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A팀 B팀
하나의 층을 담당하는 NPC의 힘이란 이런 걸까.
34층 경기의 난이도를 높인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경기장 전체가 바뀌었다.
평범한 공터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스으으으으
서늘한 안개가 깔리더니 바닥에서는 잎이 날카로운 풀이 돋아났다.
이상한 색깔의 꽃과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돌덩이와 한없이 밑으로 꺼져 버린 땅.
더 이상 경기장이라고 부르기 힘든 마경이 되었다.
“으읍! 이거 독인데요?”
가장 먼저 이상을 눈치챈 건 고대진.
그가 입을 막는 것과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독 내성 (C) Lv.2]
경기장 전반에 깔린 안개는 독 구름이었으며.
“이런 미친, 배틀 슈트가?”
잡초인 줄 알았던 풀에는 방어구를 찢을 정도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어라? 뭔가 냄새가 좋지 않아요?”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 최영미가 홀린 듯 꽃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지만.
“정신 차리세요!”
“어엇! 고, 고마워요. 저도 모르게.”
다행히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녀를 유혹한 향기는 수풀 사이에 피어난 꽃에서 났다.
[꼬드김 꽃]
-강력한 환각 효과가 있습니다.
-냄새를 맡은 대상을 끌어들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 중독되면 사망합니다.
-48층 이후 구역부터 서식합니다.
나 역시 처음 보는 식물이었지만 권능 덕분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48층 이후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식물. 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이렇게 진화한 것일까. 상식적이지 않다.
게다가 어느 쪽이든 30층대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놈이다.
꽃뿐만이 아니다.
[칠도초七刀草]
-일곱 개의 날카로운 잎사귀를 가진 식물.
-빠르게 마찰할수록 절삭력이 올라갑니다.
-45층 이후 구역에서 서식합니다.
누군가의 슈트를 잘라 낸 풀 역시 40층 중반대부터 나오는 식물이었으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식물만 해도 이 정도다.
필드 곳곳에는 아직 본 적 없는 해괴한 식물들이 가득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모든 식물이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
[이슬망초]
-산뜻한 향기!
-열매를 씹으면 오염된 공기를 정화합니다.
[아지랑이풀]
-뜨끈한 온기
-활력이 돕니다.
-화기 내성 D등급 이하 섭취 불가
[천수과千手果]
-열심히 먹다 보면 민첩이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독 내성 D등급 이하 섭취 시 사망
이로운 효과를 주는 것도 있었고, 영약이나 다를 바 없는 과일도 존재했다.
그리고 한 가지 위로가 될 만한 소식이 있다면 필드 어디에도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난 침을 삼켰다.
‘몬스터가 없는데도 이 정도라니. 상위층은 환경 자체가 지옥이군.’
당장 40층대에 등장하는 식물들만 해도 이 모양인데 50층, 60층, 그 이후에는 어떨까.
식물을 떠나서 몬스터는?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지형과 자연재해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고민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이곳에 집중해야 한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제 취향대로 한번 만들어 봤는데.”
플레타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말했다.
취향 한번 지독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닫았다.
그녀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
아무래도 내가 중얼거린 걸 들어서인 것 같다.
권능을 통해 보지 않았던가. 유쾌하지만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배반자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있어 금기였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받아 주려나.’
“그에에.”
덕춘이가 툭툭, 내 어깨를 두드린다.
마치 되겠냐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 후회해도 늦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어쩌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팀들도 곤란스러워하니까.
“난이도가 너무 뛴 거 아닌가?”
“재밌기는 하겠군.”
“재미는, 저러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을 거 같은데.”
“그래도 중간중간 괜찮은 것들도 섞어 놨네. 이 정도면 괜찮지.”
“이제 막 34층에 올라온 놈들이 뭘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만.”
NPC들도 갑작스러운 난이도 상승에 의문을 제시했지만 크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좀 힘들겠네. 안 됐다.’ 따위의 말을 내뱉을 뿐.
사람들과 NPC가 플레타를 바라본다.
