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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62화 (162/740)

162화 면담

탈출과 함께 마주친 노역소장 메글릿.

그는 바로 진압에 나섰다.

도망치려고도 해 봤고, 한 번은 미친 척하고 덤벼 보기도 했으나.

39층의 담당 NPC인 메글릿은 강했고,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제압당했다.

“괜찮아요?”

“예. 살 만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신나게 얻어 터졌다.

노역장. 바닥에 박혀 있던 날 끄집어낸 김소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실 멀쩡하지는 않다. 망할 악마 녀석, 일부러 때린 곳만 계속 때렸다.

의도가 눈에 뻔히 보이니 방어하기는 했는데 귀신같이 틈을 만들어 공격해 댔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난다는 거겠지.

여러 일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놈의 부름을 받은 6명 모두 노예 신분이 되었다.

그 증거가 이거.

“왜 이딴 걸 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군.”

발목에 찬 쇠사슬이다.

오지혁이 툴툴댄다. 짜증이 잔뜩 묻어난 얼굴. 그가 발을 흔들자 쇠사슬이 차르륵 하고 흔들린다. 그 끝에 달린 건 묵직한 철구.

움직임에 제한을 두려고 한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나름 쓸 만하지 않아요? 이렇게 걷어차면 망치 대신 쓸 수도 있고.”

-콰앙!

문제는 우리 모두 초인이나 다를 바 없는 각성자라는 거였다.

20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철구를 너무나 쉽게 휘두르는 김소담.

오지혁 역시 마찬가지다. 발차기를 할 때마다 쇠사슬에 이어진 철구가 날아가 벽을 때린다.

왜 우리가 벽을 치고 있느냐.

[당신은 노예로 선정되었습니다.]

[땅을 파고 내려가 유물을 발굴하십시오.]

[사망하거나 팀원이 포탈을 생성하기 전까지 노예 신분이 유지됩니다.]

우리를 노예로 데려온 이유가 발굴이기 때문이었다.

발굴이라고 하기에는 조악한 환경이기는 했지만.

광산 혹은 동굴이라고 생각했던 산맥의 구멍은 땅을 파 내려가기 위한 공간이었다.

이곳이 어딘지 뭐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땅을 파고 내려갈 뿐.

규모가 크기는 하다. 사람의 힘으로 뚫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공간이 꽤 넓었으니까.

어느 정도로 넓냐면.

“키에에엑!”

“크아아악!”

“저 망할 돌덩이들이, 부숴 버릴까 보다.”

“아, 빡치네.”

우리를 감독하기 위해 남아 있는 데빌 가고일과 사십여 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한 번에 있을 만큼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노예로 일하고 있는 건 이번에 잡힌 6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보다 먼저 잡혀 온 이들도 있었고 신기하게도.

“죽인다. 죽인다!”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NPC로 보이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

5명 정도 되나. 얼핏 보기에는 그렇다.

생김새 자체는 노역소장인 메글릿과 비슷했다.

머리에 뿔, 손과 발톱은 뾰족한 돌기가 가득하고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나와 있다.

전체적으로 뾰족한 게 많은 사람 같기도 하지만 이질적이게도.

“색이 다르죠?”

“슬쩍 이야기 들어 보니 인종이 다른 느낌인데요.”

겉 피부색이 달랐다.

파란색과 흰색.

파란색 악마는 눈 전체와 입안이 검은색이었고, 흰색 악마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녔다.

처음에는 원래 그런 건가 싶었지만.

[게일-NPC]

-제4마계의 악마

-흑귀黑鬼를 흡수한 청귀靑鬼

-통합 전쟁에서 패배한 일족

[포머헴-NPC]

-제4마계의 악마

-홍귀紅鬼를 흡수한 백귀白鬼

-통합 전쟁에서 패배한 일족

설명을 보아하니 이유가 있는 듯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난 슬쩍 뒤를 돌아봤다.

얼마나 내려온 걸까. 갈림길이 많다.

개미굴처럼 얽혀 있는 노역장.

개떡이 될 때까지 얻어터지다 끌려와서 나가는 길을 모르겠다.

권능이 있으니 어떻게 길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키에에에엑!”

저기 나사 빠진 것처럼 울부짖으며 채찍질을 하는 가고일 때문에 그러기도 쉽지 않다.

놈을 해치우면 곧장 메글릿이 찾아올 테니까.

어떻게 아느냐. 우리와 함께 노역을 하고 있는 남자가 알려 줬다.

끌려온 헌터 중에서는 최고참 같은 인물.

