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39층
35층에서의 혈전이 끝나고 하루.
휴식을 취한 우리는 위로 올라갔다. 핥짝이 역시 같은 타이밍에 36층에 진입, 필연적으로 경쟁하게 생겼다.
하여간 승부욕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내게 정체를 드러낸 것도, 내 정체를 알아낸 것도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덕분에 나도 의욕이 생겼다.
탑을 오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멤버들 역시 각자의 능력을 바탕으로 정상을 향해 나아갈 테니.
최근 커뮤니티를 봤을 때, 탈모맨과 냥펀도 30층대를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같다.
둘이 팀을 만든 건 아니고 따로 움직이는 모양.
종종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걸 보니 냥펀도 탈모맨이 30층을 보호할 때 은근히 도와준 듯하다.
둘이 고생 많이 했다. 여러모로 고마운 녀석들.
다행히 둘 다 살인자 칭호를 받지 않았다.
탈모맨과 냥펀이 떠난 만큼 쁘찡 연합 사람들이 30층 안전지대를 정리하고 있다.
대형 길드에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인 만큼 보복성 테러를 감행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준석]: 개인적인 복수는 연합에서 나간 후, 따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이준석]: 연합은 재가입을 받지 않습니다. 신중한 선택 부탁합니다.
[이준석]: 여러분, 쁘찡 연합의 구호가 뭐죠?
[꿈과희망]: 꿈과 희망!
[초록잎]: 사랑!
[소담소담]: 평화!
[날벼락]: 쁘띠!
[김부영]: 공듀!
연합장을 맡고 있는 이준석이 적절히 조치해 준 덕분에 어느 정도 치안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준석도 슬슬 연합 일을 마무리하고 등반한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직 30층에는 오르지 못한 모양.
공략 글도 있으니 알아서 잘 오르겠지.
연합이니 대형 길드니 복잡한 건 잠시 내려두고.
[36층]
[섬에 도달하라.]
[여덟 팀이 참가합니다.]
[일곱 팀이 섬에 도달하는 시점, 소용돌이가 발생합니다.]
지금은 이곳을 클리어하는 것에 집중하자.
36층. 여러모로 유명한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탑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수생 몬스터와 싸워야 하는 곳이니까.
28층에서도 해양 몬스터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얼음 아래 갇혀 있었으니 제외하도록 하자.
“날씨는 참 좋은데, 그쵸?”
“그에에.”
우리가 있는 곳은 평평하게 깔린 바위 위.
제주도에서 볼 법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고, 눈앞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게 호수보다는 바다에 가까워 보였지만 물맛을 보면 분명히 민물이었다.
호수 안에는 서펀트를 비롯한 온갖 수상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섬은 대략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첫 수상 필드라 그런가 난이도가 엄청 하드 하지는 않다. 몇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었으면 몬스터는 고사하고 방향을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을 텐데.
“흐음, 최근에 너무 힘써서 그런가.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네요. 예전이었다면 살벌했을걸요?”
다들 비슷한 심정인지 큰 감흥은 없어 보였다.
그동안 육지 몬스터만 상대한 만큼 어색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반대편, 핥짝이 팀도 비슷하다.
“무조건 넘어가는 거야! 알겠지, 제군들?”
“옙!”
“물론입니다!”
파이팅 넘치네.
카리스마가 있는 건지 팀원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받고 있다.
그만한 실력과 리더십이 있는 건 당연하고.
순간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너한테는 절대 안 져.”
“으, 으응. 그래.”
너무 뜨거워서 살짝 민망하다.
라이벌이 생긴다는 게 좋기는 한데 뭐랄까.
저렇게 열정을 불태우니 나도 맞춰 줘야 할 것 같은 느낌?
아쉽게도 난 그렇게 불타오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저번에도 느꼈는데 핥짝 님이랑 아는 사이예요?”
“대충은요.”
“우와. 발 넓네요. 오지혁이랑도 아는 사이고, 핥짝 님이랑도… 어? 그러고 보니 탈모 님이랑도 만나지 않았어요?”
“그렇기는 하죠.”
눈을 빛내는 김소담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해 줬다.
생각해 보니 멤버 중에 냥펀 빼고 다 만났네.
핥짝이는 20층 디펜스 이벤트를 기점 해서 알음알음으로 모습이 노출된 상황.
