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34층
오지혁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다.
그는 대형 길드의 루키. 그중에서도 산군의 루키인 최성모를 꺾고 싶다고 했다.
다만 그의 곁에는 다성과 이클립스의 루키인 이하영과 김창후가 이끄는 팀도 함께 존재한다.
아무리 그라도 혼자서 상대하는 건 불가능.
그렇기에 내 도움이 필요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덤비는 게 더 가능성 있었으니까.
나야 좋은 이야기.
어차피 놈들과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우두머리 격인 루키들을 처리해야 한다.
“최성모는 더 이상 코인이 없다. 이하영도 마찬가지고. 김창후는 하나 더 있다는 것 같은데 정확히 알려진 게 없지.”
그가 고급 정보를 꺼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코인의 양이 다르고, 모든 코인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안전지대에서 부활해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지.
오지혁의 말대로라면 최성모와 김창후는 이번에 없애면 끝이라는 건데.
“김창후도 신경 쓸 건 없어. 나머지 루키들이 죽으면 자연스레 이번 일은 끝나. 안전지대에 있든 탑을 오르든 수많은 사람의 공격을 받을 테니까.”
당연한 말이다. 그들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여론도 돌아섰고, 30층보다 높은 곳에서 벼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안전지대에서 부활하더라도 등반길이 순탄치는 않을 거라는 말.
어쩌면 탈모맨이 나서서 처치할 수도 있고.
그의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33층은 클리어한 상황. 안전 구역에 모여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루키들이 34층에 머무는 건 알겠지? 그곳에 있다 네놈이나 탈모맨, 정수리 핥짝 등이 34층을 클리어하면 35층으로 넘어가 몰살할 거다.”
“어쩐지 안 올라가고 버틴다 했더니 우리가 목적이었나.”
“특히 너 같은 네임드는 말이지.”
오지혁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팀원들을 살핀다.
묘하게 살벌한 눈빛에 긴장하는 팀원들. 직접 그의 무력을 목도한 이들은 더 경계를 했다.
“이 중에도 있군. 김소담, 고대진. 이 둘도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제, 제가요?”
“아니, 나는 왜?”
김소담이야 그렇다 치지만 고대진은 의외인데.
“왜냐니. 미궁 지도를 업데이트해 놓고 눈에 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미궁이라면?”
“28층 던전이요?”
“나 봤어. 공듀 님이 올린 지도에 추가 설명이랑 최단 루트랑 세이프 루트 표시한 게시글.”
“엥? 그게 너였다고?”
오지혁의 말에 다들 놀랐다.
나야 잘 모르는 이야기라 가만히 있었지만.
“그럼 트랩 헌터가 너야?”
최영미가 거의 멱살 잡고 흔들 기세로 물었고.
“으으. 나 맞아. 이거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바로 들켰네. 대형 길드가 무섭긴 하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뮤니티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모양.
부럽다.
‘나도 그냥 평범하게 닉네임 지을걸.’
보아라.
닉네임이 까발려졌는데도 허허 웃으며 넘기는 태연함을.
가슴 한쪽이 욱신거린다.
어쩌겠나. 내 업보인데.
50층대에서 탈모맨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는 진짜 어쩌냐.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오지혁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 가지 더 알려 줄 게 있다. 어제 대형 길드에서 무전 아티팩트를 팀장들에게 보급했지. 같은 필드에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거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층에 올라가자마자 길드 팀끼리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다들 안다. 길드 팀이 뭉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앞으로의 여정은 더욱 힘들어질 거다.
“내 채널은 막혀서 쓸 수 없어. 대신 이걸 주마.”
오지혁이 주섬주섬 두 개의 무전 아티팩트를 꺼냈다.
“내가 죽인 놈들이 가지고 있던 거다. 운이 좋다면 통신을 엿들을 수도 있겠지.”
하얀 조약돌같이 생긴 물건.
나와 김소담이 나누어 가졌다.
최영미는 석궁을, 김서균은 검과 방패를, 고대진은 나이프와 검을 사용한다.
비교적 손이 여유로운 건 나와 김소담이라 반대는 없었다.
“위층에 대한 정보는 없어? 어떤 과제가 나오는지.”
살짝 기대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도 쓸모없을 거야. 어차피 놈들은 공략보다는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한 가지 쓸 만한 내용이 있다면 35층에서 팀을 새로 구할 수 있다는 것 정도. 낙오자가 발생한 팀이 팀원을 모을 수 있는 기회지.”
그렇단 말이지.
오지혁 이 녀석, 의외로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대형 길드와 척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걸까. 유독 같은 길드의 루키 최성모에게 적대적인 것 같은데.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는 않아서.
“떠들 만큼 떠들었으니 움직이지. 34층을 공략하면 다음은 루키야.”
그가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탈을 넘어가는 그를 바라보던 팀원들이 날 부축했고.
“저 사람 믿을 수 있는 건가요? 좀 위험해 보이는데.”
“아까 싸우는 거 봤어요? 어우, 장난 아니었어요.”
우려 섞인 말을 내뱉었다.
오지혁이 믿음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 성격도 거친 편이고.
“당장은 믿을 수 있을 겁니다, 놈도 원하는 게 있으니. 우리도 올라가죠.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다른 사람들이 고생합니다.”
우리가 먼저 가서 정리를 해 둬야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편해지지.
대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탈모맨이 30층에서 고생한 게 있는데 올라올 때는 좀 편해야 하지 않겠어?’
30층에 머물고 있는 탈모맨을 위해서다.
