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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31화 (131/740)

131화 31층

팀은 갖춰졌다. 역할도 정해졌으며 등반을 위한 준비도 마무리됐으니 남은 건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것뿐.

30층 안전지대의 동쪽, 포탈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식 들었어요? 대형 길드에서 전면전을 펼칠 수도 있다는 거?”

거리를 걸으며 입을 여는 김소담.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준석이 꽤 고생하는 것 같던데요.”

“회장님을 아세요?”

“대충 압니다.”

모를 수가 있나. 나랑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사인데. 정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어떤 사람이려나, 내가 아는 거라고는 대형 길드를 죽도록 싫어한다는 것밖에 없는데.

“소담 씨는 이준석을 만난 적이 있나요?”

“아뇨. 타이밍이 안 맞아서 직접 마주친 적은 없어요.”

하기야 이준석도 나만큼이나 각 층을 뒤지고 다닌다.

형이 대형 길드 1위인 구룡의 루키였고, 많은 비밀을 알려줬으니까.

지금은 어디까지 올라왔을까.

언제 한번 만나고 싶은데.

녀석과 할 말이 많다. 어째서 연합 이름을 그따위로 정했는지, 왜 하필 연합의 상징이 참새인지. 자유의 의미면 콘도르도 있고 많잖아!

뿌득.

나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이블아이 씨?”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형 길드를 생각하니까 열불이 나서요.”

“그쵸?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한다니까요. 탑이 지네들 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맞는 말입니다. 이건 독재예요.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들을 핍박하다니.”

“아주 혼쭐내 줍시다! 언제까지고 그들 밑에 있을 수는 없죠.”

다들 쌓인 게 많았는지 목소리를 낸다.

그들을 뭉치게 하는 힘. 쁘띠공듀라는 상징적 존재가 있기도 했지만, 대형 길드라는 공통된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 대형 길드와의 대립이 끝나면 어떻게 되려나.

그때도 지금과 같은 단합력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아직 먼 이야기다. 벌써부터 걱정할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뭐라도 된 것처럼 이들을 지휘하는 것도 웃기다.

“도착했습니다.”

잡담을 하며 걷는 것도 잠시.

어느새 포탈 앞에 도달했고, 세 진영으로 나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좌측에는 대형 길드의 팀이, 우측에는 연합 사람들이 있었고, 중앙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율은 비슷하다.

“대형 길드도 진입하기 시작하네요.”

김소담이 속삭였다.

“저쪽에서 통지한 일주일이 오늘까지잖아요. 내일부터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맞아요. 그래서 우리도 오늘부터 위로 올라가기로 했죠. 가서 싹 쓸고 옵시다!”

내 말에 순한 얼굴의 사내가 대답했다.

고대진이었나, 정찰 역할을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30층을 오르면서 함께 일할 만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좋겠지.

“대진 씨는 힘이 넘치네요.”

“파이팅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잖아요.”

씨익 웃는 고대진.

하긴 맞는 말이다. 성격이 긍정적인 것도 탑에서는 큰 강점이다.

스스로 좀먹어 봤자 죽을 확률만 높아지지.

“파이팅도 넘치고 말도 넘치고. 조심해요, 옆에 있으면 귀에서 피날 수도 있어요.”

슬쩍 다가온 여인, 최영미가 충고했다.

귀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이미 당했나 본데.

“에헤이, 은근히 즐기면서.”

“나 아니면 다들 못 들은 척하니까 들어 준 거거든?”

“응? 정말로?”

고대진이 팀원들을 둘러봤지만 다들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운다.

최영미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쳤다.

“정찰하면서도 그러면 큰일 난다? 몬스터 다 쫓아와.”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문제 생기면 나 한 대 때려!”

“이블아이 씨, 들었죠? 막 가서도 떠들면 그냥 뒤통수 쳐서 기절시켜요.”

“생각해 보죠. 우리도 들어갑시다.”

투닥거리는 둘을 말리고 포탈 앞에 섰다.

우리 앞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다 들어간 상황.

한쪽에 서서 우리를 노려보는 대형 길드원들이 꺼림칙했지만 무시했다.

마찰은 예고된 상황. 주눅 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사실 덤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우우우우웅

포탈이 발동된다.

시야를 뒤덮는 순백의 빛.

묘한 부유감과 함께 우리는 31층으로 이동했다.

[31층]

[31-39층은 팀플레이 구간입니다.]

