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26화 (126/740)

126화 30층을 대비하는 자들

빠르게 포탈을 넘어 29층으로 향했다.

왜 생각을 못 하고 있었을까.

30층. 헌터 등급으로 치면 C급으로 분류되는 곳.

대다수의 헌터가 D급 이하였고, C급부터는 각 길드의 전력으로 인정된다.

제대로 공략이 필요한 게이트에 투입되는 인력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B급 이상부터는 수가 확연하게 줄지.”

전력으로 분류되는 C급 이상 헌터 중 C급이 차지하는 비율은 60퍼센트가 넘는다.

그만큼 40층에 오르지 못하고 떨어지는 이들이 많다는 말.

100명이 30층에 도달하면 그중 40층에 도착하는 건 많아 봐야 40명. 보통은 35명 정도가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다.

40층을 지나 50층에 도달하는 사람?

100명 중 10명이나 가면 다행이지.

탑은 올라갈수록 더욱 험난한 시련을 제공한다.

30층대를 부르는 별칭이 있었으니…….

“추락의 길.”

그만큼 많은 낙오자가 나온다.

이유는 간단했다.

20층대까지는 홀로 탑을 오른다.

죽어도 내 탓, 다쳐도 내 탓이다.

누구한테도 뭐라 할 수 없다. 오로지 개인 역량으로 올라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30층대는 아니다.

좋으나 싫으나 팀을 만들어야 하는 곳이 30층.

남 탓을 할 수 있었으며, 개인 대 개인이 아닌 집단과의 마찰이 이루어졌고, 사람이 모이는 만큼 잡다한 사건 사고도 끊임없이 발생했다.

가끔 떠돌아다니는 썰을 보면 팀원끼리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자멸하는 경우도 제법 된다는 것 같던데…….

누군가는 그럴 바에야 홀로 돌파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무조건 파티 플레이야.”

내가 기억하기로는 파티를 만들지 않으면 31층에 진입 자체가 안 됐다.

좋으나 싫으나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

20층 디펜스 이벤트는 등반자가 처음으로 겪는 협력전이다.

왜 하필 20층에 그런 이벤트가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 30층에 도전할 이들에게 잠깐이나마 미리 겪어 보라는 시스템의 안배다.

하여간 못살게 굴 때는 언제고 이런 건 은근히 챙겨 준다.

-후우우우웅

찬바람을 맞으며 정면을 노려봤다.

이제 곧 30층. 핥짝이도 그렇고, 탈모맨도 그렇고 머지않아 도달할 거다.

냥냥펀치는 아직 20층이지만 디펜스 이벤트가 끝나면 빠르게 치고 올라오겠지.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틀 후에 디펜스 이벤트가 열린다고 한다.

평소와 달리 빠르게 진행되는 중. 아무래도 나 덕분에 대부분의 구역이 파괴되지 않은 탓인 것 같다.

안전지대가 파괴되면 복구 사업이 발생하고, 모든 가게가 정상 영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으니까.

멤버들 각자 목적을 가지고 등반을 하고 있다.

탈모맨의 목적이 나라서 문제지.

이쯤 되면 집착 아닌가? 아니, 날 봐서 뭐 어쩌자고.

주먹을 움켜쥐며 다짐했다.

“30층에서는 무조건 정체를 숨겨야지.”

“그에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탈모맨한테는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혹시라도 정체를 들키는 날에는 녀석과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팀 단위로 움직이는 만큼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피해를 입겠지.

이렇게 된 이상 멤버들보다 빠르게 탑을 오르는 수밖에.

[29층]

[29층 보스의 인정을 받아라]

난 클리어 조건을 살폈다.

19층 때도 비슷한 조건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싸웠던 녀석도 보통이 아니었지. 이번에도 비슷할 거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강하다는 것.

이번에 새로운 스킬까지 얻었으니 무난하게 클리어하지 않을까.

아니다.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떤 위험이 도사릴 줄 알고.

“춥네.”

“궤엑.”

앞으로 걸었다.

