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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59화 (159/740)

159화 아, 안녕 핥짝아?

순간 몸이 굳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렇겠지, 갑자기 여기서 쁘띠공듀가 왜 나와.

나도 참, 허구한 날 몸을 막 굴리니까 환청이나 듣고.

조만간 영양이 듬뿍 담긴 보양식이라도 먹어야겠다.

헬다잉 키친에 보면 자양강장 식품도 따로 팔겠지.

“야, 무시하냐?”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아 불만인지 핥짝이가 팔짱을 꼈다.

미간이 좁혀진 게 계속 모른 척했다가는 한 대 때릴 기센데.

난 얼굴을 감쌌다.

아, 세상에.

환청이 아니었다니.

하지만 이 정도에 당황할 내가 아니다.

보아라, 내 완벽한 연기를.

“사,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이블아이, 평범한 등반가죠.”

“궤에에에.”

이렇게 등신 같을 수가.

덕춘이가 팔꿈치로 날 때린다.

그러지 마라, 나도 심란하니까.

“그래? 계속 모른 척한다 이거지? 어디 한번 커뮤니티로 글 하나 올려 봐. 뭐라고 뜨는지 한번 보게. 너 자꾸 그러면 탈모맨한테 다 까발린다?”

반응을 보니 알겠다.

핥짝이는 이미 확신하고 있다.

내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날 쁘띠공듀라고 여기는 게 뻔하다는 말.

긴 다리로 내 옆으로 들어온 녀석이 어깨에 팔을 두른다.

쏙 안기는 몸.

나도 평균은 넘는데 얘는 얼마나 큰 거야. 2미터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이래서 정수리 핥짝인가? 혀 내밀면 닿을 거리라서?

“내가 기껏 먼저 얼굴 깠는데 말이야. 나도 정수리 아니, 얼굴 좀 보자.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봤잖아. 아까 춤 잘 추더라. 이렇게 했던가, 요렇게?”

“그, 그만! 벗으면 되잖아.”

난 이상하게 몸을 꿈틀거리는 녀석을 붙잡았다.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수치사 할 것 같다, 이런 잔인한 녀석.

그래. 어차피 언젠가 정체를 밝혀야 하기는 한다.

차라리 이렇게 먼저 다가와 주는 편이 낫지.

좋게 생각하자. 핥짝이는 내가 쁘띠공듀라는 걸 알고 있다. 그 말인즉슨 그동안 내가 커뮤니티에서 한 짓이 콘셉트질이라는 걸 안다는 이야기.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을 해제합니다.]

결심을 굳힌 난 투구를 벗었고.

“어, 으음… 이 얼굴로 그동안 콘셉트질 한 거야? 진짜 안 어울려,”

“나도 알거든?”

순간 핥짝이의 말에 울컥했다.

따지고 보면 본인도 정체 숨긴 건 마찬가지잖아.

불공평하다! 핥짝이도 나처럼 수치스러워할 건더기가 없긴 하지.

“와. 진짜… 와. 이 얼굴로 ‘쁘띠공듀 등장!’이러고 다녔다고?”

“…흐지므르.”

뭐가 그리 좋은지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하는 녀석.

그래도 다행이다.

신기해하는 걸로 끝나서, 적어도 혐오는 안 하잖아.

이게 다행이라는 게 더 웃기기는 하지만.

난 슬쩍 녀석의 손을 떼어 냈고.

“흠흠! 뭐가 됐든 드디어 따라잡았네.”

“정체는 어떻게 안 거야?”

내 정체를 알게 된 경위를 물었다.

“별거 없지. 네가 공략 올리는 거랑 이블아이라는 사람의 등반 경로가 거의 같잖아. 게다가 10층에서는 탈모맨을 이기고 20층에서는 나한테 이겼다? 그것도 대형 길드도 아닌 녀석이? 딱 너 아냐?”

“반쯤은 심증이었네.”

그냥 떠본 거였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당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순히 심증은 아니고, 10층 투기장에서 탈모맨이 공격받았을 때 이블아이가 나섰지. 그 타이밍이 너무 갑작스러워, 쁘띠공듀한테 이야기가 들은 뒤 행동했다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고. 그리고 무슨 일만 있으면 이블아이가 나섰잖아. 우연치고는 너무 많지. 좀 더 자세히 말해 줄까?”

그 말을 시작으로 핥짝이는 그동안 의심해 온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공략 글이 올라오지 않는 공백, 그사이에 있던 사건들. 내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위치와 이블아이가 움직이는 경로.

분명 비슷한 시점에 탑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블아이와 쁘띠공듀가 어떻게 커넥션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구심.

게다가 최근 연합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정보도 있었다.

