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구면이 있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추위에 떨던 것도 예전 이야기. 하루가 지난 지금은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땅을 파고 얼음물을 부어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이제 평범한 방법으로는 스킬 레벨이 안 오르네.”
“그에에.”
조금 더 시원하기만 할 뿐 스킬 레벨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훈련은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다.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목적은 달성했으니 만족한다. 아니, 그 이상이지.
[냉기 내성 (C) Lv.3]
[강체 (B) Lv.4]
[물리 공격 내성 (C) Lv.1]
[독 내성 (C) Lv.2]
기대했던 것보다 더 효과가 좋다.
이게 다 덕춘이가 옆에서 보조해 준 덕분.
“잘했어.”
“궤에에에엑.”
나를 위해 침을 뱉고 핥아 준 덕춘이가 늘어지게 울며 소리를 내었다.
특식으로 맛 좋은 음식을 주고 회복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훈련을 마쳤으니 29층의 필드 보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한다. 훈련으로 피로해진 상태 그대로 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
-화르르륵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자 힘이 생긴다.
팬티 차림으로 이러고 있자니 민망함이 몰려들었지만 뭐 어떤가. 나랑 덕춘이 말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난 당당하게 팔다리를 휘둘렀다. 더 크게! 박력 있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버프의 효과 때문일까. 기분은 한없이 좋았고 몸은 가뿐했다.
시원한 바람. 맑은 공기. 깨끗한 자연은 그 자체로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든다.
자유로움을 느끼며 하늘 높이 팔을 뻗었고.
“…29층에 들어왔는데 안 오고 뭐 하나 했더니 이러고 있었군요.”
나를 찾아 나온 29층의 보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갑옷을 두른 채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여인.
그녀의 눈에 혐오스러움이 얼핏 스쳐 지나간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장비 착용]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벗어 두었던 장비를 바로 착용했다. 눈앞의 여인은 29층의 보스.
나를 시험하는 자. 무방비하게 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공격할 생각은 없으니 검 집어넣고 따라오세요.”
빈말이 아닌지 그녀가 등을 돌려 얼음성으로 걸어갔다.
어정쩡하게 검을 쥐고 있던 난 헛기침을 하며 검을 집어넣었고.
“그, 방금 한 행동은 버프를 받기 위함이지 다른 이유나 취향은 없었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넵.
왠지 쭈글해진 난 졸래졸래 그녀를 따라 걸었다.
대체 언제 온 걸까. 인기척은 전혀 못 느꼈는데.
은신? 아니면 특별한 스킬이라도 쓴 건가? 주변을 둘러봐도 그녀가 접근해 온 흔적은 없다.
발자국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그녀의 뒤를 바라보며 권능을 사용했다.
[마그네타 프랫]
-얼음과 불의 신전의 기둥
-신성 왕국의 검
-마그나로크의 시험을 통과한 초인입니다.
익숙한 단어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10층대를 지나며 봤던 것들.
이 사람도 신전 소속이었구나.
19층에서 만난 필드 보스처럼.
어째 이름이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던 거 같은데.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제법 빨랐기에 나 역시 상념을 지우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얼마 안 가 도착한 출입구.
그녀가 손을 내젓자 얼음으로 이루어진 문이 열렸다.
투명한 얼음이 깔린 홀.
조명 역시 얼음으로 되어 있는지 청아한 빛을 내뿜었고, 기다란 식탁과 의자들과 양각으로 조각된 여신상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아름답지만 삭막한 공간. 그 안에는 눈에 익은 이도 있었는데.
“…19층 필드 보스?”
“반갑네! 오랜만이군.”
내게 불의 인장을 준 장본인이었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아니. 필드 보스가 이곳에 있어도 되나?
그보다…….
“왜 저러고 있는 거죠?”
“사정이 있습니다.”
19층에서 봤을 때의 위압감은 어디 가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들고 있는 19층의 지배자.
그가 껄껄 웃는다.
“용서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법이지! 사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을 따르던 불의 교단 신자들이 마지막 남은 얼음의 교단을 불태운 것도 사실이죠.”
