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네 번째 파츠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공동에 섰다.
시스템적으로 정리를 했는지 방금 내가 터트렸던 것들이 원상 복구 되어 있다.
디그로 파낸 구덩이 역시 마찬가지.
혹여나 내가 또 안으로 도망칠까 미리 막아 둔 거겠지.
상관없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예정이니까.
“그때도 느꼈지만 네놈은 참 얄밉단 말이지. 짜증 나서 더 줘 패고 싶은 느낌?”
“남 말 하네.”
메글릿의 말에 피식 웃었다.
구타 유발은 녀석이 최고지.
노역장에 있던 이들 중 메글릿을 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악마들은 여러 원한이 쌓여 동귀어진까지 감내했는데.
“지금까지야 약삭빠르게 피해 냈다만 이번에는 어쩔 심산이지?”
“미리 말해 줘야 하나? 원하는 게 많군.”
“큭큭! 그래. 그런 건방짐, 마음에 들어. 내가 미리 말해 주지. 이번에는 정확히 네 머리를 맞춰 주마.”
“응. 두 번 해도 못 했어.”
빠직. 놈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거, 사람 약 올릴 줄 모르네. 악마라는 놈이 말이야.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애라 그런가?
뭐, 말장난은 여기까지.
[공격까지 남은 시간 - 01:11]
약 1분 후. 놈의 공격이 시작된다.
신중하게 나를 살피는 녀석.
진심으로 상대할 게 뻔했다. 나를 없애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힘이 시스템적 제약으로 봉인되어 있다고 하나 놈은 강하다.
맨 처음 메글릿의 공격을 안개 질주로 피했을 때, 사실 난 눈으로 보고 피하려 했다.
자그마치 힘의 80퍼센트가 봉인되었으니 비벼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알리오스가 스스로 제약을 가해 힘의 98퍼센트를 봉인하고 싸웠을 때.
그때는 생각해 보면 얼추 비슷하게 싸웠었지.
당시에는 24층을 오르던 중이었다. 난 지금 40층까지 올랐으며, 계승자가 됐을 뿐만 아니라 스킬, 스텟, 칭호, 장비 모든 면에서 성장한 상황.
아무리 90층을 넘어선 괴물이 메글릿이라지만 본신의 20퍼센트면 대등하지는 않더라도 몇 합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빨랐지.’
피하는 건 어려웠다.
막으라고 하면 막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테스트 클리어 조건은 회피였으니까.
즉, 눈으로 좇을 수는 있되 몸을 움직여 피할 정도는 아니다.
안개 질주 역시 그래서 사용했던 것이고, 방금 전 구덩이를 사용한 것도 사실상 놈이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 미리 피하자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 꼼수를 쓸 만한 게 떠오르지 않으니 방법을 바꾸자.
[공격까지 남은 시간 – 00:24]
난 다시금 펠라인 세트 효과를 읽었다.
[펠라인 세트 효과! (4/7)]
-올 스텟 +40
-패시브 스킬, 쾌적 (D) 적용
-자가 수복 기능 활성화
-완전 파괴 불가
-펠라인 세트의 방어력이 통합됩니다.
-각 파츠별 속성이 개화됩니다.
-감각공유 (C) 적용 (펠라인 세트에 한정됩니다.)
-각 파츠별 속성의 저항력이 올라갑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히 바뀐 게 없다.
올 스텟 증가량이 40까지 오르고 파츠별 속성 저항력이 올라가는 정도.
따지고 보면 이것도 대단한 효과였지만 뭐랄까. 예상 가능한 범위여서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정말 나를 놀라게 했던 건 이후에 적힌 설명.
-세트 아이템에 봉인된 스킬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거.
세트 아이템에는 봉인된 스킬이 존재했다.
아직까지는 세트 아이템이 4개뿐이라 사용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지만.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지.
스킬 이름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지만 설명만 보자면 효과는 확실하다.
[메글릿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후.
작게 숨을 내쉰 타이밍.
“네놈의 머리를 꽂아 기념품으로 가져가겠다.”
견고하게 자세를 잡은 메글릿이 뚫어져라 나를 응시한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악마에게 할 말이 맞나 싶지만 일순 경건해 보이기도 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놈이 창을 들었고.
-쒸이이익!
뭔가가 움직였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이미 코앞까지 창이 도달해 있었다.
