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영역에 들어서다
우리는 앞을 바라봤다.
35층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후, 필드에 변화가 생겼다.
-쿠구구궁
[각 보스의 영역이 확장됩니다!]
[살아남으십시오.]
필드 끝에 보이던 빛의 기둥 다섯 개가 동시에 한 차례 빛을 뿜더니 그 범위를 늘려 나갔다.
늘어난 범위에 따라 지형이 변했다.
돌이 솟아오르는가 하면, 땅이 물러져서 가라앉더니 늪지대가 되었고, 신비로운 풀과 나무가 자라나 동산이 되기도 했다.
아직은 그리 넓지 않다.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면 영역 안에 들어갈 일이 없을 정도.
난 그 모습에 집중했다.
찾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세이프 존. 권능을 통해 위치를 파악하려 했지만.
[팀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로 권능 사용이 제한됩니다.]
[일정 거리 안에 접근했을 경우 권능으로 세이프 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에 의해 막혔다.
아무래도 쉽게 가는 방법은 없는 모양.
이럴 때만 깐깐하다.
밸런스를 잡을 거면 저기 단체로 움직이는 대형 길드 놈들이나 조질 것이지.
단합은 전략이고, 권능은 치트다 이건가.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열 내 봤자 나만 손해지. 이길 방법이나 생각해 보자.
난 시스템 알림 로그를 살폈다. 이미 머릿속으로 외우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가장 생존율이 높은 곳은 2구역, 돌산의 은둔자가 있는 곳이에요. 만약 필드 전체가 보스의 영역이 되면 그곳을 노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팀도 같은 생각이겠죠?”
김소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 길드 팀이 우리를 노리고 있기는 하나,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탑을 오르는 것이다.
루키는 대형 길드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훈련시키고 지원해 온 인물.
허무하게 잃을 생각은 없을 게 분명했다.
아마 영역이 필드를 모두 덮기 전에 우리를 해치우고 세이프 존으로 빠지려 들겠지.
“이번 경쟁의 포인트는 두 가지군요.”
검과 방패를 든 김서균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이프 존을 차지할 것, 보스의 영역에서 살아남을 것. 두 가지 모두 연결되어 있죠. 세이프 존을 차지한 후, 그 일대가 보스의 영역이 된다면 안전해질 테니까요.”
맞는 말이다.
단순히 싸우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대형 길드를 모조리 해치워도 우리가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놈들은 놈들대로 보내고,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 의미가 있지.
생각을 잘해야 한다.
생존율이 낮은 영역 주변을 먼저 살피는 건 위험 부담이 크지만 성공만 한다면 별다른 마찰 없이 경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길드 놈들한테 쫓기는 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제한이 걸렸다고는 하나 일정 거리에 들어가면 권능으로 세이프 존을 찾을 수 있으니까.
“대형 길드가 벼르고 있는 이상 무난하게 끝날 가능성은 없죠.”
35층은 참가 팀이 많다.
정확히 몇 명이나 올라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개 팀이 들어왔다고 하니 100명 정도라 생각하면 되겠지.
중요한 건 20개의 팀 중에서 대형 길드 소속이 아닌 팀이 몇 개나 되냐인데.
“오지혁 씨랑 합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영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지혁이 하나의 팀으로 인정받은 건 확실하다.
조금이라도 전력을 올리는 편이 옳은 선택이기는 한데.
‘위치를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게 제일 문제다.
오지혁이 건네준 통신 아티팩트.
아직까지 놈들은 우리가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지속적으로 보고를 나누고 있었다.
-2번 포인트로 움직이겠습니다.
-교전 시 보고 체계 유지하고, 최종 집합 구역까지 올 수 있도록.
-라져.
-2번 보스 영역에 인원 배치합니까?
-3명만 남기고 위험하면 바로 빠져.
-진행하겠습니다.
사실 들어도 그리 도움이 안 됐다.
2번 포인트라고 말하면 누가 알아. 결국에는 알아서 해내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일단 우리도 움직이죠. 세이프 존을 파악하며 이동하다가 오지혁이나 다른 연합 팀을 만나면 합류. 적들을 발견하면 옆으로 우회합시다.”
“좋아요. 무작정 싸워 봤자 우리만 손해니까요.”
“적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이상 포위되면 끝이에요. 인원수에서 너무 차이가 납니다.”
내 말에 팀원들도 동의한다.
나와 고대진이 선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역할이 중요하다. 적보다 빠르게 정찰을 해내야 하므로.