“미안해. 그때는 나도 탑에 있었잖아. 밖으로 나오자마자 뛰어갔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고. 게다가 거긴 내 고향이기도 해.”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얼음과 불의 신전. 갑옷을 입은 두 남녀. 불타 버린 고향. 신성 왕국의 검.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고.
그녀가 차고 있는 검.
[서리 불꽃 검 (S)]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
-교단의 기둥과 연결합니다.
떠오른 정보를 확인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사용하던 물건이다.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과 바꿨었는데.
서리 불꽃 검의 설명, 교단의 기둥과 연결합니다. 이제야 어떤 능력인지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서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이들은.
“15층에서 봤던 환상에서 나왔던 사람들.”
신성 왕국의 방패, 휴고 아르테. 그는 19층의 지배자가 되었고.
신성 왕국의 검, 마그네타 프랫은 29층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리오스가 말했지. 탑에 속한 이들은 저마다 역할을 수행해 존재할 권리를 되찾는다고.
이들 역시 그런 건가.
“우리의 정체를 눈치챘나 보군요.”
마그네타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방금 휴고를 볼 때는 살벌하더니만.
“당신의 예상이 맞습니다. 우리는 교단을 지탱하는 기둥. 그대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손을 내미는 마그네타. 난 조용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딱딱했던 이미지가 풀린다.
웃는 거 하나로 분위기가 바뀌기도 하는구나.
“저와 휴고는 많은 죄를 지었죠. 서로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난 널 원망한 적이 없는데? 너만 날 미워한…….”
“닥쳐요, 휴고.”
억울했는지 휴고가 반박을 하다가, 결국 찍소리도 못하고 다시 벌을 선다.
어째 알리오스도 그렇고 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대가 우리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어 줬다고 들었습니다.”
“15층 히든 퀘스트를 말하는 건가요?”
마그네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15층의 언데드들과 힘을 합쳐 마을을 지켜 냈던 것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휴고도 내게 고맙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15층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 통가누스.
그곳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은 이들에게 마음의 짐이 된 거겠지.
비록 과거는 지워지지 않지만 퀘스트라는 이름 아래, 마을이 파괴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 모양.
여전히 팔을 들고 있는 휴고를 바라보던 마그네타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휴고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 것도 고마워요.”
그러고는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것이 휴고한테는 말하지 말라는 눈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들끼리 잘 풀면 되는 문제.
“원래였다면 저는 29층에 올라온 이를 시험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탑을 오를 자격이 있는지,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확인하는 거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맞아. 저 녀석 이미 20층대에 머물 놈이 아니야.”
동의하는지 휴고가 덧붙였다.
내가 스펙이 좀 높기는 하지. 20층대에서 4성급 몬스터를 때려잡고 있으니.
보통은 30층 후반, 40층대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마그나로크의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불의 인장은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성물 가지고 있죠? 꺼내 보세요.”
주섬주섬 보물 주머니에서 성물을 꺼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성물은 4개.
[홀리 크랩 (AAA)]
[스며드는 신성 (AA)]
[수호자의 의지 (AA)]
[지옥불의 순례자 (AA)]
이 중에서 계속 쓸 수 있는 건 ‘지옥불의 순례자’뿐이다.
난 마그나로크에게 정식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휴고가 준 불의 인장만을 가지고 있으니까.
“좋은 성물들입니다. 안목이 있군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훔쳐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마그네타는 교단 소속이었으니까.
마그나로크의 뒤통수를 쳐서 왕관까지 빼앗았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우리는 빚을 잊지 않습니다. 휴고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그대에게 얼음의 인장을 주고 싶군요.”
“얼음의 인장을 준다는 건……?”
“마그나로크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했지만 저와 휴고의 권한을 사용해 명예 팔라딘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난 불의 교단 성자고, 마그네타는 얼음의 교단 성녀거든. 그 정도 권한은 있지.”
그녀의 말에 휴고가 첨언했다.
성자와 성녀라. 교단의 기둥이라 불릴 만하다. 대단한 신분이었구나.
“그래 봤자 이제는 사라진 교단의 흔적일 뿐이지만 말이야.”
