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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53화 (153/740)

153화 좀 늦었네요

펜그릴의 공격이 막혔다.

다름 아닌 10층 투기장의 주인 킬더레스의 등장으로.

진짜 쓰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꾹 참고 쓸 때를 기다려 왔던 거지.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나 보지?”

난 얼굴을 구기고 있는 펜그릴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NPC를 NPC로 잡는다니.

애초에 탑을 오르는 이 중 NPC를 전략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능하면 접촉을 꺼리고, 만나더라도 우호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만나는 게 전부였으니까.

개인적인 친분과 이벤트 보상을 이용한 방법!

나라 한들 아직까지는 NPC와 맞상대하기 힘드니 이런 식으로…….

“너, 너 이 자식!”

“아악!”

승리를 점치던 타이밍, 킬더레스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에는 핏발이 선 것이 화가 많이 난 거 같은데.

살살, 좀만 살살 흔들어 줘요. 골 아파.

“잘도 날 팔아넘겼겠다!”

“아, 아니. 제가 판 건 아이템인데.”

“그게 그거잖아!”

아무래도 플레타와 만나서 고생 꽤 한 것 같다.

평소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투기장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상의가 거의 다 뜯겼고 불에 그슬린 흔적도 있다.

그녀와 진한 대화를 한 모양.

“이야기 들어 보니까 서로 할 이야기가 좀 남은 것 같아서 그렇죠. 맨날 도망갔다면서요!”

“왜 도망갔겠나? 어? 이렇게 될 줄 아니까 그런 거지!”

“그러게 평소에 잘하시지. 들어 보니까 플레타 이용해서 경계 끊고 그랬던 거 같은데. 천마대전 중이었다면서요.”

“그거까지 들었어? 하아, 진짜 플레타 이 요망한 것이 또 같잖은 수작을.”

눈을 감은 킬더레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천마대전 때 플레타의 도움으로 승리한 건 맞지. 그런데 난 그렇게 해 달라 한 적이 없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래?

“플레타가 멋대로 경계를 끊었다네. 수감된 이후 탈출하기까지. 멋대로 마계로 넘어온 뒤 천계에 돌아가면 죽을 테니 책임지라고. 후우. 그때 그냥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플레타가 말한 것 중에 킬더레스의 사주를 받고 천계와 마계의 경계를 끊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전 남편. 천마대전. 흑역사. 이런 키워드 때문에 이용당한 게 아닐까 의심했을 뿐.

“천족의 혓바닥 마계에서도 알아주지. 어떤 쪽으로는 악마보다 유혹을 잘하는 이들이야.”

“그건 몰랐네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배반을.”

“자고로 천족은 집착이 심하고 불같이 타오르는 존재들이라네. 그게 매력이기는 하지. 한번 눈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게 단점이지만. 자네가 그런 것도 이해는 하네.”

“그쵸? 이해가 되, 크학!”

-따악!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이 파손되었습니다.]

[자동 복구를 시작합니다.]

“이해는 되는데 용서가 안 되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정상은 아니었는데. 후우. 넌 일 끝나고 보도록 하지. 뭐가 됐든 계약은 계약. 악마는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쯧. 혀를 찬 킬더레스가 뒤를 돌아봤다.

나도 부서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앞을 바라봤다.

잠시 소동이 있기는 했으나 펜그릴과 싸우는 상황이었다.

마냥 떠들 수는 없다는 말.

갑작스러운 강적의 출현으로 펜그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전히 그의 주먹은 막힌 상황.

“그래서 나를 부른 건 이 드루이드 때문인가.”

“예,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힘드네요.”

-타앗!

펜그릴이 경계심을 끌어 올린 채 뒤로 도약했다.

킬더레스가 위험한 존재라는 걸 느낀 거겠지.

“악마를 데리고 올 줄이야, 그것도 NPC. 네놈의 정체가 뭐냐.”

“평화롭게 탑을 오르고 있는 등반자입니다.”

“궥?”

덕춘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자연스럽게 손으로 가렸다.

눈치 좀 챙기자 덕춘아.

든든한 빽도 생겼으니 이대로 대화를 하면 좋겠으나.

“더욱 위험한 놈인 것 같군.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이겠다.”

펜그릴은 오히려 살기를 뿜어 댔다.

알리오스랑 처음 만났을 때도 살벌했지만 얘는 더 하다.

맹목적인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고 해야 하나.

-꾸드드드득!

힘을 끌어 올렸는지 펜그릴의 몸이 더욱 커진다.

주변에 있던 식물들까지 거대하게 성장했으며, 평온했던 정원은 마경이 되기 시작했고.

“아무래도 육체적인 대화를 먼저 해야 할 것 같구나.”

“부탁합니다. 대화만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

뚜둑.

손가락을 풀며 펜그릴에게 다가가던 킬더레스가 피식 웃는다.