연합 사람들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더 이상 놈들에게 쫓기기 싫어 매듭짓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떤 모양이든 40층을 넘어가기 전에 마무리되겠지.
[34층에 진입합니다.]
[경쟁 팀이 존재합니다.]
[대기 시간 없이 이동합니다.]
-우우우웅
포탈을 넘는 순간 몸에 힘이 돌아왔다.
갑자기 힘이 넘치는 기분.
꾸득, 주먹을 쥐었고.
-파아아앗!
빛이 터지며 시야가 돌아왔을 때는.
[34층]
[팀 경기가 진행됩니다.]
[최하위 팀은 탈락합니다.]
-와아아아아!
거대한 경기장이 펼쳐졌다.
축구장 서너 개는 합친 듯한 크기.
귀가 터지게 들리는 환호성.
[총 8개 팀이 출전합니다.]
[조현수 님의 팀은 7번입니다.]
장막으로 나뉜 공간에는 우리를 포함한 여덟 개의 팀이 존재했다.
빠르게 어느 소속인지 살핀 결과 내가 있는 7번 팀과 오지혁 홀로 차지한 8번 팀, 3번 팀인 무소속 팀을 제외하면 모두 대형 길드 팀이다.
살벌하게 우리를 노려보는 녀석들.
전혀 무섭지 않았다.
“여기 경기장 같은데요?”
“진짜로요.”
“느낌은 다른데 10층 투기장 이벤트 했을 때랑 비슷한 것도 같고.”
팀원들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동안의 팀 과제와는 성질이 다르다.
서로 경쟁하는 건 똑같았지만, 직접적인 전투가 아니라 경기를 통해 승패가 갈리는 거였으니까.
탑이 짐작하기 힘든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그 자체로도 놀라웠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건.
“관객 전원이 NPC야.”
“궤에에에.”
경기장을 메운 관중 중에 등반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원 파랗게 빛나는 심장을 지닌 NPC들.
그 수가 어림잡아도 수백은 넘어 보였고.
“어? 쟤가 왜 저기 있어.”
심지어 아는 얼굴까지 있었다.
한 명? 아니, 꽤 많다.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팝콘을 뜯고 있는 알리오스와 페니.
그 앞에는 귀를 흔들며 사탕을 핥아 먹는 릴카가 있었고, 옆에 앉아 있는 킬더레스는 나를 발견했는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댔다.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는 벨라는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공간에는.
“19층의 지배자와 29층의 지배자.”
얼음과 불의 신전, 두 기둥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화해했는지 꽤 친밀한 모습이었는데.
은근슬쩍 어깨에 팔을 두르려는 휴고의 손을 쳐 내는 걸 보니 완전히 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와, NPC가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건 처음 봐요.”
감탄한 김소담의 말에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30층까지 올라오며 인연이 생긴 NPC가 한두 명은 있겠지.
몇몇 사람이 관중석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댄다.
약간은 들뜬 분위기.
삭막하던 다른 층과는 대비되는 모습에 긴장감이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들 정신 차려요. 34층은 연합 사람들이 괴멸되다시피 한 층입니다.”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대형 길드가 이끄는 팀이 33층과 34층에서 다른 팀들을 괴멸에 가까운 수준으로 밀어 버렸다는 것을.
이곳은 탑이다.
경기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정상적인 스포츠 따위를 할 리는 없다는 걸.
내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김소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대진이야 느슨한 성격이라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지만, 최영미는 미간을 찌푸렸고, 김서균은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다들 반갑습니다!”
-사아아악!
혼란스러운 와중, 허공에서 NPC 한 명이 등장했다.
순백의 드레스에 하얀 날개를 펼친 여인.
“모두 탑을 오르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그녀가 손을 펼쳤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빛.
[빛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피로가 사라집니다.
-부상이 치유됩니다.
-정신이 또렷해집니다.
“오오!”
“뭐야. 이런 것도 있어?”
한순간에 컨디션이 상승한 팀원들이 두 손을 바라본다.
나 역시 마찬가지.
33층을 벗어나며 힘이 돌아왔지만 약간은 피로하던 게 사실이었는데.
“어디 요양이라도 하다 온 것 같은데.”
“그에에.”
덕춘이도 기분이 좋은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개구리 주제에 별걸 다 하네.
픽 웃으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NPC를 바라봤다.
눈에 집중하며 권능을 발휘했다.
[플레타 - NPC]
-34층 담당 NPC.
-유쾌한 친구!
-선만 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친절합니다.
역시나 별다른 정보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NPC를 살필 정도는 아니라는 거겠지.
평범하다면 평범한 설명이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으니.
“플레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녀의 이름이었다.
난 입술을 씹으며 고민했고.
“아! 배반자.”
곧 어렴풋한 기억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검.
[타락한 천사의 검 (A)]
-천족의 배반자 플레타가 천계의 경계를 끊을 때 사용한 검.
-중죄를 지은 그는 영원한 미궁에 갇혔으나 4년 뒤, 영원한 미궁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죄수로 기록되었습니다.
-경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원래 소유자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천족. 그것도 배반자.
그녀의 정보를 직접 읽을 수는 없었으나 관련된 아이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는 있었고.
“흐음?”
빙긋 웃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섬뜩한 감각이 몸을 관통한다.
처음 알리오스를 상대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등 뒤로 식은땀이 쏟아지는 타이밍.
“재밌는 친구가 있네요. 이번 시합은 기대됩니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플레타가 담당 NPC의 권한을 사용합니다!]
[시합의 난이도가 올라갑니다!]
“이번 경기는 좀 하드 하게 가도 되겠지요?”
무대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