“휴고, 그런 말 말아요. 이제는 아닐 테니까.”
마그네타가 나를 바라봤다. 묘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 눈빛.
“우리가 그대를 인정하려는 이유가 궁금하겠죠. 신성 왕국은 이제 없습니다. 교단도 무너졌습니다. 남은 거라고는 탑에 남아 있는 잔여물이 전부죠.”
담담한 말투.
그녀가 한 발 다가온다.
“우리는 실패했고 히알틴은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어요.”
-사아아아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그녀의 손에 맴돈다.
맑은 신성력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더니 눈꽃 모양의 문양이 되었다.
“얼음의 인장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교단의 신자가 됩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성물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겠죠. 등반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탑을 올라 얼음과 불의 신전을 알려라, 그건가요?”
“맞습니다. 잊히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되살아날 테니까요.”
쉽사리 이해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나를 계승자로 삼는 것이 낫지 않나?
알리오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계승자가 100층을 정복하면 기회가 생긴다고.
마그네타와 휴고가 직접 교단을 재건하는 편이 나아 보이는데.
일단 가만히 있자. 알리오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계승자인 사실은 숨기는 게 좋다고.
아직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적대적이라면 난 높은 확률로 이 자리에서 죽는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탑에는 계승자라는 게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을 계승자로 삼아 우리가 직접 교단을 재건하는 것이 더 가능성 높겠지만…….”
씁쓸한 미소를 지은 마그네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질 필요가 있어요. 저와 휴고는 탑에 머물 겁니다. 속죄, 그것 역시 우리의 역할이니까요.”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만 알아 둬.”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선 휴고가 마그네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그네타도 별말 없이 그의 손을 감쌌다.
[휴고 아르테 - 19층의 지배자]
-자책하는 성자
[마그네타 프랫 - 29층의 지배자]
-자책하는 성녀
두 사람에게서 떠오르는 정보.
난 지그시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기준이 있겠지. 그의 말대로 이해는 어렵지만 존중은 해 줄 수 있다.
내게 나쁜 조건도 아니고.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죠. 제가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정식 교인이 아닌 만큼 지켜야 할 규율은 없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도리는 지켰으면 좋겠군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에?”
내 말에 덕춘이가 고개를 돌렸지만 모르는 척 무시했다.
분위기 깨지 말자. 저 사람들 표정 안 보여? 우리 진지한 대화 중이야.
“받아들이죠.”
결심을 굳힌 난 마그네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 역시 단단히 내 손을 붙잡았다.
자연스레 허공으로 떠오른 얼음의 인장.
“조금 아플 겁니다.”
“예?”
-사아아아!
얼음의 인장이 내게 스며들었다.
동시에 스며드는 엄청난 냉기!
“크흐으읍!”
살아 있는 그 상태로 얼어붙는 기분이다.
진짜로!
온몸을 뒤덮은 서리. 감각이 무뎌지고 근육이 딱딱해진다.
숨조차 쉬기 힘든 수준.
“불의 인장을 사용해야 하네. 그러지 않으면 동사할 거야.”
휴고가 조언했다. 알려 줄 거면 빨리 말해 주지.
집중하자. 파이어 밤을 사용했을 때를 떠올렸다. 스킬을 움직이는 마력. 그와 함께 움직였던 불의 기운을.
성물을 사용했던 뜨거움을!
-치이이익!
내 의지가 닿은 걸까. 몸에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독한 추위가 조금씩 달아난다. 동시에 냉기와 열기가 뒤엉키며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덩어리졌지만 유연하고 거대한 몸집을 가진 기운.
몸 곳곳을 휘젓는 감각이 낯설지만 평화롭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듯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요동친다.
“쿨럭!”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자그마한 충돌에도 내장이 뒤흔들린다. 더 조심스럽게. 스스로 달래며 불과 얼음의 기운이 움직이도록 놔뒀다.
여기서 또 다른 힘이 움직였다.
신성력.
-우우우우웅
불과 얼음. 조화롭지만 결국에는 다른 두 기운을 붙잡아 주는 매개체.
신성력을 중심으로 기운이 합체된다.
