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마지막 테스트
환상이 이어졌다.
어쩌면 백일몽일지도 모르겠다.
사고가 가속되며 당시에 있었던 일들과 감정이 느껴졌으며, 저절로 몸이 반응하며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탑에 처음 들어온 날.
짐꾼 노릇을 하다 망할 양아치 놈들에게 걸려 동귀어진을 했었던 날이다.
탑 1층. 지금은 우습지만 당시에는 고블린에 목숨을 잃었다.
“저 때도 살벌했지.”
3층에서 겪었던 트랩 구간 때의 기억이 비쳤을 때는 목이 말라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안다. 정말 튜토리얼이라는 걸.
친절하게도 일자로 뻗은 공간에 대놓고 보이는 함정들이 있었으니.
이후에 겪었던 함정들은 권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알아차리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악의를 가지고 만든 거나 다를 바 없던 것들.
그러다 오크 대부족장을 만났으며.
진정한 힘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던 9층의 보스를 겪었다.
오지혁과 처음 만났을 때.
이어서 쉽지 않았던 공략과 위기에 처했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투쟁의 연속이었지만 중간중간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도 있었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명확해지며 다시금 머리가 정리된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었고, 특히나 강렬한 일을 여러 번 반복적으로 겪다 보니 감정도 위기감도 무뎌졌으며, 몬스터에 이어 사람을 상대할 때조차 비슷한 잣대를 내밀었다.
고작 40층.
탑에 불려오기 전에도 악바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지금은 더 하다.
헌터계에 완전히 발을 들였다는 것이 실감 날 정도.
약간의 미련과 답답하지만 수긍하는 것들.
히든 피스를 찾아내고 던전과 유적을 파헤친 순간들.
스스로가 보기에도 꽤 괜찮게 느껴졌고.
[공략도- 최상]
[도전 의식- 상]
[NPC와의 유대감- 상]
[전투력- 최상]
[생존율- 판단 불가]
[멸망 이해도- 중]
[개인 성장률- 최상]
[권능 이용률- 최상]
[당신은 훌륭하게 탑을 등반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역시 비슷하게 판단했다.
멸망 이해도라는 지표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탑이 세계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역시 중요 포인트 같다.
필드 곳곳에 있었던 세계 배경과 멸망한 이들의 흔적이 시작이었으며, 이후 만난 NPC와 비교적 최근에 싸웠던 최성모에게 들은 것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난 탑의 정체와 목적, 멸망의 기준은 알지 못한다.
60층에 오르기 전에 알게 되겠지만.
대형 길드의 수장들이 알아냈다면 나 역시 알아낼 수 있다.
[당신이 가진 권능의 등급이 너무 높습니다.]
[등급 승급에 제한이 걸립니다.]
[미완성 권능은 등급이 오르지 않습니다.]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테스트 중에는 사망하더라도 코인이 차감되지 않습니다.]
환상이 꺼지고 안내 메시지가 뜬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적당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릴카도 별문제 없을 거라고 말했으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뭐든 처음 겪는 것에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있기 마련이었다.
[여섯 번의 테스트가 진행됩니다.]
[첫 번째. 9층의 보스 달칸과 싸워 승리하십시오.]
[봉인이 3개 풀립니다.]
[스텟이 당시 기준으로 동결됩니다.]
“크읍!”
배경이 검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테스트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 했더니만 이런 식이었다.
그때의 경험을 되풀이하며 확인하는 것. 조건도 조금 바뀌었다.
당시 내가 잡았던 달칸은 봉인 2개가 풀렸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스킬이랑 장비, 칭호는 그대로야.”
권능도 마찬가지다.
난 놈을 노려봤다.
“그르르르륵.”
여전히 커다란 녀석.
풍성한 털과 날카롭게 빛나는 눈.
“오랜만이지?”
난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크와오오오!”
화답하듯 내게 포효하는 녀석.
덩치와는 걸맞지 않은 속도로 내게 달려온다.
봉인 3개가 풀렸으니 4성급 이상인 건 확실하고, 느껴지는 기운을 보자니 5성급까지는 아닌 것 같다.
한순간 거리를 좁힌 놈이 아가리를 들이민다.
사람 하나 정도는 한 번에 반 토막을 낼 크기.
-타앗!
옆으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덩치만큼이나 큰 눈동자가 나를 좇는다.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풍압.
“이크!”
곧장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였다.
앞발이 머리를 지난다.
그래. 멍멍이가 쓸 수 있는 거라고 해 봤자 주둥이랑 앞발 정도지.