[각자의 팀원을 믿고 위로 향하세요.]

알림과 함께 펼쳐진 공간에 우리는 감탄했다.

“멋지네.”

근거리 딜러이자 탱커인 김서균이 나직이 말했다.

다들 동의하는지 필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속으로 놀라고 있었고.

[31층]

[장애물 달리기]

-결승점에 도달하세요.

-결승전에 들어올 수 있는 팀은 다섯 팀입니다.

-탈락 팀은 사망합니다.

클리어 조건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곳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31층으로 넘어온 사람들.

총 여섯 개의 팀.

각 팀 위로 번호가 적혀 있다.

내가 속한 팀은 5번.

‘5, 6번은 쁘찡 연합. 2, 3, 4팀이 대형 길드. 1번 팀은 무소속이군.’

경치를 감상하던 이들이 경계심을 끌어 올리며 서로를 노려봤다.

이곳은 탑.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

“여섯 팀 중 한 팀은 무조건 탈락이라… 30층을 좌절의 길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네요.”

“그것도 고작해야 31층인데 말이죠.”

팀원들 역시 각자의 무기를 꺼내며 긴장했다.

동의하는 바다. 개인의 역량과 관계없이 팀이 실패하면 모두가 탈락한다.

-구그그그그

저 멀리 산꼭대기에 빛이 내려앉는다.

결승점. 저곳이 목표인가.

빠르게 지형을 살폈다.

시작 지점은 숲, 이어서 기암괴석이 가득한 돌산이 펼쳐졌고, 그곳을 넘으면 결승전이 있는 산이었다.

총 3구역으로 나뉜 필드.

[위치가 임의 조정됩니다.]

-파아앗!

메시지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공간이 바뀌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숲의 한복판. 어디로 떨어진 건지 가늠조차 안 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울음소리.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 떼.

날카로운 가시를 내민 덩굴.

[출발.]

그 위로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고대진이 앞으로 나섰다.

정찰.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운으로 이곳까지 올라온 건 아니라는 건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팀원들이 대형을 이루었고.

“위치 먼저 파악하도록 하죠.”

나 역시 움직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운이 좋다면 숲 구간을 빠르게 통과할 수도 있겠지.

-파앙!

땅을 박차고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파이어 밤을 터트려 위로 올라갔겠지만.

“우리 위치가 들키면 안 되지.”

같이 넘어온 팀 모두가 경쟁자다.

31층의 클리어 조건은 결승전을 넘는 것.

어떤 방식으로 통과하라는 말은 없었다.

상대 팀을 공격하는 것도, 함정을 파는 것도 모두 허용된다는 말.

폭발을 일으키면 소리가 날 것이고, 우리의 위치가 그대로 노출된다.

싸우더라도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괜한 체력 소모는 낭비다. 아직 올라가야 할 층이 많다.

만에 하나 팀원 중 탈락자가 나오면 그것도 문제고.

그러니 조용히 해결하는 수밖에.

[안개 질주 (A) Lv.1]

-수화아아악!

난 안개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

빠르게 끝내야 한다. 안개화가 유지되는 시간은 짧으니까.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를 뚫고 올라섰다.

사방을 훑었다. 인지 능력이 향상되며 주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활하게 펼쳐진 숲. 이어 드러난 암석 지대. 서쪽으로 가야 하는군.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아슬아슬하게 나무 밑으로 내려오는 타이밍에 안개 질주가 끝났다.

사뿐히 땅에 착지한 난 왼쪽을 가리켰다.

“좌측으로 가야 합니다.”

“오오! 역시 이블아이. 방향은 정해졌네요!”

“움직입시다!”

곧장 방향을 트는 팀원들.

누구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 믿는다는 거겠지.

마음에 든다. 괜한 걸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서.

툭. 내 어깨를 친 고대진이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를 세운다.

“덕분에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겠네요.”

“할 거면 1등이 좋으니까요.”

30층은 팀전인 동시에 경쟁전.

그동안의 탑을 오르면서 느낀바, 1등으로 결승전에 진입한 자들에게는 특별한 보상을 줄 가능성이 컸다.

“제가 우측으로 돌게요, 이블아이 씨가 좌측을 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파앗.

고대진이 오른쪽 수풀로 몸을 던진다.

움직임이 가볍고 빠르다. 소음도 거의 나지 않고.

나 역시 좌측으로 빠졌다. 정찰조 역할을 맡은 만큼 위험을 미리 감지할 필요가 있다.