놈의 입가가 올라간다.
절대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게 맞다.
마지막 테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은 두 개.
메글릿의 공격을 세 번 피하거나.
한 번이라도 놈에게 타격을 입히거나.
난 펠라인 세트에 깃든 스킬을 사용했다.
이름하여.
[무지개 반사 (S)]
-상대방의 공격을 되돌려 줍니다.
-S급 이하의 스킬은 98퍼센트
-SS급 스킬은 35퍼센트
-SSS급 스킬의 경우 3퍼센트의 확률로 반사합니다.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크게 스킬 이름을 외치면 반사할 확률이 올라갈지도?
그렇다.
정신 나간 스킬.
무려 S급에 달하는 등급!
이름은 부끄럽지만 효과는 확실!
“무지개 반사!”
“무, 뭐?”
난 크게 소리쳤고.
-팅!
내게 닿으려는 창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수치스럽다.
이렇게 만든 저놈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난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홀리 크랩 (AAA)]
[프로즌 브레이크 (AA) Lv.1]
[심연의 눈동자 (A) Lv.1]
[집착하는 망령 (A) Lv.1]
동시에 쏘아져 나가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속박기.
성스러운 집게발이 놈을 움켜잡고 얼음이 돋아나 놈을 감싼다.
동시에 심연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으며, 영체가 사지를 붙잡았으니.
“큽! 이따위 것쯤은……!”
본래의 힘에 20퍼센트밖에 쓰지 못하는 메글릿이 한순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찰나의 순간.
-콰직!
내게 날아왔던 힘 그대로 반사된 창날이 놈의 어깨를 꿰뚫었다.
메글릿이 뒤늦게 속박기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늦었다.
어깨 뒤로 빠져나온 창날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축 처진 팔이 흔들렸고 그의 눈동자는 더욱 세차게 흔들렸다.
“이, 이 내가 저깟 놈에게 당했다고?”
고통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비명은 없었다. 그저 얼빠진 소리를 낼뿐.
그만큼 충격이라는 거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노예로 부렸던, 이제 고작 40층에 오른 이에게 당했으니.
[마지막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내가, 무, 무…….”
허망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
뭔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문장을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그 마음 이해한다.
내가 무지개 반사에 당하다니! 같은 말을 어떻게 하냐.
나 같아도 못하겠다.
-스스스스
테스트 종료와 함께 놈의 몸이 사라진다.
텅 빈 공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한 공간에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SS등급으로 승격합니다!]
[권능, 스킬 합성이 SS등급으로 승격합니다!]
[당신의 등반에 축복이 깃들기를!]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감싼다.
시원하면서도 편안한 느낌.
저절로 눈이 감긴다.
묵직한 바람이 한번 몰아치고 이내 눈을 떴을 때는.
“아.”
난 이면의 성소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
연못은 거울처럼 빛났으며, 돌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이들과 간식을 파는 상인이 호객 행위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끝났다.
정말로 권능의 등급이 올랐다.
“와아아아아아!”
“궤에에에에!”
주먹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덕춘이도 마찬가지.
계승자가 되어 얻은 권능까지 합쳐서 난.
3개의 SS급 권능을 보유하게 됐다.
* * *
이면의 성소에서 볼일을 훌륭히 마치고 릴카의 집으로 돌아왔다.
릴카의 초대가 있어서인지 여관이랑 비슷한 효과가 있다.
나중에 죽어도 이곳에서 부활하는 것.
뭐, 그것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편하게 있기에는 여기만 한 곳이 없어서.
“오. 잘 끝났나 보네?”
“당연하지.”
오늘치 작업을 끝냈는지 릴카가 대장간에서 나온다.
위아래로 날 살피는 녀석.
“풉! 이제 다리도 주황색이야? 빨주노파. 좀 있으면 무지개 찍겠네! 으하햐햑학햣!”
릴카가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군다.
아, 선 넘네.
난 싱긋 웃으며 릴카를 불렀다.
“우리 릴카, 밤 좋아해?”
“으캭학. 응? 갑자기 밤? 군밤은 좋아하는뎅.”
“대신 딱밤을 드리겠습니다!”
-따악!
“아악! 왜 때려!”
“몰라서 묻냐!”
악을 쓰며 발발 뛰는 녀석.
조용히 해라. 안 그래도 방금 무지개 반사로 한 놈 해치우고 오는 길이니까.