-사각!
안쪽으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털이 잘려 나가며 놈의 몸뚱이에 선혈이 그어진다.
분노한 놈이 날뛰기 시작한다.
짐승 특유의 날쌘 움직임.
나보다 훨씬 큰 만큼 동작도 컸으며 영리하게도 빙글 돌며 나를 가두려고 했다.
몸으로 밀쳐 균형을 무너트리고 앞발로 견제. 이어 기습적으로 날 물어뜯으려 한다.
이번에도 옆으로 굴러 피하려 했으나.
“크읍!”
급격히 다운그레드된 스텟 때문인가 살짝 늦었다.
그나마 머리가 아니라 팔이 물린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대로라면 팔이 무사할 리가.
“어?”
난 눈을 크게 떴다.
무사하다.
아주 무사하다.
[독자무강獨者武强 (A) Lv.4]
[강체强體 (A) Lv.1]
[물리 공격 내성 (B) Lv.1]
[강철의 의지 (B) Lv.5]
-까드드드득!
이빨과 갑옷이 맞닿으며 불똥이 튀어 오른다.
놈은 날카롭고 강력하다. 하지만 내 몸을 뚫지는 못했다.
장비의 내구도와 함께 적용된 내 스킬들이 나를 보호했으니까.
몸뚱이는 시스템에 의해 그때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을지 몰라도 스킬과 칭호, 장비는 그대로.
난 성장했다.
“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알겠다.
이면의 성소는 그동안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곳.
성소는 보여 주고 있는 거다.
9층 때의 신체 스펙일지라도 그동안 쌓아 온 노력의 결실이 있다면 이겨 낼 수 있다는 걸.
나 정말 열심히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얼른 끝내자.”
놈에게 팔이 물린 채로 난 스킬을 사용했다.
[파이어 밤 (AA) Lv.1]
-콰아아아앙!
릴카의 집에서 성소로 오기 전, 난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다.
장비 점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스킬 승급, 새로운 펠라인 세트 획득 등등.
그 결과가 이거.
“키하아아아!”
놈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다.
당시에는 도저히 어떡하기 힘든 괴물이었는데.
“할 만하네.”
이제는 괜찮아 보인다.
난 검을 굳게 쥐었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발합니다.]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합니다.]
검이 내 몸과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으며 권능을 통해 놈이 부상당한 위치가 정확히 드러났다. 놈이 쓸 수 있는 스킬까지 모두.
위기감이 느낀 놈이 몸에 암염을 두른다.
검게 타오르는 불꽃.
다시금 놈이 내게 달려들었고.
-콰아아앙!
폭발을 추진력 삼아 앞으로 날아간 난 그대로 검을 그었다.
[절삭 (A) Lv.1]
잘려 나가는 앞발.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핏물.
기우뚱하는 녀석을 향해 다음 스킬을 사용했다.
[오로라 빔 (A) Lv.6]
거센 빛의 폭풍이 놈을 휩쓸었다.
한 번, 두 번, 이어 놈이 쓰러질 때까지.
녀석 또한 발악했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곧 최후를 맞이했다.
[승리!]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합니다.]
[스텟이 원상태로 돌아옵니다.]
[10분 후, 두 번째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뭐가 나오려나.
스트레칭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
이미 모두 겪어 본 일.
뭐가 나오든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 * *
어느덧 마지막 여섯 번째 테스트.
앞에 있던 테스트는 모두 할 만했다.
그런데.
“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번 거는 좀 선 넘은 거 같은데.
난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크하하하! 빌어먹을 녀석, 네놈은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이다!”
39층에서 상대한 메글릿이었다.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NPC가 나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바로 아래층이다.
39층 통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성장을 해.
그냥 나가 죽으라는 거 아니야!
열불이 났지만.
[본 테스트에서는 기본적으로 NPC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전자의 권능 개수와 등급이 상식 밖이라는 점, 현재 NPC 메글릿의 처우가 결정되지 않은 관계로 특별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형평성을 위해 NPC 메글릿에게 시스템 제약이 걸립니다.]
[메글릿은 일정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메글릿은 암흑 창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메글릿의 전체 능력 80퍼센트가 봉인됩니다.]
[테스트 통과 기준: 메글릿의 공격 회피 3회 or 메글릿에게 타격 1회.]
[단, 공격 회피 성공 시 회피를 위해 사용한 스킬은 임시 봉인됩니다.]
마냥 불만을 표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확실한 제약을 주었으니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밸런스는 맞췄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의문인 건.
