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걔도 여기 있는데?
검을 휘둘렀다.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발휘되며 내 공격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콰득!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리치의 목이 솟구쳤다.
힘없이 추락하는 놈의 몸뚱이.
-카가가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뼈가 흩어진다.
강력한 마법과는 달리, 리치 본체 자체는 내구도가 약한 편이었다.
적어도 물리력에 있어서는 말이지.
마법 공격에는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어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 힘들다고 들었지만.
“일부러 검을 쓴 건가?”
날아갔던 놈의 머리통이 허공에 떠오른 채 말을 걸었다.
역시 죽지는 않는군.
신성력이 충분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난 신성 스킬도 없고, 프리스트 계열 권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부활만 아니면 저따위 4성급 몬스터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다. 라이프 배슬을 찾아 부수는 수밖에.
‘덕춘아,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네가 라이프 배슬을 찾아.’
작게 끄덕이는 덕춘이.
펫이 이래서 좋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속으로 말해도 잘 알아듣잖아.
난 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레고스가 나한테만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 리치는 마법에 강하니까. 해골은 두드리는 맛이지.”
“말은 잘하는구나, 끌끌끌.”
놈이 웃자 널브러져 있던 뼛조각이 저절로 날아와 형태를 갖추었다.
몸이 재생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30초.
빠르다.
공격력에 모든 걸 투자한 몬스터가 리치. 내구도는 약하지만 재생으로 커버한다.
이래서 헌터들이 리치를 상대하기 싫어하는 건가.
역시 라이프 배슬을 부수는 게 답이다.
‘버프가 유지되는 시간은 10분, 가능하면 그 안에 찾아 주면 좋겠는데.’
버프가 끝나도 싸울 수는 있지만, 놈의 시선을 완전히 잡아끌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놈이 작정하고 덕춘이만 노리면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
난 놈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어디에 있을까? 놈의 유일한 약점이니 아무 데나 놔뒀을 리는 없는데.
이곳이 아닌 미궁 어딘가에 숨겨 뒀나?
아니다. 그건 너무 위험하다.
함정이 작동됐을 때 파괴될 위험이 있을뿐더러, 다른 침입자가 우연히 발견할 가능성도 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닐 텐데. 만약 가지고 있었다면 방금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을 거다.
블링크든 쉴드든 뭐든 간에 써서.
아무래도 보물들 사이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단은 시간을 좀 끌어 볼까.
“푸레고스, 영생할 수 있다고 해도 멸망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당장 너도 탑에 갇혔잖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인 게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나. 하이누 때도 그렇고 홀로 방치된 이들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리 강인한 이들도 외로움은 느끼니까.
놈도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침입자가 오기 전까지 천천히 즐기겠다고.
내 귀에는 심심하니까 놀아 달라는 거로 들렸다.
“멸망한 세계는 어떻게 되지?”
“그게 의미가 있을까? 등반자여, 어차피 그대의 세계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왜? 알리오스도 실패해서?”
내 말에 푸레고스가 멈춘다.
“알리오스를 만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 너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은 들었어.”
들은 적 없다. 그저 녀석의 관심을 끌기 위한 속임수일 뿐.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동됩니다.]
자연스럽게 공동을 살폈다. 혹시나 이곳 어딘가에 라이프 배슬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하라, 그는 어디에 있지!”
-쿠화아아아악!
푸레고스에게서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굉장한 박력.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 정도다.
막대한 마력의 흐름은 그 자체로도 치명적이니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놈에게 한 발 다가갔다.
“왜? 알리오스한테 얻어터지기라도 했나 봐? 걔 성격이면 그러고도 남지.”
“그 가증스러운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놈만 아니었어도 제국은 약화되지 않았다!”
아. 알리오스가 기사가 되기 전에는 제국의 큰 위협이라고 했었지.
대죄수로 수감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덕분에 놈이 성질을 긁을 수 있을 것 같군.
“가증스럽다니. 알리오스는 탑의 99층까지 올랐어. 그가 그러는 동안 넌 어디에서 뭘 했지? 제국을 위하는 척하지만 사실 본인 욕심을 채우고 싶었던 거 아니야?”