“원래라면 전투 피구나 족구 같은 거로 스타트를 끊으려고 했는데 다들 워어어낙 실력이 좋아 보여서 말이죠.”
뻔뻔하게 멘트를 날리는 녀석.
고까웠지만 참았다. 여기서 성질을 더 긁어 봤자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자아. 경기하기 전에 각 팀 소개 먼저 하죠!”
그녀가 손을 흔들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총 여덟 개. 34층에 올라온 팀 전원이 보인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숫자?”
“저게 뭐예요?”
팀별로 나뉜 화면 아래에는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다는 것.
1번 팀은 4명. 4,750점.
2번 팀은 5명. 6,643점.
무소속인 3번 팀은 5명. 4,410점.
이런 식이었는데.
“각 팀의 전투력을 측정한 점수입니다! 관람객분들은 주의 깊게 살펴 주세요!”
플레타의 설명을 듣자니 종합 전투력을 뜻하는 것 같았다.
화면에 비친 사람마다 숫자가 달려 있다.
개인의 역량에 따라 갈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한 사람당 1,000점에서 1,200점 사이로 측정된 것 같았다.
무소속 팀원들은 비교적 점수가 낮은 편.
난 빠르게 다른 팀을 훑었다. 적의 수준을 알면 공략하기 더 쉬워지니까.
“오지혁이 남다르긴 하네.”
홀로 떨어져 있는 오지혁의 점수를 본 난 감탄했다.
4,395점.
과연 대형 길드의 세미 루키답달까.
이제는 길드와 인연을 끊었지만 어쨌든. 평범한 이들보다 족히 4배는 강한 전력이다.
혼자임에도 다른 팀에 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오오오오!”
“이번에 진짜 대단한 놈이 들어왔구먼.”
“난이도 올릴 만했네. 이건 인정이지.”
NPC들 역시 놀랐는지 소리를 높였다.
나도 작게 박수를 치던 와중.
“이, 이블아이 씨.”
“예?”
“저거. 저거 좀 봐 보세요!”
말을 더듬던 김소담이 우리 위에 있는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순순히 고개를 올리자 나와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어라?”
[7번 팀]
-전투력 점수: 18,480점.
다른 팀들과는 차원이 다른 점수가 적혀 있었다.
18,000?
처음으로 만의 자리 숫자가 나왔다.
고대진이 1,780점.
김서균이 1,945점.
최영미가 1,834점.
김소담이 2,171점.
그리고 내가.
“10,750점?
우리 팀원들 역시 남들보다 높은 점수가 나왔지만 팀원 전체를 합쳐도 내 점수보다는 낮았다.
사실상 규격 외의 전투력.
흥분한 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진짜 미쳤네요!”
“강한지는 알았지만 수치화된 거로 보니까 기분이 또 다른걸요.”
“맞네. 32층에서도 이블아이 씨 혼자서 다 때려잡았잖아요.”
“난 언제 저렇게 돼 보지.”
오지혁보다 두 배 이상 강한 전력.
주변을 돌아보니 NPC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지혁이 아니라 나한테 감탄했던 것.
분명 좋은 일인데 왤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주먹을 쥘 때, 플레타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거, 이거. 팀의 밸런스가 너어어무 안 맞는다, 그쵸? 이러면 제대로 된 경기를 할 수가 없어요.”
아뇨. 잘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속으로 외쳤기에 그녀가 들을 리는 없었고.
“해서, 이번 경기는 특별하게 매치업을 하도록 하죠!”
[팀이 변동됩니다!]
[최약체 팀과 최강체 팀이 하나로 묶입니다!]
-구구구궁!
우리와 오지혁을 나누고 있던 장막이 사라졌다.
다른 팀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1, 2, 3, 4, 5, 6번 팀이 A팀으로 통합됩니다.]
[7, 8번 팀이 B팀으로 통합됩니다.]
“자! 이러면 밸런스가 좀 맞죠?”
[A팀]
-총원 30명
-전투력 점수: 28,917점
[B팀]
-총원 6명
-전투력 점수: 22,875점
“조건은 똑같습니다. 최하위 팀은 탈락, 사망하게 됩니다.”