그렇게 세 개의 힘이 하나가 되기 시작했고.
“쿨럭! 크으.”
검게 죽은 피를 세 번쯤 토해 낼 때 고통이 사라졌다.
평온함만이 가득하다. 얼어붙었던 몸이 따스함에 퍼지는 느낌이랄까.
긴장이 풀리며 노곤하기까지 하다.
누우면 그대로 잠들 것만 같았지만.
[얼음의 인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얼음과 불의 교단, 명예 팔라딘이 되었습니다.]
[칭호 잊힌 교단의 팔라딘이 생성됩니다!]
[신성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신성력 +100]
“백?”
눈앞으로 떠오른 알림창에 눈이 번쩍 떠졌다.
스텟이 100이나 상승하다니, 이게 가능한가?
“축하해요. 무사히 인장을 받아들였군요.”
“당황하지 말게나. 다른 스텟과 달리 신성력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큰 폭으로 오르기도 하니.”
아무래도 신성력이라는 특수한 스텟이라 가능한 변화 같았다.
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볍게 기운을 모으자.
-우우우웅
신성력이 깃들며 밝게 빛을 내뿜었다.
이전보다 두 배도 넘게 강해진 신성력. 이 정도면…….
‘리치도 때려잡겠는데?’
미궁에서 만난 리치.
라이프 배슬을 부수는 것이 정석적인 공략법이지만, 신성력만 충분하다면 강제로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강해 봤자 놈은 언데드였고 신성력에 약하니까.
“이걸로 당신은 정식으로 교단 소속입니다.”
끝까지 내 손을 잡고 있던 마그네타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지지하던 손이 사라져 잠시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이제 교단의 성물을 모두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성물들을 살폈다.
진짜다. 사용 불가 설명이 사라졌다.
인정을 받았다 이거지. 덕분에 상위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30층을 앞두고 전력 보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잘됐다.
‘미궁도 그렇고, 29층도 그렇고 얻어 가는 게 많네.’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그동안 쌓아 왔던 것이 보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건가.
어느 쪽이든 내게는 긍정적인 결과였다.
“어디 보자. 자네 신성 관련 스킬은 없어 보이는군.”
휴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성력 스킬은 따로 없어요.”
“하긴. 그러니까 나와 싸웠을 때 성물만 사용했던 거겠지.”
그 말을 끝으로 휴고가 턱을 짚었다.
뭔가 생각하는 모양.
한동안 눈을 찌푸렸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손가락을 튕긴다.
“명색이 팔라딘인데 아무것도 없으면 뭐하지. 내가 자네에게 어울리는 스킬을 하나 주겠네.”
“진짭니까?”
“그럼. 결과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네는 이제부터 교단의 존재를 알리는 대표야. 신성 스킬 하나 못 쓰면 모양이 안 나오지.”
과연, 그렇기는 하다.
이들의 목적은 나를 통해 얼음과 불의 교단을 알리는 것.
백날 떠들어 봤자 한번 모여 주는 것만 못하다. 신성 스킬을 사용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편이 효율적이겠지.
“받아라. 기본적이지만 강력한 스킬이다.”
“으음. 나쁘지 않네요.”
휴고가 스킬북 하나를 건넸다. 마그네타 역시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이고.
이렇게 아낌없이 준다니. 감사한 마음으로 냉큼 받는 수밖에.
[러브 앤 피스 (A)]
일단 등급은 훌륭하다.
스킬 이름도 그렇고. 러브 앤 피스라니, 바로 교단이 떠오르는 명칭 아닌가.
난 흐뭇한 얼굴로 스킬북의 정보를 읽었고.
[러브 앤 피스 (A)]
-사랑스러운 적은 평화롭게 잠재웁니다.
-인식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때려 볼까요?
눈을 비볐다.
뭐지. 내가 잘못 읽었나?
“하하하하! 마음에 들 줄 알았지! 역시 신성력은 적들을 찍어 누를 때 가장 빛나는 법!”
“아. 예, 그렇네요. 허허허.”
됐다. 애초에 얼음과 불의 신전은 교리부터 제정신이 아니다.