난 인벤토리에서 세계수의 씨앗을 꺼냈다.
놈의 몸이 떨린다.
“…하이누!”
“맞아, 마지막 눈의 정령 여왕. 너와 함께 미궁을 만든 존재. 하이누는 힘을 다할 때까지 보물 지도를 놓지 않았어. 그런데 넌…….”
다시 세계수의 씨앗을 집어넣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봉인하기로 했던 아이템으로 리치가 됐네? 이야, 멋지다! 장하다, 푸레고스!”
박수를 치며 양손을 펼쳤다.
“미궁에 있는 표식도 네가 그려 놓은 거지? 다시 미궁으로 기어들어 오려고. 덕분에 여기까지 쉽게 왔다. 고오오맙다!”
“네노오오옴!”
[다크 프레임 (AA) Lv.10]
-극심한 고통을 선사하는 불길
-정신 타격이 동반됩니다.
분노한 놈이 팔을 휘두르자 칠흑의 불꽃이 나를 덮쳤다.
쉽게 당해 줄 수는 없지!
-콰아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려, 반동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다크 프레임.
-쿠콰콰콰콰!
삽시간에 공동이 파괴된다. 소름 끼치는 열기에 화기 내성 스킬 레벨이 올라가는 알람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뿐일까.
-부그르르
직접 닿지도 않았건만 몸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피부가 벗겨지며 근육이 쪼그라드는 느낌.
동시에 강체 스킬의 레벨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대가로 바쳤는지! 제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투정은 집에서 해!”
[프로즌 브레이크 (A) Lv.7]
-콰드드득!
놈을 향해 얼음이 솟아오른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녀석.
블링크인가? 난 빠르게 주변을 살폈고.
“찾았다!”
“크흡!”
좌측에서 나타난 놈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날렸다.
그대로 얼음에 처박힌 녀석.
그와 함께 얼음이 폭발하며 놈의 몸을 박살 냈다.
확실히 놈의 몸은 약하다. 사용하는 마법의 위력이 미쳐서 그렇지.
라이프 배슬을 깨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부활하는 것도 문제고.
난 버프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대략 5분.
놈을 압도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부숴 놔야겠다.
-스스스슥
다시 재구성 되는 푸레고스.
재생 속도가 줄었다. 이번에는 40초가량.
무한히 부활한다고는 하지만 페널티가 하나도 없을 리가 있나.
놈이라고 마력이 무한대는 아닐 텐데.
-차앙
검을 고쳐잡았다. 대략 한 번 부술 때마다 10초 정도 재생 시간이 늦어진다.
분 단위로 느려지게 만들려면 최소 두 번은 더 박살 내야 한다.
-파앙!
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먼저 땅에 떨어트리자.
“어딜!”
놈이 나를 향해 화염 스킬,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직선으로 뻗어 오는 홍염.
[중량 팔찌 (C)]
빠르게 무게를 늘려 밑으로 이동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불길.
타이밍에 맞춰 파이어 밤을 터트려 다시 도약.
[절삭 (B) Lv.1]
순식간에 접근하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B등급 스킬. 다른 스킬에 비해 위력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서걱!
-카가가가각!
연달아 검을 휘두르자 검격은 수십 개의 선이 되었고.
“크아아아악!”
놈의 몸이 수십 갈래로 찢어졌다.
고통에 울부짖는 녀석.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리치는 공격 마법에 특화된 언데드, 당연히 방어에는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이놈은…….
“정도가 심한데? 너 진짜 마법사 맞아?”
제대로 된 방어 마법 하나 쓰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리치는 마법사가 언데드화 된 거 아닌가. 그렇기에 간단한 쉴드 정도는 쓰는 게 보통이다.
처음에는 봐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복원할 수 있으니까. 다른 침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놀아 줄 상대가 필요하니까 힘을 아낀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의심이 든다.
꾸득. 놈의 해골을 움켜잡았다.