이름이 이선만이라고 했나.

“저 망할 것에 눈길도 주지 마. 성질이 더러워. 괜히 채찍 맞을 수도 있다고. 아픈 것보다 기분이 나쁘지.”

곡괭이를 휘두르던 이선만이 중얼거렸다.

그의 주변에는 30명 가까이 되는 이들이 대형을 맞춰 땅을 파고 있었다.

오지혁이 기절시켰던 남자 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잘하면 한 대 치겠네.”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달려들 기세.

때린 건 오지혁인데 왜 나한테 화풀이야. 혼나려고.

“난 오늘로 이곳에 잡힌 지 49일 됐지.”

“오래됐네요.”

검을 휘둘러 바위를 쪼개며 말을 받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글릿은 노예로 선별된 이들의 장비와 무기를 뺏지 않았다.

곡괭이를 쓰는 이도 있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쓰는 이들도 제법 많은 상황.

갑옷과 장비를 입은 채 병장기로 돌을 부수는 모습이 특이하다.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팀원들이 포탈을 만들든가, 여기서 죽든가. 여기 남아 있는 이들은 팀원들이 전멸당한 이들이지.”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탈을 만들어 줄 팀원이 당했다면 사실상 죽을 때까지 노역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코인에 여유가 있는 자들이라면 그냥 밥을 굶는 걸 추천해. 그게 그나마 빠르게 죽을 수 있거든. 나야 더 이상 코인이 없어서 이렇게 버티고 있지만.”

까앙!

유독 단단한 암석을 내리친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싸우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도 있지만 힘들 거야, 저 망할 가고일들이 항시 감시해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노역소장이 내려오지.”

“다른 방법은 아예 없나요? 탈출이라든가, 아니면 뭐 여기서 몰래 포탈을 만든다든가.”

“탈출할 수 있었으면 저 악마들이 여기 있을까?”

이선만이 턱으로 악마들을 가리켰다.

하긴 저들은 우리랑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강할 텐데.

시스템적인 뭔가가 제약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기는 하다.

“그리고 포탈은 여기서 못 만들어. 처음 줄 때 받은 석판은 노예로 선정되면 자동으로 다른 팀원한테 양도돼.”

그렇군. 난 이곳으로 불려오기 전 김서균에게 넘겨서 모르고 있었다.

어쩐다.

무작정 기다려야 하나?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때.

[메글릿이 면담을 진행합니다.]

[호출되는 노예는 가고일의 안내에 따라 노역소장실로 오시길 바랍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면담?

이건 또 뭔 개 풀 뜯는 소리야.

내 표정을 본 걸까 이선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면담 시간이군. 말 그대로야. 노역하는 이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는 거지. 할 만하냐, 성과는 어떻고 탈출하려는 사람은 없는지 물어보는 거야.”

메시지대로 발광하며 채찍질을 하던 가고일이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이동했다.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저 놈을 포함해 작업장을 감시하는 가고일은 일곱.

적어도 이곳에 있는 놈들은 그게 전부다.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후우. 좀 쉬지. 이때가 아니면 쉬기 힘들어. 가고일도 지금은 얌전히 있는 편이고.”

“만약 면담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죠?”

“응?”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일까. 그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한다.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메글릿은 왜 면담을 할까. 들어 보자니 매일 하는 것 같은데.

이선만이 말한 것처럼 노역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혹시 모를 탈출을 대비하기 위해?

글쎄, 메글릿은 39층의 담당 NPC. 단순히 생각해 봐도 35층의 플레타, 19층의 휴고, 29층의 마그네타. 이 정도 수준의 NPC일 게 분명했다.

굳이 수고스럽게 면담하지 않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본인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는 건.

‘메글릿한테도 시스템적인 제약이 있거나.’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

NPC를 만나며 느낀 게 있다.

의외로 NPC는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한다.

NPC는 자유롭지 못하고 주어진 구역 내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니까.

특히나 오랜 시간 홀로 있는 이는 더 그렇겠지.

어느 쪽일까, 제약? 아니면 외로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알아보자.

턱을 쓰다듬던 이선만이 입을 연다.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저기, 악마들이라면 또 모르겠군. 탑에 속한 이들인 만큼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야.”

“고마워요.”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소담은 피곤한지 바닥에 누워 있었고, 오지혁은 신경질적으로 나이프를 돌리는 중.

이상옥은 허공에 손짓하는 걸 보니 커뮤니티를 하려는 것 같은데.