“무리라니. 뭐, 들은 적은 있다. 35층에 있는 NPC 펜그릴, 탑 밖에 있을 때 인간 왕국 하나를 멸망시켰다지?”

킬더레스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마다 쏟아지는 기운에 마력이 요동친다.

우뚝 멈춰선 그가 양손을 펼쳤다.

“난 천계와 마계를 무릎 꿇렸다네. 실력 한번 보도록 하지, 드루이드.”

-스팟!

순식간에 가속하는 둘.

신체 능력이 오르며 동체 시력도 제법 올랐다고 생각했건만, 희미한 잔상만 보일 뿐 둘의 움직임을 완벽히 쫓는 건 불가능했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게나. 본격적으로 싸우면 자네뿐만 아니라 35층에 있는 이들 모두가 죽을 터이니.】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건 킬더레스가 스킬을 사용했다.

[공간 차단 (S) Lv.???]

두 NPC의 존재감이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남은 거라고는 펜그릴이 분노하며 성장한 식물과 몬스터들뿐.

위험한 건 여전했으나 적어도 펜그릴에 의해 당할 일은 없어졌다.

-서걱!

나를 노리고 덩굴을 날리는 식물형 몬스터를 잘라 내며 자리를 벗어났다.

전장은 만들어졌다.

이제 팀원과 합류할 차례다.

* * *

조현수가 킬더레스를 소환한 후, 팀원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인 시점.

연합 팀은 빠르게 퇴각하고 있었다.

“젠장! 이놈들 이제 막 들어오는데요?”

“그럴 만도 하지. 당한 게 있는데!”

총 다섯 번의 기습.

대형 길드 쪽 사상자만 13명에 달했다.

설마 수적으로 열세인 곳에서 먼저 공격할지는 몰랐는지 대응이 부족했고, 첫 기습에서 훌륭한 성과를 얻었다.

이후에는 놈들도 경계했기에 첫 번째만큼의 활약은 하지 못했으나 야금야금 전력을 갉아먹는 건 가능했고.

이 모든 것이 제5영역으로 빠질 때마다 대형 길드가 추격을 포기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지막 다섯 번째 기습은 달랐다.

완전 경계. 세 명의 루키가 눈에 불을 켜고 연합 팀을 찾아냈고, 결국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만들지 못하고 빠져야 했다.

여기까지면 문제가 없었지만.

“저 새끼들 쫓아!”

“정찰조 진입! 연락망 유지해!”

대형 길드도 이상을 눈치채고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한 번도 아니고 수차례나 영역을 들락거렸는데 연합 팀 쪽의 낙오자가 아예 없다?

필드 보스가 사라졌든, 환경에 변화가 있든 뭔가 문제가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조금씩 길드원들이 줄어드는 상황인 만큼 루키들은 전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 결과가 이거.

-피유우우! 파앙!

“신호탄이다!”

“끈질긴 놈들!”

이내 대형 길드 팀 전체가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인원이 인원인 만큼 따돌리는 건 불가능.

빠르지만 급하지 않게 포위망을 짜며 접근해 오고 있다.

오지혁이 미끼가 되어 놈들을 유도하기도 했지만 놈들은 침착했다.

다시 합류한 오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도망칠 곳은 없다. 일전을 준비해라.”

한마디로 더 이상 도망치는 건 무의미하다는 말.

삽시간에 팀원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

저쪽에는 루키까지 있으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어떻게든 버텨 보죠. 그냥 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나마 은신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은 팀원들이 각자 각오를 다졌다.

도망치면 시간은 더 벌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체력이 떨어져 한 번에 당하겠지.

발악한다면 지금 하는 게 맞았다.

“적들도 전력이 많이 줄었습니다. 이제 고작해야 46명이에요.”

최영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불리한 건 맞지만 처음보다는 낫다.

“우리가 8명이니까 한 사람당 5, 6명씩 잡으면 되겠네요. 에이, 할 수 있다! 아자!”

어떻게든 힘내 보려고 고대진이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루키가 셋이다. 사실상 가망이 없지.”

오지혁이 초를 쳤다.

단번에 시무룩해진 고대진.

그러거나 말거나 빠르게 머리를 굴린 오지혁이 말을 이었다.

“전략을 짜야 한다. 김소담, 고대진, 최영미, 최대한 요란하게 날뛰어서 놈들의 시선을 끌어라.”

다음으로 그의 손가락이 이상옥에게 향했다.

“네놈은 혼란을 틈타 이하영, 다성 루키를 노려라. 성질이 더럽고 흥분을 잘하는 타입이다. 그나마 잡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지.”

암살에 특화된 만큼 대인전에 있어서는 오지혁 다음으로 강한 인물이 이상옥이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둘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협력했다.

남은 사람은 김서균과 이상옥의 팀원들.

오지혁이 눈매를 좁힌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만 나머지는 이클립스의 루키, 김창후를 맡아라. 이길 생각하지 말고 버티기만 해. 나사 빠진 놈이니 진지하게 싸우는 것보다 너희를 가지고 놀 게 뻔하다. 내가 최성모를 죽이고 합류할 때니 무조건 버텨.”