“큭, 크크크큭!”
놈이 웃었다.
달그락거리는 턱뼈. 흉흉하게 빛나는 안광이 소름 끼친다.
-쿠웅!
해골을 그러쥔 채 땅에 착지했다.
다시 재생하기 위해 뼈들이 날아들었지만.
-카앙!
-빠각!
검을 휘둘러 막아 냈다.
진짜 리치라면 이 상태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방금 전까지 사용하던 상위 등급의 마법은 아니더라도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터.
위화감이 들었다.
제국의 남작. 귀족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높은 직위는 아니다.
그런 자가 수많은 귀족이 탐내던 보물을 훔쳐 미궁에 봉인했다?
힘이 있었다면 직접 나서서 강탈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아예 힘으로 찍어 눌렀다면 미궁을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을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악마를 부르는 뿔피리 (S)]
-악마를 소환해 불멸의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불멸을 얻은 자는 악마에게 귀속됩니다.
-상위 악마의 기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중급 이하의 악마종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정신력이 약한 자들을 유혹합니다.
놈이 지키고 있는 아티팩트의 마지막 설명.
정신력이 약한 자를 유혹한다는 것.
푸레고스는 유혹에 져 리치가 됐다.
정말 그가 강한 자였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
“너도 이곳에 있다면 탑의 부름을 받았을 거야. 솔직하게 말해. 넌 몇 층까지 올랐지?”
“크흐흐.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뭔지 아나, 등반자여.”
대답을 회피한 푸레고스가 다른 말을 꺼냈다.
그의 안광이 일렁거렸다.
“그 어떤 영웅이 나타나도 세계는 멸망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탑에 오른 자들은 NPC라도 될 수 있지.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일반인은?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 못한 이들은?”
-콰드드득!
강제로 오른팔을 복구한 푸레고스가 내 멱살을 잡았다.
“생존이 먼저다, 등반자여. 형태는 중요하지 않아. 세상이 바뀌면 우리도 바뀐 그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나를 도운 이들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 대의를 떠받드는 자들이었지만 그건 기만이야! 그들은 NPC가 되어 탑에서 살아가고 있다!”
-콰각
-뿌득
다른 뼛조각이 날아와 놈의 몸에 붙는다.
기어이 몸을 재생해 낸 녀석이 이를 악물며 나를 노려봤다.
“내가 몇 층까지 올랐냐고 물어봤나? 고작해야 35층이다. 우습나? 우습겠지! 탑의 절반조차 오르지 못했으니까! 마법? 난 마법사가 아니야. 평범하고 흔한 일반인이었지.”
35층. 확실히 알리오스랑 비교하면 낮은 층이기는 하다.
우리 기준으로 치면 C급 헌터 수준.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리치치고 마법이 다양하지 않았는지.
‘악마와 계약해서 억지로 파워 업 한 거야.’
일반인이었던 그가 4성급 몬스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밝혀졌다.
좋은 소식이다. 보다 수월하게 놈을 사냥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멸망한 세계에 남은 자들은 모조리 죽는다. 악마의 권속이 되면 마계로 들어갈 수 있지. 제국은 그 사실을 무시했다. 제국민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야!”
“개소리군.”
“아니, 난 옳다. 스스로 증명하려 했다. 멍청한 귀족 놈들은 그저 자기 한목숨 살리려고 전쟁을 벌였지만 난 달랐어. 직접 악마의 심복이 되어 다른 이들이 마계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가 보물 방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가리켰다.
“네 말대로 표식을 남긴 건 나다. 세계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다시 돌아와 대업을 이루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지. 이미 난 탑에 속하고 말았으니까.”
“그럼 이제 포기하지? 왜 아직도 여기 남아서 질척거려.”
내 말에 푸레고스가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계약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그분이라면 탑에 있더라도 날 구원해 주실 거야. 무려 제7 마계의 지배자 킬더레스가 나의 주인님이니까!”
그가 당당하게 외쳤고.
“어… 킬더레스 지금 10층에서 NPC 역할 하고 있는데?”
난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