[노역장에서는 커뮤니티가 비활성화됩니다.]

[노역장에서는 상점창이 비활성화됩니다.]

아무래도 안 되는 모양이다.

팀원들은 잠시 쉬라 하자.

목적지는 살벌한 표정으로 바위에 걸터앉은 악마들.

뭔지 모를 고기를 씹고 있는데 익히지도 않은 날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에에에.”

자연스럽게 그들 옆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덕춘이 역시 손을 흔들었고.

“자네 도시락인가? 싱싱하군. 나눠 먹을 생각 있으면 말해.”

“궥?”

악마들 역시 지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좋은 관심은 아닌 것 같지만.

“아하하. 얘는 먹는 게 아니라서요. 음식이라면 다른 것도 있습니다.”

난 보물 주머니에 보관하던 식량을 꺼냈다.

미궁 이후로 식량과 포션, 기타 생활 용품과 소비 아이템을 넣고 다니는 중.

별것 아닌 도시락이었지만 악마들의 눈이 번뜩였고.

“같이 드실래요?”

“그, 그럴까?”

“으흠! 이런 게 또 거절하면 실례라고!”

“그럼, 그럼!”

도시락을 내밀기가 무섭게 받아 가는 악마들.

킬더레스도 그렇고 악마라고 무조건 악하지는 않은 것 같다.

플레타도 천족이지만 성격이 개판이지 않았나.

게 눈 감추듯 도시락을 먹는 악마들을 보자니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힘든 것 같았다.

아까 씹고 있던 고기도 노역장에 기어 다니는 도마뱀이었던 것 같고.

음식 냄새가 퍼져서일까 다른 노역자들도 관심을 보인다.

저쪽은 잠시 무시하자. 수십 명이 먹을 식량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상점창이 닫힌 지금 식량은 어느 정도 확보해 두는 게 맞았다.

“끄억. 간만에 제대로 먹는군.”

“익힌 고기 먹는 게 얼마 만이야.”

“빌어먹을 메글릿, 우리한테는 짬밥만 주고.”

입맛을 다시며 도시락통을 내려놓는 이들.

그중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게일이라고 한다. 빌어먹을 노역장에 묶인 채 탑에 속하게 됐지.”

파란 피부의 악마.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이질적인 검은 입천장과 혓바닥이 눈에 띈다.

어색해하면 실례일까 싶어 티 내지 않고 손을 맞잡았다.

“이블아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쪽은 덕춘이.”

“이블아이라. 마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마물인데. 그쪽이랑은 어울리지 않는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곳에 오래 있었나요?”

“보다시피.”

그가 양손을 펼쳤다.

다른 노역자들과 달리 악마들은 제대로 된 장비가 없었다.

넝마와 다를 바 없는 옷차림에 끝이 닳은 곡괭이가 전부.

먼지와 돌 부스러기가 머리카락에 그대로 묻어 있다.

등반가와는 대우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 처음 들어와서 모르는 게 많습니다. 면담도 아직 안 갔고. 궁금한 게 있는데 면담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 면담. 그래. 그렇지.”

게일이 슬며시 내 쪽으로 몸을 숙인다.

“면담을 거부한 자가 있기는 하지, 저기 보여?”

게일이 한쪽을 가리킨다.

종잇장처럼 하얀 악마. 불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는데 등에는 팔뚝만 한 말뚝 세 개가 박혀 있다.

움직일 때마다 피부와 살이 벌어졌다 닫히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는데.

“저 친구가 면담을 거부했다가 저 꼴이 났지. 저주에 걸려서 말뚝을 뽑지도 못해. 메글릿만 뽑을 수 있지. 면담 10번마다 하나씩 빼 주더라고. 처음에는 10개가 박혀 있었어.”

오케이. 면담은 피하지 말자.

등에 말뚝 박히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덕분에 알았다. 메글릿은 면담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개 같은 자식, 이번에는 반드시 죽일 거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안 쓰는 단검이라도 있으면 하나 주겠나?”

“암살이요?”

“일과지. 우리는 면담 때마다 놈을 죽이려 하거든.”

“그랬다가는 저 악마처럼 되는 거 아닙니까?”

난 말뚝이 박힌 악마를 가리켰고.

고개를 갸웃하던 게일은 크게 웃었다.

“흐하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암살 시도한다고 처벌할 리가 없잖아! 재밌는 친구네!”

음. 역시 악마도 제정신은 아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도 못 잡던 찰나.

“케헤에에엑.”

데빌 가고일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내 면담 차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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