따로 은신 능력이나 추적 능력은 없지만 피지컬 자체는 최상위권.

가능한 가볍게 땅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팀원들의 위치를 놓치지 않는 건 기본.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도 생각해야 한다.

미지의 공간을 뚫고 가야 한다는 불안감.

실수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이들까지 위험에 처한다는 책임감.

사람들이 왜 정찰 역할을 꺼리는지 알 것 같다.

다만 탑에 있다 보니 변태가 된 건가. 간질거리는 긴장감이 묘하게 기분 좋다.

감각도 예리하게 살아나고.

-서걱!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뱀의 목을 잘랐다.

반쯤 반사적인 움직임. 알리오스의 계승자가 되면서 검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좋은 소식이었지만 바닥에 꿈틀거리는 몬스터를 보니 마냥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31층부터 3성급이 등장한다라.”

대략 2미터 정도의 몸체. 굵기는 가늘지만 외피는 단단했고, 길게 튀어나온 송곳니는 흉악했다.

그뿐일까.

[석화가 진행됩니다.]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석화 디버프가 적용되었다.

빠득.

망설임 없이 놈의 머리통을 밟아 부쉈다.

3성급 몬스터, 그린 메두사.

5성급 몬스터인 메두사의 머리에 기생하는 놈이다.

약간이지만 메두사의 석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 짜증 나는 몬스터 중 하나로 분류되는데.

“이거 잘하면 나도 고생하겠다.”

“그에에.”

아직 나는 저주에 면역력이 없다.

그나마 스펙이 받쳐 주니 어느 정도 버티기는 할 테지만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목이 잘린 후에도 이 정도 저주면, 멀쩡할 때 눈이 마주치면 잠깐이라도 몸이 굳을 텐데.

목숨이 달린 전투에서는 잠깐의 버벅거림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쯤에서 돌아가자.

그린 메두사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난 팀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고.

-콰아아아앙!

저 멀리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땅을 타고 울리는 진동. 아주 먼 거리는 아니다.

3성급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숲에 경쟁팀까지 있다라…….

“이번 층도 쉽게 가기는 글렀군.”

소리가 들린 곳을 기억해 두며 발을 박찼다.

서두른 덕분일까. 팀원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폭발음을 들은 건 다들 마찬가지인지 진형을 유지한 채 경계를 하고 있다.

“이블아이 씨!”

내게 향했던 무기가 내려간다.

빠르게 알아낸 정보를 말했다.

“폭발음이 들린 건 서쪽입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랑 같아요.”

“다른 팀이 있는 거겠죠?”

“그럴 겁니다. 정찰 결과 3성급 몬스터 그린 메두사가 있었어요.”

그린 메두사라는 말에 팀원들이 긴장한다.

이들 모두 3성급 몬스터는 충분히 잡을 실력이 될 테지만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는 조심하는 게 답이니까.

“대진 씨는요?”

“아직 안 왔어요.”

설마 그린 메두사한테 당했나?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좋지 않은데.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팀원 한 명이 홀로 떨어져 있다면 포로가 될 수도 있다.

아니. 그 전에 몬스터한테 죽을 수도 있고.

몬스터를 사냥하면 소음이 발생할 것이고, 이미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대팀은 이쪽으로 올 게 뻔했다.

왜냐.

‘그나마 전력이 유지될 때 다른 팀을 공격해야 생존 확률이 높아.’

한 팀만 무력화시키면 31층을 쉽게 클리어할 수 있다.

가장 늦게 오는 팀이 탈락할 테니까.

선택해야 한다. 정찰 나간 고대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적들의 동선을 파악할지. 아니면 고대진을 찾으러 움직일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대진 씨를 찾으러 갑시다.”

내가 입을 열었다.

시작부터 팀원을 잃을 수는 없다.

적들과 싸우더라도 이길 자신도 있고.

팀원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가죠.”

근거리 딜러를 맡은 김서균이 검과 방패를 들며 고대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을 옮겼고.

-부스럭

“어우. 저쪽에 뭔 일 있나 본대요?”

수풀 사이로 고대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새 위장을 했는지 머리와 옷은 나뭇잎으로 가득하다.

그 태연한 모습에 최영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된 줄 알았잖아!”

“왜 화를 내고 그러냐. 몸 성히 왔구만.”

어깨를 으쓱이는 고대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가방을 열었다.

“선물까지 챙겨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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