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영미!
6전 4승 방식.
3 대 3 무승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플레타가 직접 무승부가 발생할 시 전원을 처형시키겠다고 선언했으니까.
좋든 싫든 4번은 승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
“흐음.”
난 미간을 좁히며 경기장을 바라봤다.
첫 번째 경기는 우리의 승리였다.
상대 팀의 인원이 더 많기는 했지만 물량전으로 따지면 김소담은 스페셜 리스트. 무난하게 적들을 해치웠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좋은데.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이후 경기가 진행될수록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출전자는 오지혁.
우리에게 있어 조커 카드와 같은 존재. 그가 가능한 많은 인원을 처리해 줘야 했지만.
“더럽게 구는군.”
그의 상대는 고작 한 명이었다.
어차피 질 게임,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한 것.
승리할 수 있는 건 확실하게 챙기고, 질 경기는 과감히 포기한다.
서로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경기니 당연한 전략이었지만 그렇게 경기를 꾸민 게 팀이 아니라 시합을 주관하는 NPC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유롭게 하늘을 날며 웃고 있는 녀석.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층을 담당하는 NPC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 결과가 보복성 편파 경기로 이어질 줄이야.
“이 정도면 조작 경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따위 짓을!”
팀원들이 분노했지만 바뀌는 건 없다.
난 차분히 스코어를 살폈다.
[스코어]
A팀: 2패
B팀: 2승
오지혁까지 승리하며 우리는 2승을 차지한 상태.
이대로 계속 이기면 좋겠지만.
“크흡! 미안합니다.”
세 번째로 나선 김서균이 패배했다.
34층 필드는 플레타의 능력으로 바뀐 상태.
칼날이나 다를 바 없는 풀이 가득하다. 마약 성분의 꽃이 사람을 홀리고.
독성 안개까지 필드 전역에 펼쳐져 있으니 시야가 제한되는 건 물론이요, 활동량이 많을수록 독에 빠르게 중독된다.
움직임이 많은 근거리 딜러들에게 한없이 불리한 조건.
김서균을 상대로 나온 인원은 3명.
전원 원거리 딜러였다.
“고생했어요. 상성이 나빴던 겁니다.”
난 김서균의 등을 두들겨 줬다.
그는 잘못이 없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기어이 두 명을 처리했으니까.
이렇게 상황을 꾸민 플레타가 문제지.
김서균 다음으로 출전한 이는 고대진.
부디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으으. 역시 안 되네요.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 역시 김서균과 비슷한 패턴으로 지고 말았다.
잡다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역할은 엄연히 정찰.
생존이라면 모를까, 전투력만 따지면 우리 팀 내에서는 가장 약했다.
이걸로 스코어는 A팀 B팀 모두 2승 2패.
남은 인원은 나와 최영미 두 명뿐이다.
흥미진진한 전투에 NPC들이 흥분해 소리 질러 댔지만 난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34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4번의 승리를 차지해야 한다. 무승부는 A팀과 B팀 모두 사망하니 피해야 하고.
저들도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결국에는 나뿐만 아니라 최영미도 승리해야 한다는 건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톱을 깨물고 있는 그녀를 보니 걱정이 앞섰다.
긴장했는지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눈동자는 세차게 떨렸다.
이래서야 제대로 경기를 뛸 수나 있을지 의문.
“어, 어떡하죠? 무조건 제가 이겨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긴장 풀어요.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리 잘난 것도 없고, 적이 몇 명이나 나올지도 모르는데… 봤잖아요. 우리한테 불리한 쪽으로 상대 팀 내보내는 거.”
근거에 기반한 불안감.
팀의 목숨이 자신에게 걸려 있다는 압박감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불안 요소는.
“따지고 보면 30층대 오르면서 제가 한 것도 별로 없어요. 짐만 되는 거 같아서 저는……. 으으! 멍청이! 민폐만 끼치고!”
그동안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고대진은 정찰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저주 내성 스킬북을 발견하기도 했고.
김소담이야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1인분 이상을 해 줬고, 이번 경기에서도 승리하지 않았던가.
그뿐일까. 두 명 모두 33층에서 케이블을 지키며 싸운 이력이 있다.
김서균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사지로 직접 뛰어들어 팀원을 구했으니까.
모두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녀 역시 역할에 충실했지만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
“33층에서도 제대로 된 지원도 못 해 줬어요. 이블아이 씨가 화살에 인챈트까지 해 줬는데.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기력감이 자기 혐오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33층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린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저도 그때 짐만 됐는걸요.”
“무슨 소리예요! 적이 자폭할 때 구해 주셨는데. 환자보다 못하다니, 차라리 제가 없는 편이 팀에 이롭지 않을까요?”
“영미 씨.”
난 가만히 최영미를 바라봤다.