계속해서 달리면서도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좁혀지는 필드, 위험한 영역, 대형 길드와 지원군이 되어 줄 연합 팀.
게릴라전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고, 놈들이 합쳐지기 전에 합류 팀을 찌를 수도 있었다.
시작부터 루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사기를 꺾어 버릴 수도 있고.
그것도 안 된다면…….
‘필드 보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
압도적인 인원 차이.
통신 아티팩트로 쓸 만한 정보는 많이 얻지 못했지만 몇 가지 단서는 얻었다.
상상 이상으로 우리가 있는 35층으로 넘어온 대형 길드 팀이 많다는 것과 루키 팀 세 개 모두 이곳에 있다는 것.
한두 팀은 다른 곳으로 빠지기를 기대했는데…….
“키하아악!”
앞으로 달리던 중, 땅속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다리가 달린 생선같이 생긴 녀석.
겉보기는 우스웠지만.
“크흡!”
무려 3성급에 해당하는 몬스터였다.
앞서가던 고대진이 간발의 차로 놈을 쳐 냈다.
몸통의 반이 아가리인 놈의 이빨은 날카로웠으며, 뭐든 문 것은 씹기도 전에 산성액으로 녹여 버리는 특징을 가졌다.
30층대 초반이었다면 고대진도 주춤했을 거다.
하지만.
-콰지직!
고대진 역시 34층 베팅에 성공하며 스펙 업을 한 상태. 장비는 물론이요, 스텟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
고대진은 침착하게 놈의 아가리에 검을 찔러 넣어 뇌를 부수었다.
외피는 단단하지만 입안은 비교적 물렁한 녀석이 경련하듯 펄떡이더니 축 처진다.
“보스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필드에 몬스터까지 돌아다니네요.”
“탑이 그렇죠.”
별일 아닌 듯 이어진 탐사.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왜 하나도 없는 거지?”
30분이 지난 시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작 30분이라고는 하나 우리의 이동 속도는 상당했다.
못해도 세이프 존 하나는 발견할 줄 알았건만 보이는 건 없었고, 어느새 필드 보스의 영역이 늘어날 시간이 다가왔다.
[필드 보스의 영역이 늘어납니다.]
-쿠구구궁
빛이 번진다.
바닥을 따라 번지는 빛무리.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침식되는 대지는 어느새 우리의 발밑을 지났고.
“모두 긴장하세요! 영역에 들어갔습니다!”
팀원에게 경고하는 타이밍.
[늪지대의 포식자, 자할탄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생존율 65퍼센트]
[조심스럽게 움직이십시오.]
우리가 보스의 영역 안에 들어섰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바로 탈출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든 찰나.
[영역 내에 세이프 존이 생성됩니다.]
중요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세이프 존 생성!
그동안 필드를 돌아다녀도 발견하지 못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영역 내에 만들어지는 거였어.”
이런 악질적인 구성이라니.
[Tip. 35층의 각 영역은 3, 4개의 세이프 존을 가지고 있습니다.]
팁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5개의 영역에 3, 4개의 세이프 존이 존재한다라.
분명 경쟁이 시작될 때 남은 세이프 존은 18개라고 했다.
계산을 해 보면…….
“3개의 영역에는 4개의 세이프 존이, 2개의 영역에는 3개의 세이프 존이 발생한다는 건데.”
“최대 18개 팀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더 적겠네요. 와, 난이도가 왜 이래.”
고대진이 혀를 내두른다.
막말로 생존율 1퍼센트인 영역에 4개의 세이프 존이 생긴다면 18팀이 아니라 14팀만이 살아남을지도 몰랐다.
혹시 모르지. 다른 영역에 들어갔다 전멸하는 팀이 생기면 더 줄어들지.
다시금 느낀다.
사람들이 30층대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절망의 길이라는 것을.
이가 갈릴 지경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래도 우리가 진입한 곳은 생존율이 65퍼센트입니다. 그나마 쉬운 영역이라는 거죠.”
다른 30퍼센트, 40퍼센트 생존율 영역보다는 사정이 낫다.
1퍼센트대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퀘스트를 위해 스스로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진정하자. 퀘스트는 나중에 깨도 되잖아. 일단은 확실한 것부터 하자.
“여기가 영역이라고요?”
“어우, 이렇게 환경이 확 바뀌는 게 말이 되나.”
정찰을 위해 앞서 나가 있던 우리 곁으로 팀원들이 합류한다.