29층의 추위는 상당했다. 바닥은 빙판이었으며 눈보라가 쳤고, 저 멀리 얼음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보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네모난 건물. 그럼에도 얼음 특유의 청명함과 빛에 따라 바뀌는 색깔 덕에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이번 필드 보스는 얼음과 관련 있는 건가.

그렇다면 냉기 내성을 좀 더 키우고 가는 편이 좋겠지.

[장비를 해제합니다.]

“어억. 와. 미쳤다.”

난 착용하고 있던 장비를 벗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뼈가 시릴 정도.

급격히 체온이 내려간다. 이가 부딪치고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희미해진다.

세차게 팔을 비볐지만 따갑기만 할 뿐 체온은 올라가지 않았고.

“후욱. 후!”

바로 그 자리에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움직이자, 그래야 피가 돌지.

“그에에에.”

몸에 불을 두른 덕춘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뭐든 확실히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직 새내기들이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괜히 어중간하게 준비했다가 29층에서 죽으면 20층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거고.

화기 내성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화기 내성 (C) Lv.4]

시작이 E급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지.

반면에 20층대를 오르면서 얻은 냉기 내성 스킬은.

[냉기 내성 (D) Lv.7]

아직 D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적어도 C급은 만들어 둘 생각.

덤으로 Lv.10에 오른 강체 스킬도 승급하고, 물리 공격 내성 스킬도 레벨을 올려 둘 생각이다.

“덕춘아, 산성침이랑 독침 좀 뱉어 봐.”

하는 김에 한 번에 다 끝내 버리자.

저것들 모두 C급 이상으로 올리고 도전해야지.

“얼른!”

“그에에에.”

내 재촉에 덕춘이가 옆으로 다가온다.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마음을 먹은 듯 침을 뱉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크읍!”

살이 타들어 간다. 덕분에 뜨끈뜨끈하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위험하다 싶으면 덕춘이가 회복 특성을 이용해 치료해 줬다.

계속 반복하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미리 해 둬야 나중에 편하지.

후우우우. 심호흡을 하며 통증을 견뎌 냈다. 중간중간 얼음 바닥을 뒹굴어 체온을 떨어트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스킬 레벨 업!]

[스킬 레벨 업!]

각 스킬들의 레벨이 올라가는 알림이 떠올랐다.

입꼬리를 올리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유난 떠는 게 아니다. 진지하다.

30층에 올라가면 대형 길드 루키가 존재한다. 팀 단위로 움직이는 만큼 대형 길드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명이 같이 생활해야 하는 만큼 개인 훈련 시간도 없다.

벌써부터 불신하는 게 미안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훈련 때를 틈타 공격을 가할 수도 있기에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원한, 누군가의 사주, 대형 길드의 견제.

그 외에도.

‘아이템을 노리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는 품질이 좋다.

펠라인 세트는 말할 것도 없고, 기타 성물들과 아티팩트, 넉넉하게 준비해 둔 포션까지.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할 수도 있는 것들이고, 위기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지 가늠할 수 없다.

겪어 봐서 안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이들 전부.

대격변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라면 모두 경험해 봤다.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새내기가 들어올 때까지 대략 이틀.”

하루는 스킬 레벨을 올리는 데 전념하자.

* * *

30층 안전지대.

산군 길드의 건물에는 세 길드의 루키들이 모여 있었다.

산군, 다성, 이클립스.

오지혁이 카메라와 사진 등록 스킬을 얻으면서 대형 길드 내의 변화가 일어났지만,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쁘띠공듀가 추가적으로 물량을 푼 건 없나 보군.”

산군 길드의 루키, 최성모의 말에 다성 길드의 루키 이하영이 손을 내저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인한테도 판 게 없어. 어쩌면 스킬북이 없는 걸지도 몰라.”

“꾸준하게 공급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물량이 턱없이 적죠.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더라도, 우리와 거래를 한다 하더라도 대형 길드 전체가 만족할 만큼은 내놓지 못하겠죠.”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지 이클립스의 루키 김창후가 거들었다.

어느 쪽이든 대형 길드는 쁘띠공듀와의 거래는 의미가 없다.