움츠려 있던 그녀가 힐끗 날 바라본다.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다.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자책하지 말아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집중하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화르륵
난 파이어를 사용했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는 그녀에게 턱짓했다.
“춤을 춥시다. 기분 좀 나아질 거예요.”
“…춤이요?”
복잡미묘한 표정.
미친놈 보는 눈빛인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맙시다. 도와주려는 거니까.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든 난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기 뭐 하는 거야?”
“풉! 갑자기 춤을?”
“이벤튼가, 좀 더 해 봐라!”
적팀과 NPC들이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냈다.
플레타 역시 깔깔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녔고.
최영미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뭐 해요. 남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자신만의 길을 걸으면 됩니다.”
손을 휘적거리며 그녀를 부추겼다.
“아, 알았어요!”
눈치를 보던 그녀 역시 손을 흔들며 따라 추기 시작했다.
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동작이었지만.
[칭호, 불과 춤의 화신의 효과!]
-기분이 좋아집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줄어듭니다.
-회복 효과가 상승합니다.
-스텟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정신 보호가 활성화됩니다.
“어? 어어?”
칭호의 효과가 적용되자 눈에 띄게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기분이 좀 나아지죠?”
“네! 긴장이 싹 풀려요!”
밝게 웃는 최영미.
여전히 주변에서는 조롱과 비웃음이 울려 퍼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컨디션이 올라감에 따라 자신감도 상승했으니까.
이내 완전히 의지를 굳힌 그녀가 춤을 멈췄다.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럼요. 경기하면서 제가 말한 것들 기억나죠?”
난 필드 곳곳에 숨겨진 식물들을 가리켰다.
대부분 독초에 유해하기만 한 것들이었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유용한 것들도 있었다.
권능을 통해 확인한 것들이니 확실하다.
앞서 경기를 치른 팀원들한테도 알려 준 내용.
“저기, 붉은 버섯 같은 건 건들면 터져요. 완전히 폭발하는 건 아니고 인화성 포자가 공기 중으로 퍼지죠.”
이어서 가리킨 건 대나무와 비슷한 식물.
“대나무같이 생긴 건 섬각죽閃殼竹. 일정 온도 이상으로 뜨거워지면 빛이 터져 나와요. 섬광탄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위 옆에 붙어 있는 기생 식물을 가리켰다.
“성장 덩굴입니다. 자극하면 급격히 커지면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움켜쥐어요.”
마음 같아서는 더 알려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다.
말해 준다고 전부 기억할 것 같지도 않고.
[탑 생태계에 대한 고찰!]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포인트를 준다는 알림창이 떠올랐지만 무시한 채 최영미의 양어깨를 잡았다.
“힘내요. 상대방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집니다. 흥분한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죠. 영미 씨는 똑똑하니까 잘할 겁니다.”
“고마워요.”
긴장감을 떨쳐 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곧 다섯 번째 경합이 시작된다.
-우우웅
장막이 걷히며 최영미의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강제적인 이동.
장전한 석궁을 움켜쥔 채 움직이던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블아이 씨는 참 신기해요. 어떻게 저런 걸 다 알고 있는지. 같은 층계에 있는데 뭐랄까, 탑에 오래 있었던 느낌? 고인물? 그런 느낌이에요.”
다른 이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나를 바라본다.
몇몇 NPC 역시 나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고.
[소수의 NPC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어떤 NPC는 관심을 가지기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손을 흔들며 그녀를 응원했다.
“팀의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경기! 다섯 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플레타의 선언과 함께 적팀에서도 참가자가 나왔다.
그 수가 무려 다섯.
지금까지 나온 인원 중 가장 많다.
구성도 원거리 딜러와 근거리 딜러 골고루 섞여 있었고.
그냥 지라고 짜 놓은 판이나 다를 바 없는 수준.
-타앗!
먼저 움직인 건 최영미였다.
사격하기 좋은 장소를 선점하기 위함.
최영미가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잎사귀가 몸을 긁어 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 위를 점령.
-두두둑
최영미는 바위에 기생하고 있던 성장 덩굴을 뜯어내 볼트 끝에 달았다.
석궁을 견착하고 조준을 한 그녀 위로 나만이 볼 수 있는 정보가 떠올랐다.
[B급 권능, 명사수가 발휘됩니다!]
[칭호, 백발백중의 효과가 겹칩니다!]
[첫발이 끗발 (A) Lv.6]
-첫 사격 시 반드시 명중
-티잉
그녀의 손가락이 당겨지며 쏘아진 볼트.
볼트는 정확히 그녀를 향해 달려오던 탱커에게 꽂혔고.
[성장 덩굴]
-충격을 받으면 급속 성장합니다.
-콰아아아아!
충격을 받은 덩굴이 삽시간에 거대해졌다.
“뭐, 뭐야!”
“으아아아!”
직격당한 남자는 물론이요, 옆에 있는 사람까지 온몸이 덩굴이 엉켜 묶이고 말았고.