“버티는 거라.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가장 단단한 이는 김서균이다.

보유하고 있는 권능과 스킬도 그에 걸맞았고.

-키릭

오지혁이 나이프를 뽑았다.

높아진 기감으로 적들이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전에 최대한 적을 줄여 놓고 시작해야 한다.

“그럼 산개!”

오지혁이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고.

-푸화아악!

그와 동시에 정찰을 나선 이들의 목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깔끔한 일격.

[마나 라인 (B) Lv.10]

이어 스킬을 이용해 나이프를 회수한 오지혁이 안으로 파고든다.

하늘 위로 신호탄을 쏘는 녀석의 무릎을 걷어차 부수고 턱을 갈겨 쓰러트린다.

머리통을 밟아 마무리까지.

-콰아아아앙!

-키이이잉!

필드 저편에서 폭발음과 기계음이 들린다.

김소담과 일행들 또한 시선 끌기를 시작한 모양.

이상옥은 보이지 않는다.

암살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겠지.

아직 루키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뻔한 수법이다. 부하들을 먼저 내보내 체력을 깎고 어떤 스킬을 사용하는지 알아보려는 전략.

오지혁은 이 수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나오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줘야지.”

-쿠구구궁!

대지에 꽂아 넣은 발.

충격에 땅이 울리고 균열이 간다.

반발력으로 튀어 오른 크고 작은 바위들.

그 바위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오지혁의 발이 움직였고.

-콰과과과과!

걷어차인 바위들이 총알처럼 필드를 휩쓸었다.

“크악!”

“뭔데! 막아!”

시선이 끌려 있던 길드원의 머리가 깨지며 피가 튀어 오른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최영미가 그들의 미간에 석궁을 쐈으며, 김소담은 권능을 이용해 다른 이들의 발을 묶었다.

고대진은 말할 것도 없이 직접 뛰어다니며 어그로를 끌었고.

“하아, 진짜 멍청이들. 고작 10명도 안 되는 놈들한테 쩔쩔매서 어떻게 하냐.”

“너무 나무라지 마요. 처리자 목록에 있는 사람만 몇 명인데. 솔직히 길드원들보다 강할걸요?”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제 몫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좌측에 이하영, 정면에 최성모, 우측에 김창후.

연합 팀을 압박하며 들어오는 이들.

스윽.

최성모와 오지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블아이는 어디에 있지, 오지혁?”

오지혁에게는 관심조차 없다는 것일까. 그는 이블아이의 위치를 물었고.

“알 필요 있나. 넌 여기서 죽을 텐데.”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오지혁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 이하영.

“둘이 사이좋네. 잘 끝내, 흠!”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모습을 숨겼던 이상옥이 미간을 좁혔다.

간발의 차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목을 그을 수 있었을 텐데.

“여기도 재밌는 친구가 있네? 이상옥이었던가?”

“크헉!”

몸을 피했던 이하영이 이상옥의 복부를 후렸다.

어느새 등에 메고 있던 창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고.

“특별히 넌 내가 직접 처리해 줄게.”

-팡! 파바방!

이하영이 엄청난 속도로 창을 찔러 댔다.

공기가 찢어지고 창날이 뱀처럼 휘어서 들어온다.

반쯤은 본능으로 공격을 피해 냈지만 이상옥의 몸에는 하나둘 상처가 생겨났다.

뒤로 빠지려 하면 들어오고, 몸을 숙이면 기형적으로 각도를 꺾어 쫓아온다.

집요함. 그 안에 든 살의와 분노.

순수 피지컬뿐만 아니라 무기술 자체에서도 밀린다.

이상옥이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숨기려 해도.

“어딜!”

“크윽!”

이하영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흐름을 끊었다.

하나의 벽이 서 있는 느낌에 식은땀을 흘리며 이상옥은 생각했다.

이길 수 없다.

루키는 생각한 것보다 괴물이었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야 다른 동료들이 살 수 있는데!

“제길.”

이상옥의 시야에 들어온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오지혁은 그나마 치고받고 있었으나, 김서균 무리는 김창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중이다.

김소담과 팀원들?

“으아아아!”

“이건 너무하잖아!”

“피해!”

수십 명의 길드원에게 쫓기고 있다.

제대로 된 반격조차 힘든 수준.

고작 셋이서 40명에 가까운 적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

예정된 결말에 이상옥이 이를 악물던 그때.

[밤이 찾아옵니다.]

-스아아아아아

어둠이 찾아왔다.

삽시간에 빛을 잃은 하늘.

-키킥!

-키키키키키!

뒤이어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제가 좀 늦었네요.”

[칭호, 밤을 부르는 자가 발휘됩니다.]

[옵텍터를 소환합니다.]

[밤의 조정을 받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이블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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