이준석과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쁘띠공듀. 하지만 쁘띠공듀의 최측근이나 다를 바 없는 이블아이에겐 이준석과의 개인 연락망이 없다.

서로 건너 건너 이야기를 하는 상황.

멤버들과 이블아이가 메시지로 대화한 적도 없었으며, 이블아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쁘띠공듀 이상으로 철저하게 스스로 감추는 존재.

절대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 둘.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듣다 보니 내가 다 질릴 정도, 이 정도면 발뺌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대충 알 사람은 알걸? 냥펀도 눈치채고 있을 것 같고. 탈모맨이야 똥멍청이라 모르는 것 같지만.”

하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핥짝이다.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논 멤버 중 한 명.

다른 사람에 비해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정보를 기반으로 내 정체를 유추한 거겠지.

적어도 커뮤니티를 통해 본 핥짝이는 제법 똑똑한 편이었다.

그나저나 냥펀도 대충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라.

“걱정 마. 정체를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그 정도 의리는 있잖아.”

“고, 고맙다.”

“나중에 탈모맨이랑 만날 때가 기대되기도 하고. 크큭. 50층대에서 보기로 했던가?”

그게 목적이었냐!

나쁜 녀석, 차라리 걔한테 말해 줘.

“아무튼 이걸로 동층인 거다. 앞으로는 안 져. 내가 먼저 오를 거니까. 너도 제대로 해.”

“당연한 말을. 나도 대충 등반할 생각은 없으니까.”

우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그럼 하던 거 마저 해. 요즘 공략 글 안 올렸잖아.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라. 동시에 올라갈 거니까.”

씨익 웃은 핥짝이가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래, 공략 올려야지.

[쁘띠공듀]: 다들 오랜만! 공☆듀가 왔어요!

그동안 좀 뜸했죠? 후후. 저도 바.빴.다고용.

오늘은 30층대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건데…….

왤까. 그동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마음이 미어지는 건.

탑에 들어오고부터 왠지 눈물이 많아진 것 같다.

꾸역꾸역 글을 써 내려가던 때.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펜그릴.”

세계수에 마력과 신성력을 주입하던 펜그릴이 다가왔다.

이제는 제법 살갑게 대해 준다.

세계수가 가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겠지.

“자세한 일은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떳떳하다면 상심할 이유는 없다네. 나 역시 인간 왕국을 불태우고 마을에서 추방당했을 때 한 치의 후회도 없었으니.”

내가 떳떳하지 않아서 문젠데요.

아니, 사실 잘못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좋은 일 하고 있지 않나?

탑을 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공략을 올리고 있으니.

생각을 바꾸자. 더 당당해지자. 평정심을 되찾자!

난 페이스를 올려 공략 글 작성을 마쳤고.

[정수리 핥짝]: 크흐… 역시 쁘띠공듀야! 공!

[냥냥펀치]: 듀!

[니머리 탈모]: 공!

[이준석]: 듀!

“이 씨…….”

빠르게 달리는 댓글에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열받네, 이거.

이준석 이 녀석은 언제 끼어든 거야.

계속 봐 봤자 스트레스만 받을 거 같아 커뮤니티를 껐다.

정신 차리자. 앞으로 할 일에 집중하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래고 보물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이게 대체 뭘까.”

“그에에.”

플레타와 거래해 얻은 보석함.

펠라인 세트를 얻을 수 있는 단서라고 했는데.

[세피르의 보석함 (AA)]

-무엇을 넣을까요?

-무엇이 나올까요?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집니다.

설명을 봐도 전혀 모르겠다.

안을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없고.

등급이 높은 걸 보니 보통 물건이 아닌 건 확실한데.

“오호, 세피르의 보석함이군.”

“이게 뭔지 알아?”

“알다마다, 일종의 교환 아이템이지.”

펜그릴이 보석함을 살핀다.

“진품이 확실하군. 보석함 안에 보석을 넣으면 자네가 원하는 물건 중 하나로 바꿔 주지. 등급은 AA급 이하로 고정되어 있지만.”

“보석이요?”

“그것도 보석함 안에 들어갈 정도의 사이즈인 보석만 받지. 사실 보석이라는 게 비싸 봐야 AA등급 아이템보다는 못 하지 않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난 보석함을 돌려받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서라고 하더니 보석함 자체가 해결책이었나.

그냥 줄 때 말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지금까지 내가 모은 펠라인 세트는 총 3개.

파츠별로 등급이 제각각이다.

빨간 머리통은 C급.

파란 오른팔은 D급.

노랑 몸통은 E급이다.

색깔만 다른 줄 알았더니 등급도 지들 멋대로네.

여러 정황을 살폈을 때 파츠별로 다른 등급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남은 4개는.

“S, A, B, F등급.”