알록달록한 갑옷을 입은 이블아이가 널리 퍼진 것처럼 큰 키에 굵은 음성, 팔에는 보석으로 이루어진 장식을 달고 있는 거로 유명했다.
저것마저 부럽다.
탈모맨 녀석은 쫄쫄이고, 난 조만간 무지개 세트가 될 예정인데 핥짝이는 정상적인 옷차림이라니!
이런 불합리한!
속에서 부러움과 질투심이 샘솟았고.
“안 되겠습니다. 우리도 절대 핥짝이한테는 지지 않을 거예요.”
승부욕이 생겨났다.
내가 이러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일까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팀원들이었지만.
“좋아요! 역시 1등이 최고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우리가 기억됩시다!”
“아자! 아자! 파이팅!”
이걸로 분위기는 업.
“저, 근데 수영할 줄 모르는데 어쩌죠?”
“배라도 만들어야 할 거 같아요. 저쪽에 나무가 있긴 합니다.”
“장비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잖아요. 버틸 수 있을까요? 심지어 우린 다섯 명인데?”
곧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팀원들의 말대로다.
나도 그렇고 팀원들도 그렇고 물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덕춘이가 있기는 하지만 혼자서 저 많은 몬스터를 전부 상대하는 건 좀 애매하고.
어떻게 다 처리한다 하더라도 최영미는 수영을 못 하고.
김서균 역시 중갑 차림이라 헤엄쳐 섬까지 가는 건 힘들다.
역시 탈 것을 만들어 이동하는 게 정답인 것 같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내게는 차선택이 존재했다.
다름 아닌 오지혁과 합을 맞추며 생겨난 전략.
“여러분들 건강하시죠?”
“예? 건강하기는 한데, 왜요?”
“튼튼해야 하거든요.”
김소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걸까 김소담이 흠칫 떨었고.
“눈 딱 감고 있어요. 몸에 힘주고!”
“자, 잠깐만요! 꺄악!”
난 그대로 김소담을 들어 올렸다.
[강철의 의지 (B) Lv.1]
구드드득!
그녀의 몸에 강철의 의지가 깃들었고.
“갑니다!”
“으아아아악!”
-콰아아아앙!
-찌유우우웅!
그대로 날려 버렸다.
파이어 밤으로 1차 추진력을 얻고, 뒤이어 오로라 빔을 쏘아 지속력까지 2차 추진력을 부여.
-쿠구구구궁
50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섬에 도착한 김소담 위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꿀꺽. 주변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건 착각일까.
“자, 다음.”
“저, 저는 헤엄쳐서. 흐익! 안 돼애애!”
뒤로 빠지는 고대진 역시 날려 보내고, 체념한 최영미와 살짝 떠는 김서균까지 섬으로 보냈다.
남은 건 나.
-콰아아앙!
파이어 밤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 나를 보며 경악하는 핥짝이와 그녀의 팀원들.
“으이이익! 우리도 간다! 다들 몸 웅크려!”
“네?”
얼떨결에 그녀의 팀원 한 명이 동그랗게 몸을 말았고.
“버티는 거야! 알겠지?”
“그게 무스아아아악!”
-짜아아아악!
가볍게 팀원을 허공에 던진 핥짝이가 스파이크를 날렸다.
맹렬한 속도로 섬으로 날아가는 이름 모를 사람.
잠깐이지만 시선이 맞닿았는데 울고 있는 것 같았다.
* * *
빠르게 통과한 36층.
이어 37층과 38층 역시 별다른 문제 없이 클리어했다.
이미 30층대 중반부에서 스펙을 상당히 올린 만큼 이후의 과제들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대형 길드의 방해도 없었으니 등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경쟁을 하는 건 여전했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탈락하는 팀도 존재했지만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
겪을수록 확실해진다.
탑은 구간마다 해야 하는 것이 존재했고, 그 모든 것을 해야만 다음 층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만약 튜토리얼 구간을 지나고 7, 8, 9층 성장 구간에서 스타터 킷을 얻지 못했다면 성장의 발판을 만들지 못했겠지.
이후 화기 지대와 냉기 지대 역시 마찬가지. 환경에 적응하며 숨겨진 유적과 던전에 들어가 히든 피스를 얻었고, 30층에서 와서는 저주 내성을, 이어 팀플레이를 하며 협동력을 길렀다.