스킬을 익히자 구체적으로 신성력을 활용하는 방법이 주입된다.
정신이 확 트이는 기분.
“러브 앤 피스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특정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발현되는 거니까요.”
“주먹으로 치든, 도끼로 찍든 의지만 있다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거지.”
사용 조건이 꽤 널널한 모양.
내가 검을 쓸 때 사용하는 절삭 스킬의 경우 날붙이가 아니면 작동하지 않는다.
야간 시야가 어두운 곳이 아니면 발동되지 않는 것처럼.
휴고와 마그네타의 말에 따르면 이 스킬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데…….
“그럼 스킬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까?”
“자네가 조절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휴고의 대답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단 말이지.
난 바로 스킬을 사용해 봤다.
[워터 (E) Lv.1]
[러브 앤 피스 (A) Lv.1]
-수와아아아
손을 따라 요동치는 물 덩이.
평소와 같은 물이 아니다. 투명한 물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성스러운 물.
“그에에!”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간 덕춘이가 깜짝 놀란다.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평온함을 준다.
사르르 녹는 표정으로 덕춘이가 물 덩이 안에서 헤엄을 친다.
“제대로 작동하는군요.”
“자네가 잘 컨트롤하는 거지.”
“스킬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군요.”
저마다 칭찬을 해 주는 휴고와 마그네타.
컨트롤이야 잘할 수밖에 없다. 스킬을 주력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마력도 상당한 편이라 보정치를 받으니.
“칭호도 확인해 보게. 자네가 일반적인 신자였다면 신앙을 통해 신성력을 늘려가겠지만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따로 신성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뒀네.”
휴고의 말에 새롭게 획득한 칭호를 살폈다.
[잊힌 교단의 팔라딘 - 칭호]
-얼음과 불의 교단의 명예 팔라딘에게 주어지는 칭호
-당신이 활약하는 만큼 교단의 명성 또한 높아질 것입니다.
-잊힌 교단의 대표로 업적을 쌓고 칭송을 받으세요. 그에 따라 신성력이 증가합니다.
한마디로 유명세를 얻을수록, 활약을 할수록 신성력이 증가한다는 말.
훌륭한 옵션이다. 사실 신성력을 어떻게 얻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번에 스텟이 백이나 추가로 오르기는 했지만, 앞으로 올라야 할 층은 많았고 언젠가는 부족함을 느낄 게 뻔했다.
가뜩이나 공략자 칭호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두 칭호가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할 거다.
“고맙습니다.”
난 두 사람에게 감사함을 전했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휴고가 어깨를 두드렸다.
“부디 정상까지 오르길 바라네.”
“멸망하는 건 우리로 족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들도 정상에 오르는 데 실패했지.
이해가 안 된다. 알리오스도 그렇고, 이들도 그렇고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대체 고위층에 뭐가 있길래 이들이 좌절한 걸까.
“두 분도 탑에 올랐었죠?”
“물론이지. 난 94층까지, 마그네타는 96층까지 올랐네.”
90층대까지 올랐다라…….
탑이 생겨난 이후로 100층을 클리어한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이들이 속해 있던 히알틴은 고대 신성 왕국이다.
탑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됐다는 건데…….
“궁금한 게 많겠지. 이해하네.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말일세.”
휴고가 거구의 몸을 숙이더니 나를 바라봤다.
“히알틴은 교단의 구심점이었던 우리가 탑으로 사라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
“하나였던 교단이 둘로 찢어져 서로에게 검을 겨눈 것이지요.”
단 두 문장이었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전력을 깎아 먹었다는 거니까.
한 가지 의문인 건 어째서 이걸 말해 주냐는 것.
내 질문은 위에 뭐가 있었냐는 거였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축복이 함께하기를.”
-우우우웅
마그네타가 손을 내젓자 내 발아래에 포탈이 생성되었다.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휴고와 마그네타.
점점 밝아지는 빛이 나를 감싸고.
이내 이동될 것을 깨달은 나 역시 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그리고…….”
둘을 향해 엄지를 세웠다.
“둘이 잘 어울려요!”
“궤엑!”
