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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63화 (163/740)

163화 통합 전쟁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데빌 가고일이 손가락을 까딱인다.

따라오라는 거겠지. 먼저 갔던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면담이 끝날 때 맞춰서 바로바로 움직이는 모양.

사람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건가.

“이봐, 신입. 원래 첫인상이 중요한 거 알지?”

“면담하자마자 한 대 갈겨 버려. 진짜 팁이다.”

가고일을 따라나서기 전, 악마들이 조언을 해 줬다.

일단 한 대 쳐라?

언뜻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한바탕 하고 왔습니다. 이번이라고 못할 건 없죠.”

생각해 보면 이미 싸우지 않았던가.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표현이 어울렸지만.

맞네. 그때도 난장을 피웠는데 메글릿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는데 악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알겠다.

노예라고 잡아 와 놓고 무장을 해제시키지 않은 이유.

언제든지 암살을 시도하라는 뜻이었다.

악마들의 문화는 어떤 건지 알 수 없지만 좋은 쪽으로 적용된다면 불만은 없다.

“이블아이 씨, 어디 가요?”

“면담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부수고 나가는 거 어떠냐.”

김소담이 나를 쫓아 오다 제지를 당했고, 오지혁은 당장이라도 가고일을 부술 것처럼 노려봤다.

큰일 날 소리 하네, 이 녀석.

“다들 면담은 반드시 받도록 하세요. 안 받으면 소장이 직접 처벌합니다.”

굳이 등에 말뚝이 박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괜히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될 수도 있으니까.

절그럭.

발목과 이어진 쇠구슬이 끌려왔고, 난 처음으로 노역장의 길목을 살필 수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며 최대한 많은 것을 눈에 담았다.

예상했던 대로 노역장의 구조는 복잡했지만.

‘어느 정도 규칙이 있군.’

완전히 무질서하게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밑으로 파 내려가는 메인 통로가 있고 일정 구간마다 옆으로 새로운 길을 뚫는 형식이었다.

오르막길. 먼지가 가득한 공간에 있어서 그런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코가 간질거린다.

“키헤에에엑.”

가고일이 낮게 울었다.

면담이 끝났는지 먼저 갔던 사람이 돌아오고 있다.

표정이 미묘하다. 따로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정말 대화만 하다 온 것 같은데.

잠시 시선이 마주쳤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다.

“덕춘아.”

난 작게 속삭였고.

“그에에.”

덕춘이는 은밀하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가지 못한 구역들을 살피기 위함.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얻어 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1시간 정도 걸었을까.

멀리서 빛이 보였다.

동시에 느껴지는 맑은 공기.

미약하지만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소리가 뜨문뜨문 이어지는 걸 보니 처음보다는 기세가 줄어든 것 같지만.

어쩌면 놈들에게 당해서 사람이 줄어든 걸지도 몰랐다.

“키하악.”

날 안내하던 가고일이 등을 민다.

어느새 도착한 소장실.

우리가 부쉈던 벽은 이미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입술을 핥았다. 갈등이 일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메글릿과 면담을 진행할지.

자, 그럼.

가 볼까.

-콰아아앙!

난 검을 뽑으며 문을 걷어찼다.

동시에 돌격.

“면담하러 왔다!”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녀석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내 쪽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을 내미는 메글릿.

맨손으로 검을 붙잡는다.

보통이라면 이 상태로 검을 잡아당기면 손가락이 잘려나가겠지만.

-꾸드드드득

놈의 악력이 너무 세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검.

메글릿의 손에서는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첫 면담부터 덤비는 등반가는 처음이군.”

-티잉!

그가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반발력으로 당겨오는 검.

자연스럽게 검을 뒤로 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오로라 빔.

-찌유우우우웅!

오색 빛깔 광채가 쏘아져 나간다.

굉장히 빠른 속도.

거리도 가까운 만큼 반응하기 힘들어야 정상이었지만.

-스으으으으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검은 안개가 오로라 빔을 삼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이어 뭐라도 해보려 했지만.

“싸우는 건 좋은데 어지럽히지는 말자고. 치우기 귀찮으니까.”

어느새 메글릿이 지척까지 다가왔고, 통증이 올라오기도 전에 무릎이 꺾였다.

몸이 기우는 것과 동시에 찍어 누르는 거대한 압력.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난 바닥에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겁다. 몸이 찌부러질 것 같다.

숨쉬기도 버거운 상황.

“서프라이즈치고 나쁘지 않았어.”

“으으윽.”

메글릿은 나를 방석 삼아 앉았다.

어떻게 발목이라도 자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 정도나 격차가 있다는 건가.

난 고개를 비틀어 놈을 노려봤고.

[메글릿-NPC]

-제4마계의 악마

-통합을 거부한 황귀黃鬼

-39층, 노역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권능을 발동되며 놈의 정보가 떠올랐다.

역시나 별다른 정보는 뜨지 않는다.

제압을 완료했기 때문일까.

나를 짓누르던 압력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메글릿 역시 일어서더니 소파에 몸을 묻었고, 나도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장난은 이쯤 해 두고 면담을 진행하지.”

노역소 악마들이 말한 대로 싸우는 것 자체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은데.

[NPC, 메글릿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자신한테 칼을 겨눈 사람한테 호감도가 상승한다?

여전히 악마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노역소 악마들의 조언이 맞았다는 건 확실했다.

난 검을 집어넣고 그의 앞에 앉았다.

앞으로 면담은 많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면담인지 뭔지 얼른 해.”

“그럴 생각이야.”

볼펜과 종이를 꺼내는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그래, 신참 노예. 일은 할 만한가?”

“아니.”