이쯤 되면 탑이라는 것 자체가 헌터를 만들기 위한 장치 같은데.
-우우우우웅
상념을 이어 나가는 찰나.
[39층]
[포탈 생성 보석 수집 (0/5)]
[검정, 하양, 노랑, 빨강, 파랑. 다섯 가지 포탈 생성 보석을 모으십시오.]
[참가 팀 – 6팀]
[포탈이 생성될 때마다 필드가 사라집니다.]
30층대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알림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석판 하나.
[포탈 생성기]
-포탈을 생성시키는 석판.
-위치에 맞게 보석을 배치하세요.
중앙에 하나, 동서남북 방향에 하나씩 홈이 파여 있다.
이거 그거 아닌가?
“오방색이네요.”
“와, 오랜만에 듣네요. 어릴 때 학교에서 들었던 거 같은데.”
고대진의 말에 김소담이 반응한다.
대충 기억난다. 중앙이 노랑, 북이 검정, 동이 청색, 서가 흰색, 남이 빨강이었나.
찾아야 할 게 엄청 많지는 않다.
사람도 많고 내게는 권능이 있으니. 고대진도 정찰 및 탐색에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
-띠링
[정수리 핥짝]: 으아아아아! 쁘띠공듀!
[정수리 핥짝]: 두고 봐! 두고 보자고!
이번 층에는 핥짝이가 없다.
36층에서 치고 나간 결과, 아직 핥짝이는 39층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
[냥냥펀치]: 얘 왜 이러냥?
[니머리 탈모]: 평소랑 똑같은데 왜?
[냥냥펀치]: ㄴㄴ 평소보다 1.5배 흉폭한대?
[정수리 핥짝]: 우리 냥펀 뭐라 그랬어? ^^ 내가 만나면 ****해서 ***를 그냥 ***.
[냥냥펀치]: 저,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고양이가 눌렀습니닷!
[니머리 탈모]: 오우… 진짜네. 건들지 말아야겠다 ㅌㅌ!
영문 모를 멤버들이야 알아서 피하는 중.
무섭구만. 역시 빠르게 올라가길 잘했다.
얼른 40층 안전지대로 가야지.
주변 파악부터 하자.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위험해 보이는 건 없어 보이죠?”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핀 최영미가 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위험해 보이는 건 없다.
저 멀리 호수 하나, 그리 높지 않은 산 몇 개.
초원과 습해 보이는 숲이 있는 정도.
필드에서 흔히 보이는 거였지만.
“저것들은 뭔지 모르겠네.”
“비석? 조각상?”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곳곳에 인공적인 구조물의 잔해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
부서진 기둥도 있었으며 풍화된 비석도 있다.
무엇을 본떠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조각상도 몇 개 있었고.
“저건 동굴인가요?”
“광산 같기도 하고요.”
산 중턱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돌로 마감을 해 놓은 곳이 임시방편으로 사용한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용하려고 만들어 둔 것 같은데.
“은근히 기분 나쁘네요, 여기.”
“그러게 말입니다.”
“오방색 하면 동양적인 그거 아니에요? 어째 느낌이…….”
그러게. 오방색 하면 청룡, 백호, 현무 같은 신성한 동물이 나오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고정 관념인가, 난 다시금 석판을 살폈고.
“뭐야 이게.”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 문양을 살필 수 있었다.
다섯 개의 보석 구멍.
그것들을 잇는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문양들.
처음에는 별 의미 없는 흔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체계적이면서도 반복적인 패턴이다.
마치 마법진과 같은.
-쿠구구구궁
우리가 보석을 찾기도 전, 변화가 일어났다.
깨지고 부서졌던 조각상의 파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하나둘 결합하기 시작한다.
깎인 얼굴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돌덩이나 다를 바 없던 것들이 합쳐 날개가 되고 뿔이 된다.
그 모습은 마치.
“악마?”
[다섯 방위의 악마 교단 노역소]
[노동을 착취하는 하수인들이 일어섭니다.]
형상을 갖춘 크고 작은 악마 형상의 가고일이 고개를 틀었다.
[데몬 가디언과 데빌 가고일이 새로운 노예를 선별합니다.]
[노예로 선별된 존재는 노역소장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크하아아아악!”
놈들이 달려드는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