 나무 기둥에 생채기를 냈다.
조금씩 흘러내리는 진액.
포션 제작 때 쓰려고 모아 둔 공병을 밑에 받쳤다.
모으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다른 곳도 좀 살펴봐야지.
자잘한 채집도 있지만…….
“경험상 각 층이 시작되는 곳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었거든.”
스타터 킷, 화기 내성과 독 내성, 냉기 내성과 저주 내성까지.
전부 각 층의 진입부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파사스 나무를 기준 삼아 필드를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오.”
난 유독 이질적인 나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