심란하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봤을 때 앞으로 활성화될 스킬 전부 무지개니 뭐니 할게 붙을 게 뻔했다.
환불하고 싶은데 성능이 너무 좋아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지금까지는 커뮤니티에서만 콘셉트질을 했는데 이제는 현실에서도 콘셉트 종자가 되어 가고 있다.
내 인권과 존엄성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슬쩍 갑옷을 바라봤다.
색이랑 별개로 생긴 건 세련됐다.
그래서 더 빡쳐.
“이제 또 올라갈 거야?”
딱밤을 때린 곳에 덕춘이를 올린 릴카가 물었다.
왜 저러는 걸까.
덕춘이가 시원해서 냉찜질하는 건가.
잡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신을 차렸다.
“안전지대 좀 돌아보고 얻을 거 있음 챙겨가야지. 혹시 알아, 상점에 숨겨진 옵션 달린 물건이 있을지?”
“여기 없을걸?”
단호하게 답한다.
“40층대 아이템 상점은 화조국에서 물건을 공급받거든. 걔네는 도매라 특수 옵션 붙은 거 잘 안 팔아. 그건 따로 거래해.”
“그러냐.”
그건 몰랐네.
냥펀 이 녀석은 잘하고 있으려나.
화조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이곳에 올라와서도 바쁠 것 같다.
근황도 궁금하니 커뮤니티 좀 해 볼까.
이면의 성소 정보도 올려야 한다.
[쁘띠공듀]: 하잉, 하잉! 여러분 모두 무사히 등반하고 있나요?
여느 때와 같은 스타트.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못 볼 거 봤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
“뭐. 안 가? 확, 씨.”
“어. 으응. 열심히 해. 먹고 살기 힘들지?”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려 준 릴카가 대장간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빼꼼. 문 너머로 고개를 내민 녀석이 측은한 눈길을 보내더니 엄지를 세우고 문을 닫았다.
[정신 보호 (B) Lv.1]
[스킬 레벨 업!]
[정신 보호 (B) Lv.2]
스킬 레벨이 올랐지만 전혀 기쁘지 않다.
후우.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내 글을 읽었는지 멤버들이 반응을 했다.
[니머리 탈모]: 오오! 공듀! 역시 날 걱정하고 있었구나!
[냥냥펀치]: …? ‘여러분’ 안 보이냥?
[정수리 핥짝]: 공듀… 공듀! 으아아아!
[니머리 탈모]: 얜 아직도 화나 있네;; 길 가다 똥이라도 밟았나.
[냥냥펀치]: 미리 말하지만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정수리 핥짝]: 후… 진정했다. 나 39층 공략 중. 여기 은근 빡세네. 게일? 이 NPC 친절한 거 같으면서 묘하게 사람 잘 굴린다.
[쁘띠공듀]: 게일이요?
[정수리 핥짝]: ㅇㅇ 있잖아. 39층 담당 NPC.
“게일이 담당 NPC라고?”
분명 메글릿이 노역소장이었는데.
[쁘띠공듀]: 메글릿은요? 그 녀석이 노역소장 아니었나욧?
[정수리 핥짝]: 엥? 노역소가 뭔데. 여기 그런 거 없어. 메글릿은 쩌리 NPC고 맨날 두들겨 맞던데. 지금은 약간 넋이 나간 것 같고.
층이 바뀌었다.
소멸했던 층이 재생성되었으며, 담당 NPC가 게일로 교체됐다.
노역소가 사라졌다는 건 그 층을 이루는 배경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
[쁘띠공듀]: HOXY 게일이란 NPC 하얀 뿔에 파란 피부, 빨간 머리카락인가요?
[정수리 핥짝]: 잘 아내. 너 이쉨, 알면서 기만질을!
핥짝이가 날뛰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등 뒤가 서늘해졌을 뿐.
그러고 보니 이면의 성소에서 메글릿의 처우를 정하고 있다고 했었나.
불현듯 새롭게 얻은 칭호가 떠올랐다.
[역사를 새롭게 쓴 등반자]
-등반자 신분으로 탑에 기록된 역사를 고쳤습니다.
-예상치 못한 혼돈에 탑이 반응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혼돈이 부여됩니다. (현재 수치: 15)
-츠즈즈즈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빛납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권능이 발휘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설명이 드러났고.
난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