“이번에 새내기들이 들어오면 쁘띠공듀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겁니다. 그들도 공략을 읽을 테니까요.”

김창후가 컵을 만지작거렸다.

모두 아는 사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다른 대형 길드들도 예의 주시 하고 있다.

“지금도 쁘띠공듀 추종자들이 움직이고 있어. 쁘찡 연합? 웃기지도 않아.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우스운 것과 별개로 그들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지.”

이하영의 말에 최성모가 주먹을 쥐었다.

쁘찡 연합. 이름만 보면 한없이 하찮았지만 나날이 위세가 높아지고 있는 신흥 세력이었다.

공격적으로 규모를 확장하고 있기도 했고.

팀 소속이든, 중소 길드 소속이든, 일반인이든 가리지 않고 받았다.

대형 길드만 아니라면 누구든 오케이. 쁘띠공듀를 따르는 이라면 실력, 수준에 관계없이 연합으로 받아들여 도움을 주니 혹하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

쁘띠공듀 한 명을 보고 뭉친 이들.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어서인지 단결력이 상당했다.

“이대로 두면 대형 길드의 장악력을 벗어날 수도 있겠어.”

“그렇겠지. 지금도 봐 봐. 우리 욕하는 애들이 천지인걸?”

이하영이 커뮤니티를 켜더니 댓글을 읽어 댔다.

“공듀는 공략 올리는데 대형 길드는 뭐 하냐. 말만 대형 길드지 결국에는 자기들 잇속 챙기기 바쁘지 않냐. 따지고 보면 대형 길드가 하는 일은 없다. 통제할 생각 말고 정보를 풀어라. 더 읽어 줄까?”

여론전. 새내기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쁘찡 연합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대형 길드에 들어가지 말고 연합으로 오라고. 그들은 믿을 수 없다고. 이곳에서 함께 힘을 합쳐 탑을 오르자고.

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고.

“틀린 말은 아니군.”

최성모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죄다 멍청이들이지. 대형 길드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아?”

“때로는 악당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이하영의 말에 기지개를 켠 김창후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가 최성모를 바라봤다.

“6층은 피닉스가 관리하기로 했고, 우리는 새내기가 들어오는 시점에 등반을 시작할 겁니다.”

이미 다른 길드의 루키들은 30층을 떠났기에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셋이 전부였다.

30층의 처리관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루키는 아니었기에 이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

“우리가 떠나면 오지혁이 세미 루키로 30층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다른 정식 루키들이 올 때까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김창후의 말에 최성모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별거 아닙니다. 오지혁, 일단은 루키 취급을 해 주기로 했잖아요. 그것도 말해 줄 생각입니까? 알겠지만 오지혁에게는 억제 수단이 없어요.”

김창후가 옷깃을 내렸다.

목 위로 드러난 마법진. 특정 정보를 말하면 그대로 터져 버리는 폭탄이었다.

모든 루키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

“위에서는 뭐라고 해?”

“우선은 지켜보기로 했다. 오지혁이 30층에 오면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지금 24층을 오르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올 거다.”

“빠르네. 우리보다도 빨리 오르는 것 같지 않아?”

이하영의 말에 최성모가 피식 웃었다.

이곳에 모인 세 루키. 한때는 쁘띠공듀와 멤버들처럼 경쟁하듯 탑을 올랐었다.

가장 좋았던 때, 루키의 의무니 뭐니 신경 쓰지 않고 등반에 전념했던 기억은 그들을 뭉치는 힘이기도 했다.

“다시 출발해야지. 그 전에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치고.”

“아, 그거?”

최성모의 말에 이하영과 김창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여덟 개의 대형 길드, 그들이 모여 내린 결론.

“쁘띠공듀는 아직 40층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쁘띠공듀와 멤버들, 그들의 세력 모두 탑 밖으로 퇴출시킨다. 스킬북도 얻을 수 없고, 그의 세력이 우리에게 위험을 준다면 제거가 답이니까.”

그의 말에 김창후가 창문을 열었다.

산군 길드. 그 앞에 모인 사람들. 각자 자신이 속한 대형 길드의 마크를 가지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