물론 AAA등급이나 SS등급일 가능성도 있지만, 펠라인의 변태스러운 취향으로 봤을 때 똑같은 알파벳이 들어가게 해 뒀을 리가 없다.

분명하다. 핥짝이가 내 정체를 확신했던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팔짱을 꼈다.

S급은 보석함에 제한이 있어 얻기가 불가능.

안전하게 가려면 최소 A급, 가능하면 AA급에 준하는 보석을 넣어야 한다는 건데.

“펜그릴, A급 아이템이 나올 만한 보석이 있을까?”

“글세, 있기는 할 테지만 흔하지는 않겠지. 그 정도 가치를 가지려면 단순히 보석의 희귀함으로는 부족해. 누가 세공했는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소유자가 누군지에 따라 갈리겠지. 혹은 보석으로 분류되는 특별한 아이템이던가.”

역시 쉽지 않다.

“흐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보석을 가지고 있는 NPC는 알고 있다네.”

“진짜? 누군데. 알려 줘!”

“39층에 메글릿이라는 NPC가 있지. 그에게 부탁해 보게나.”

이런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으니.

난 그에게 엄지를 세웠다.

한번 찾아가 보자. 가서 보석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은 거고, 혹여나 얻지 못하더라도.

‘나한테는 그게 있으니 괜찮겠지.’

대비책은 있었다.

* * *

많은 일이 있었던 35층. 모든 게 마무리됐다. 다시 등반을 시작하자.

하루.

우리 팀과 핥짝이 팀은 컨디션을 되찾았고.

“올라가자.”

“오케이. 절대 안 진다.”

우리는 동시에 포탈을 넘었다.

* * *

조현수와 핥짝이의 팀이 위로 올라간 시점.

커뮤니티에서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었다.

먼저 쁘찡 연합 쪽.

이준석이 회장으로 있는 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대형 길드를 꺾었다. 한 번도 없던 일.

굳건하기만 하던 기득권이 패배를 인정했고, 모든 길드원이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길드 탈퇴 의사를 내비친 이들도 있었으며, 안전지대를 돌아다닐 때도 길드 마크를 가리거나 그 위에 옷을 걸쳐 입는 경우도 생겼다.

새로 들어온 새내기들이 활동하면서 쁘띠공듀의 공략글의 신뢰도가 상승.

관심 없던 이들까지 찾아보게 되었으며, 연합에 들어오고 싶다는 이들도 속출했다.

물론 사람이 많아지면 사건·사고가 늘기 마련이었기에, 이준석은 연합을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나 그 정도 고생은 아무렇지 않았다.

대형 길드를 물리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양됐으니까. 개인이 모여 거인을 쓰러트릴 수 있음을 확인했으니까.

반면 대형 길드 쪽은 잠잠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는 상황.

몇몇만 제외하고.

[스마일캡]: 와, 진짜 졌네? 잌ㅋㅋㅋㅋㅋ

[김조균_산군]: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생각보다 빨라서 의외임.

[화무선]: 상관없지 않소. 차라리 잘된 게지. 보아하니 괜찮은 놈들이 많은 것 같소만.

[초코쪼코]: ㅇㅈ. 이블아이랑 정수리 핥짝. 탈모좌도 장난 아니더라. 맞다. 조균아, 네 후배도 쓸 만하더라. 오지혁이였나. 인성 ㄱㅊ음?

[김조균_산군]: 따로 본 적은 없어서 잘 몰라. 인성이야 뭐, 사람 새끼기만 하면 오케이 아니냐.

[초코쪼코]: 그건 맞지. 인성보단 실력이 중요한 뻑킹 아름다운 탑!

현 루키들보다 한참 이전에 들어온 이들.

루키임에도 자유로운 닉네임을 쓰는 특별한 케이스였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스마일캡]: 빨리 올라오라고오오오~ 심심하다고~

[초코쪼코]: 우리 막내 쪼규니는 언제 올라오나? 누나 해 봐, 우쭈쭈.

[김조균_산군]: 조만간 가니까 뒈지지 말고 있어라. 내가 가서 조져 줄라니까 ㅎㅎ

[초코쪼코]: 오우오우, 너무 무서운걸? 심장 떨려!

[화무선]: 설렘과 두근거림. 그게 바로 사랑일세.

[스마일캡]: …? 나, 난 좀 떨어져 있을게. 둘이 좋은 시간 보네!

길드 체계가 완전히 잡히기 전에 탑을 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소속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 길드에서도 통제가 불가능한 이들.

각자의 욕망과 사명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상으로 향하는 자들이었다.

현시점, 공식적으로 탑 밖에서 활동하는 헌터 중 가장 높은 층에 오른 이는 미국의 데미 다이얼 64층.

그러나 아직 탑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들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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