눈에 띄게 당황한 둘이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을 끝으로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 * *
[30층]
[안전지대]
눈을 떴을 때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30층.
드디어 올라왔다.
“진짜 저러네.”
냥펀이 보내 줬던 사진, 그것과 똑같은 하늘이 30층에도 보였다.
검은 구름과 뇌전, 새내기가 들어올 징조.
모든 안전지대에서 나타나는 형상이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본 후 주변을 살폈다.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사람들.
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막 올라온 티를 내 봤자 손해니까.
대형 길드의 접촉도 그렇고,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등쳐 먹는 사람도 존재한다.
특히나 이곳은 30층.
“아직 팀원 못 구하신 분, 저희랑 함께합시다!”
“이제 막 올라오셨나요? 30층은 처음일 텐데 여기부터는 혼자서 움직이면 안 돼요. 우리랑 같이 가시죠.”
“어허.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한 건 아는데 30층에서도 그러면 낙오자 됩니다? 위로 못 올라가요.”
이전과 달리 집단으로 등반을 해야 한다.
선택권은 없다. 팀을 이루지 않으면 30층 위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저마다 팀원을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
소속이 있는 자들은 이미 멤버를 모았는지 비교적 여유로웠고, 소속이 없거나 중소 길드인 사람들, 타이밍이 맞지 않아 자리가 빈 대형 길드 팀 몇몇이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들 어느 정도 구색은 갖췄네.’
난 거리를 걸으며 어떤 식으로 팀이 만들어지는지 확인했다.
대략적으로 팀원은 적으면 넷에서 많으면 여섯 명.
전방을 맡는 인원과 원거리 딜러 하나, 아니면 둘씩. 후방 지원 하나에 정찰조나 힐러 조합이 대다수다.
힐러야 귀한 관계로 대부분 팀의 구성은 정찰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장 인기가 없는 역할을 고르자면.
“아! 정찰은 안 한다니까!”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거 아니야? 딴 사람 알아보슈.”
“난 수색 스킬도 없다고. 그럴 거면 그쪽이 하던가.”
가장 앞에서 위험을 감지해야 하는 정찰 역할이었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탑에 들어오고 나서 온갖 위험과 함정을 맞닥뜨린 자들이다.
누구도 사서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겠지.
그것도 30층에 와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더욱더.
‘나도 팀을 구하기는 해야 하는데.’
일단 고민은 나중에 하고 할 일부터 해 볼까.
커뮤니티를 켜 냥냥펀치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부탁할 게 있다.
[쁘띠공듀]: 냥펀! 지금 20층에 있죠!
[냥냥펀치]: ㅇㅇ, 그러하다. 디펜스 이벤트 해야징.
[쁘띠공듀]: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용?
[냥냥펀치]: 부탁?
[쁘띠공듀]: 넵. 벨라 분식점 가면 릴카가 있죠?
[냥냥펀치]: 아, 그 수인 꼬마. 강제 퀘스트로 악명이 자자하던데… 요즘은 좀 뜸한 거 같지만.
그야 그 망할 강제 퀘스트를 내가 하고 있으니까.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릴카의 퀘스트 재료는… 일단은 다 모았다. 문제는 난 30층에 있고, 릴카는 20층에 있다는 것.
[쁘띠공듀]: 제가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할 테니 30층으로 오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냥냥펀치]: 너, 30층임?
[쁘띠공듀]: 고거슨 프라이버시예여. (찡끗!)
난 냥펀에게 개인 거래로 서류 하나를 보냈다.
[쁘띠공듀]: 짜잔! 부탁만 하면 섭섭하죠! 여기 디펜스 이벤트 때 나오는 몬스터 목록입니닷! 도움이 될 거예요.
[냥냥펀치]: 으아아아닛! 후훗… 난 공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궁! 분식점이나 가야겠다! ㅂㅂ.
역시 냥펀, 말이 통해서 좋구먼.
그럼 릴카가 올 때까지 30층 분위기 좀 살펴 보실까.
겸사겸사 여관도 잡고.
난 자리를 벗어났고.
“뭐야, 저건.”
오래지 않아 미묘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