히쭉. 플레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A팀과 B팀. 어느 쪽이 살아남을까요?”
이런 속셈이었나!
플레타가 내게 적의를 가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일 줄이야.
전력도 전력이지만 인원수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사실상 말이 안 되는 조치였지만.
“이제 좀 신이 나는구만!”
“오래간만에 재밌는 걸 보겠어!”
NPC들은 환호성을 지를 뿐이었고.
“자, 베팅 들어갑니다. 관람객 여러분, 승리할 팀을 골라 주세요. 포인트와 아이템, 그에 준하는 귀물.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경기의 재미는 역시 도박! 한번 즐겨 보자고요!”
플레타의 말에 NPC 모두가 빛을 내뿜었다.
저마다 베팅에 걸 물건들을 걸고 있다.
목록 창이 빠르게 올라간다.
스킬북, 포인트, 영약, 무기, 방어구, 아티팩트 등등.
종류도 다양해 눈이 돌아갈 지경.
“어이, A팀! 나 많이 걸었으니까 꼭 이기라고!”
“B팀, 보여 줘! 대박 한번 나자!”
“웃기고 있네. 당연히 A팀이 이기지.”
“A팀, 못 이기면 나한테 죽어! 알았어?”
뜨겁게 달아오르는 분위기.
그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나 너한테 전 재산 걸었어! 내 목숨 맡긴 거라고! 죽어도 이겨! 이겨 달라고오오!”
“후우. 그러지 말라니까. 뭐, 나도 많이 걸었지만.”
핥던 사탕을 휘두르며 날 응원하는 릴카와 작게 한숨을 쉬는 킬더레스.
“저도 간소하게나마 가게를 걸었어요. 파이팅!”
아무렇지도 않게 미친 소리를 하는 벨라.
“너 지면 나 얼굴 못 들고 다닌다! 무슨 뜻인지 알지!”
“힘내세요!”
날 계승자로 삼은 알리오스와 페니 역시 내가 속한 B팀에 베팅한 모양이었다.
저편에 보이는 19층의 지배자와 29층의 지배자도 마찬가진지 내 쪽을 향해 열혈이 손을 흔들고 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플레타가 빛을 터트렸다.
한순간에 입을 다문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본다.
“우리끼리만 즐기면 너무하죠? 베팅한 상품의 1퍼센트는 우승팀에게 돌아갑니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날 노려보는 플레타.
“어때요. 의욕이 좀 생기나요? 발버둥 쳐 보세요.”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
난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귀엽게 나오네, 이 녀석.
본인은 절대 내가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의욕이 생기냐고?”
사람 잘못 봤다.
이따위 수작질에 당할 내가 아니다.
당당히 고개를 세웠고.
“우승 가져가마.”
NPC들이 베팅한 상품 목록을 가리켰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환호성.
피식 웃은 그녀가 박수를 쳤다.
-짜악
“팔팔해서 좋네요. 부디 그 기세가 계속되기를. 그럼 경기 시작합니다!”
[34층의 시합 종목이 정해집니다.]
[6전 4승, 파이트]
[인원수가 맞지 않습니다.]
[담당자의 재량에 따라 인원수와 출전 순서가 정해집니다.]
[조현수 님은 6번째 차례입니다.]
-우우우웅!
알람이 떠오르며 장막이 걷힌다.
가장 먼저 필드로 나간 팀원은 김소담.
[A팀 출전]
-2명
[B팀 출전]
-1명
“전투 불능, 항복 시 시합이 종료됩니다! 이번에는 트윽별히 시합 중에는 죽어도 사망으로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플레타가 날개를 퍼덕이며 싱긋 웃었다.
“어차피 지는 팀은 죽을 거잖아요? 결과를 기다리는 걸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죠. 참고로 3:3 무승부가 나올 시 전원 사망입니다.”
플레타가 천천히 손을 올린다.
긴장되는 순간.
“그럼, 파이트!”
그녀의 손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김소담이 인벤토리에서 쇳덩이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