이미 주변은 모두 늪지대가 된 상황.
이끼 낀 나무가 하늘 위로 치솟고, 얼마나 깊을지 알 수 없는 늪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문제는.
-A23팀 늪지대에 진입했습니다. 세이프 존 확인 들어가겠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도록. 세이프 존 확보 후에 빠져나와라.
-라져.
-C09팀도 움직이겠습니다.
-확인.
우리만 이곳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거였다.
두 개 팀.
어느 쪽으로 들어올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투를 하면 필드 보스가 등장할 거예요.”
놈들과 맞붙는 것과 동시에 이름까지 붙은 괴물이 우리를 덮칠 거라는 것.
늪지대의 포식자, 자할탄.
놈은 대체 뭘까. 19층과 29층에서 만났던 지배자처럼 NPC일까.
아니면 우두머리 격의 엘리트 몬스터?
어쩌면 35층에서만 서식하는 특별한 존재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만나는 건 사절인데.
“궤에에에.”
“응?”
어깨에 올라가 있던 덕춘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썩어 문드러진 나무가 쌓인 곳.
-크르르르
그곳에서 한 쌍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 설마 아니겠지?
지지리 운이 없더라도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보스가 나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검을 움켜쥐었다.
내가 굳은 모습을 본 팀원들 역시 덩달아 전투를 준비했고.
긴장감이 절정에 오른 시점.
-콰과과광!
“크라아아악!”
체고 5미터에 달하는 리자드맨이 양손에 도끼를 쥔 채 뛰쳐 나왔다.
[제3영역의 보스 자할탄이 출현합니다!]
“이런 젠장! 뒤로 빠져요!”
불안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니.
팀원들을 뒤로 물리며 앞으로 달렸다.
질퍽한 땅의 촉감.
습한 공기.
-화르륵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굳었다.
[파이어 밤 (A) Lv.7]
[스킬 레벨 업!]
[파이어 밤 (A) Lv.8]
강력한 화기가 전방을 휩쓴다.
레벨이 오르며 상승된 파괴력.
게다가.
[불의 인장이 함께합니다!]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의 속성, 화염이 적용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와 인장.
[버프 다이스 (B) Lv.3]
[4]
[괴조의 함성]
-상대방의 몸과 정신을 위축시킵니다.
적절하게 사용된 버프 다이스의 효과가 스킬에 깃들었고.
[아마겟돈 파편 배지 (A)]
-한 세계를 멸망시킨 운석, 아마겟돈의 미세한 파편이 들어간 배지
-위압감이 서립니다.
-위축된 대상에게 더욱 큰 데미지를 줍니다.
새롭게 얻은 아티팩트가 반응을 보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전장을 휩쓸었다.
* * *
35층, 필드.
-쿠구구구궁
대지를 흔드는 진동에 이동 중이던 남자가 멈춰 섰다.
그를 따르던 4명의 길드원도 소음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같이 고급 장비를 입었지만 팀장의 장비보다는 못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 몬스터의 사체가 즐비했다.
핏불이 흘러내리는 언덕.
“놈이군.”
팀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산군의 루키, 최성모.
그는 저곳에 이블아이가 있음을 직감했다.
저 정도의 폭발, 이블아이가 아니면 낼 수 없었으니까.
“아아, 다 들리나. 나는 늪지대로 간다. 그렇게 알도록.”
품에서 통신 아티팩트를 꺼내 다른 팀들에 보고한 최성모가 몸을 돌렸다.
“너희 팀원만 가게?”
거리를 벌린 채 움직이던 또 다른 팀의 수장이 최성모를 불렀다.
날카로운 눈매.
붉은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장검을, 등에는 창을 부착한 여성.
다성 길드의 루키, 이하영이었다.
그녀를 따르는 팀원의 수는 자그마치 6명.
“혼자면 충분하다.”
“자신감은 좋은데 그러다 발리면 쪽팔린 거 알지?”
이하영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며 말했으나 최성모는 계속 입꼬리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일 없다. 넌 팀원을 이끌고 합류 지점으로 이동해.”
“그래, 그러든지. 위험하면 신호탄 쏘고.”
미련 없이 이하영이 떠난 자리, 최성모가 대도를 뽑았다.
그가 루키가 됐을 때 받은 물건.
[파태산도破太山刀 (AAA)]
-산마저 무너트릴 검
-거력이 함께합니다.
그 위력을 확인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