“차차 익숙해지겠지. 밥은 입에 맞고?”

“밥 안 줬잖아.”

“아차, 잊고 있었군.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말이지. 일하는 데 불만은 없는가?”

“여기로 잡혀 온 게 불만인데.”

“원래 사는 게 그렇지. 이해하게. 또 어디 보자.”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은 녀석이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해 댄다.

겉치레식 질문이라고 해야 하나.

나이, 성별, 신체 정보, 노역장에서의 불만 사항, 탈출 기미, 기타 등등.

나도 그렇지만 질문을 하는 본인도 별 관심 없는지 몇 가지는 대답도 하기 전에 고개를 까딱이며 다음 질문을 내뱉었다.

대체 면담을 왜 하는 거야.

반쯤 눕다시피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볼펜을 내려놓는다.

“첫 면담이라 물어볼 게 많았군. 이제부터는 자유 주제로 하지. 질문할 거 있나?”

이번에는 내가 질문하는 타이밍인가.

난 잠시 고민했고.

“면담을 왜 하는 거야. 너도 딱히 관심 없어 보이는데.”

“그야 내게 주어진 역할이니까. NPC들은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지 노역장에 있는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딱히 의미는 없는 모양.

릴카가 상인 역할을 하고, 벨라가 분식점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아가 붕괴되지 않고 탑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 다음 질문.

“통합 전쟁이 뭐지. 보아하니 악마라고 다 같은 악마가 아닌 것 같던데.”

이번 질문은 예상외였던 걸까. 그가 눈썹을 까딱인다.

“통합 전쟁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으마. 멍청이들이 말해 줬겠지.”

머리를 긁적인 메글릿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확연하게 줄어든 사람들.

가디언과 가고일도 수가 많이 줄었다.

해가 지고 있는 타이밍.

[밤은 평온의 시간.]

[가고일과 가디언이 물러납니다.]

[임시 휴전이 발동됩니다.]

메글릿이 NPC의 권한을 사용하자, 데몬 가디언과 데빌 가고일이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노역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몇은 물러나는 놈들을 공격하려고도 했지만.

[임시 휴전 중에는 전투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런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애꾸 예티 던전에서 전투 불가 옵션이 있었지.

잠시 말을 멈췄던 메글릿이 입을 열었다.

“통합 전쟁. 그건 다섯 갈래로 나뉜 악마 일족을 하나로 합치는 숭고한 일이었지. 우리는 본디 하나, 본질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홍귀, 백귀, 청귀, 흑귀, 황귀. 각 구역을 지배하는 악마들. 백귀는 홍귀를 흡수했으며, 청귀는 흑귀를 잡아먹었지.”

말 그대로 각 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다.

노역소에서 봤던 이들이 그걸 증명한다.

흡수한 일족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39층의 주인인 메글릿은 그대로인가.

의문이 들던 찰나.

“다른 일족을 흡수하며 청귀와 백귀는 강해졌어. 그런데 말이다.”

씨익.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황귀의 적이 되지 못했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황귀가 그만큼이나 우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놈들이 힘을 모으고 합쳐도 우리보다 못한 떨거지일 뿐이야!”

노을에 비친 그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섬세하게 돋아난 뿔과 돌기, 눈가에는 광기가 일렁인다.

“애초에 하나가 될 필요가 없었던 거야! 황귀가 마계의 정점이니까! 굳이 다른 놈들을 흡수할 이유가 없었기에 우리는 놈들을 죽이고 노예로 삼았지. 서로 섞여 버린 잡종과 순혈을 분류하는 과정. 그게 통합 전쟁이었다. 아름다운 일이었지!”

창가에 걸터앉은 그가 양손을 펼쳐 자신의 몸을 어루만진다.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이 황귀임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우월감. 자아도취.

난 아직도 악마의 생태계를 모른다.

어쩌면 저러는 게 악마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걸 수도 있지.

그런데.

‘킬더레스는 저러지 않았단 말이야.’

왤까. 저놈이 말하는 걸 들으면 들을수록 인상이 찌푸려지는 이유는.

제7마계의 지배자한테도 느껴지지 않았던 거부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메글릿. 황귀.

오만하나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

제4마계의 주류.

의미를 잃은 전쟁과 전쟁의 잔재로 남은 노역장.

그게 39층의 배경이라는 것을.

난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고.

[제4마계의 일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그런 내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놈에게는 보이지 않는 개인적인 메시지.

여전히 낄낄거리는 놈을 두고 난 퀘스트를 살폈다.

[복수를 꿈꾸는 악마들-히든 퀘스트]

-제4마계를 휩쓸었던 거대한 전쟁.

-통합 전쟁에는 야만적인 방식과는 별개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대의가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고 목숨을 빼앗았지만 패배한 일족에 대한 예우와 배려, 존중은 존재했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 그것은 오방위의 악마들의 숙명이었으나 황귀는 모든 것을 저버렸고, 패배한 이들을 무참히 살해. 노예로 삼았습니다.

-노역장의 악마들은 꿈꿉니다.

-본질을 잊은 존재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기를.

-노역소의 악마들과 힘을 합쳐 메글릿을 처단하세요.

탑에 오르고 처음.

NPC를 없애는 퀘스트를 받았다.

말도 안 된다.

NPC는 강력한 존재. 40층에도 도달하지 못한 내가 상대할 수 없는 건 물론이요, 같은 NPC인 노역소의 악마들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패배했던 이들이다.

즉, 메글릿이 그들보다 강하다는 것.

위험하다. 사실상 가능성이 제로인 퀘스트. 상식적으로라면 거부하는 게 맞았지만.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예스.”

보상을 확인한 난 반사적으로 수락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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