“메글릿의 처우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그에에에.”
39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냥 필드가 소멸되며 같이 죽은 거 아니야?
39층으로 내려갈 수도 없으니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힘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크크큭. 한 번은 용케 피했다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나?”
놈이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업자득이라고 알라나 모르겠네.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담아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줬다.
길길이 날뛰는 놈을 보며 여유로운 척을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답답하다.
[공격 회피 (1/3)]
[‘안개 질주 (A)’가 일시적으로 봉인됩니다.]
현재 난 놈의 공격을 한 번 피해 냈다.
문제는 테스트 조건에 따라 회피 성공에 사용한 스킬이 봉인된 것.
놈 또한 여기까지는 예상했는지 안개 질주를 봉인시킨 데 만족하고 있었다.
[다음 공격까지 남은 시간- 01:45]
조금 있으면 놈이 다시 공격을 한다.
이미 메글릿의 손에는 거무튀튀한 창이 들려 있다.
39층에서의 전투 때 겪어 본 공격. 저거에 어깨가 꿰뚫렸었지.
이번에는 어쩐다.
고민했고 이내 한 가지 전략을 짰다.
[파이어 (D) Lv.1]
-화르르르륵!
놈과 나 사이에 불길을 만들었다.
마력을 때려 부어 장벽처럼,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게다가.
[파이어 밤 (AA) Lv.1]
[시한폭탄 (A) Lv.8]
폭발을 일으키고 곳곳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사방에서 울리는 폭음.
열기가 뻗어 나가고 폭발의 여파로 공동이 흔들린다.
“그렇게 숨으면 내가 못 맞출 것 같나!”
“어. 절대 못 맞출 거 같은데?”
불길 너머에서 놈이 소리 질렀다.
난 대충 대꾸하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놈의 말대로다. 비록 힘의 80퍼센트가 봉인됐다고는 하나 내가 덤비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 이 방법을 써야 한다.
폭발로 놈의 눈과 귀를 막은 채. 진동으로 놈의 감각을 속이며 계속해서 작업을 했다.
내가 진짜 노리는 건.
[디그 (D) Lv.1]
[디그 (D) Lv.1]
[디그 (D) Lv.1]
[디그 (D) Lv.1]
.
.
.
바로 이거.
[메글릿이 공격합니다!]
“죽어어어어!”
공격 가능 메시지가 뜨는 것과 동시에 메글릿이 힘차게 소리쳤고, 나 역시 작전을 수행했다.
[중량 팔찌 (C)]
마력을 끌어모아 무게를 늘렸다.
이미 발밑에는 깊숙하게 구덩이를 파 둔 상황.
간신히 내 몸무게를 버틸 정도까지의 두께만 남겨 둔 바닥은 급격히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고.
놈의 창이 나를 낚아채려는 순간.
-쿠르르르릉
난 밑으로 떨어졌다.
머리카락 몇 개가 창에 잘려 잘렸으나 데미지는 전무.
[두 번째 공격을 회피합니다!]
[다음 공격까지 남은 시간 - 02:59]
[디그 (D)가 일시적으로 봉인됩니다.]
놈의 두 번째 공격 역시 피해 낼 수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 피하면 된다.
8미터 가까이 파 버린 구덩이에 주저앉은 채 난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디그도 더는 사용할 수 없다.
“곤란한데.”
“궤에에?”
내 고민을 눈치챈 덕춘이가 자신을 가리킨다.
도와줄까 하는 눈빛인데.
덕춘이의 특성 ‘외갑 (B)’을 사용하면 놈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널 어떻게 방패로 쓰냐.”
설사 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주인이 돼 가지고 그런 못난 짓을 할 수는 없지.
“읏차.”
덕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음 계획을 생각하는 사이 놈의 공격 시간이 다가왔다.
이럴 때는 시간이 빨리 가더라.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라진 불길 너머 흉흉하게 눈을 빛내는 메글릿이 말했다.
녀석의 말이 맞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려고.
내게는.
[펠라인의 주황 오른 다리 (F)]
새롭게 얻은 펠라인 세트가 있었으며.
등급 자체는 고작 F지만.
[펠라인 세트 (4/7)]
[세트 효과가 적용됩니다!]
[펠라인 세트에 봉인된 스킬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펠라인 세트 4개를 모으며 해금된 또 다른 능력이 있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다.
난 효과를 읽으며 얼굴을 구겼다.
새삼 또 느끼는 건데.
“펠라인 이 새끼는 변태가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