후우.
한 호흡을 쉰 최영미가 연속해서 볼트를 발사했다.
[속사 (C) Lv.10]
[속성 부여 (A) Lv.6]
-화살에 전격이 깃듭니다.
-화살에 냉기가 깃듭니다.
.
.
다양한 효과를 가지고 날아간 화살.
“막아!”
“쉴드! 쉴드 써!”
후방에 빠져 있던 적팀이 베리어를 사용했지만.
-콰아아앙!
최영미의 화살이 더 빨랐다.
스파크를 터트리며 덩굴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감전되었고, 이어진 화살 세례에 부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꾸그그그극!
“으아아악!”
“끄으윽!”
충격을 받을수록 두꺼워진 덩굴이 묶여 있던 사람을 옥죄었다.
압박감에 방어구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으며, 이내 숨을 쉬지 못한 두 도전자가 의식을 잃었다.
이걸로 남은 사람은 셋.
입술을 깨문 최영미가 빠르게 바위 밑으로 뛰어내렸다.
-파바바박!
-카아앙!
-카드드득!
원거리 딜러 세 명이 공격해 온 것.
침착하게 바위 뒤에 은신한 채 화살 개수를 확인하는 최영미.
한 번에 몰아쳤기 때문일까, 여유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으나.
“충분해.”
입가를 한 번 쓸어내린 최영미는 승리를 확신했다.
어떻게 나갈 것인가.
이미 상대 팀은 저격을 마친 상태.
바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일제 사격이 쏟아질 거다.
김서균과 고대진이 당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
비교적 방어구가 가벼운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데미지일 텐데.
꿀꺽.
난 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찌이익
최영미는 파우치를 열었다.
그녀가 쥔 건 검은색 무언가.
[마나 폭탄 (B)]
-마정석으로 제작한 폭탄
[결합 (B) Lv.5]
화살촉에 마정석 폭탄이 결합됐다.
이어서.
-퉁!
최영미가 하늘 위로 석궁을 쐈다.
원래라면 허공으로 날아갔을 테지만.
[타깃 지정 (B) Lv.5]
-폭탄 버섯을 지정합니다!
[첫발이 끗발 (A) Lv.6]
-첫 사격 시 반드시 명중
두 스킬이 합쳐지자 하늘로 치솟던 화살이 크게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폭탄 버섯 군락.
내가 말해 줬던 곳이었고.
[파이어 밤 화살 (C)]
-파이어 밤이 인챈트된 화살
-숙련도가 낮아 C등급으로 고정됩니다.
인챈트 된 화살이 그 군락지에 떨어지는 순간.
-콰아아아앙!
인화성 포자가 사방으로 터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한 번에 몰아치는 열풍.
최영미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리고, 하늘 위로 검은 구름이 솟아오른다.
여기서 끝이냐.
아니.
“으아아!”
폭발이 여파가 지나지 않은 타이밍, 최영미가 바위 옆으로 달렸다.
날카로운 풀에 방어구가 찢기고 선혈이 흘러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적들은 이미 반 그로기 상태.
1명은 그대로 전투 불능이 됐지만 남은 둘은 아직이다.
“저 새끼 죽여!”
“죽어라!”
분노에 차올라 최영미를 향해 스킬과 화살을 남발하는 녀석들.
여전히 폭발은 계속됐고, 허공에는 화살과 마력의 파편이 비산했다.
“크흡!”
어깨에 화살이 박힌 최영미가 바닥을 구른다.
지금 멈추면 안 된다.
이를 악문 그녀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지지직!
간발의 차이로 땅에 직격하는 쇠구슬.
상대팀의 스킬이었다.
-뚜둑!
엎어지다시피 목적지에 도달한 그녀가 대나무를 꺾었다.
섬각죽閃殼竹, 열기에 노출되면 섬광탄처럼 터지는 그것.
석궁을 등 뒤로 돌려 맨 최영미가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냈다.
거대한 장궁.
섬각죽을 화살 삼아 그녀가 시위를 당겼고.
목에 핏대가 서는 타이밍.
-파아아앗!
그녀가 시위를 놓았다.
정확히 적들을 향해 날아가는 섬각죽.
곧장 활을 던지고 석궁을 견착한 그녀가 방아쇠를 당긴다.
장전되어 있는 건 파이어 밤이 인챈트 된 화살.
-파앙!
[물체 가속 (C) Lv.9]
삽시간에 속도가 붙은 화살이 먼저 날아가던 섬각죽을 꿰뚫었고.
-파아아앗!
-삐이이이이!
엄청난 빛과 굉음이 경기장을 덮쳤다.
장막 너머에 있는 우리까지 비틀거릴 수준.
그대로 노출당한 적들은 완전히 정신을 놓았고.
“후우.”
최영미는 마지막 스킬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