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보물방
안개화된 나는 빠르게 문틈으로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문까지 도달한 소멸 마법진.
입구까지 모든 것을 지워버린 마법진은 그대로 사라졌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한 뼘이라도 틈을 벌리지 못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한 게 있는데 여기서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지.
“궥궥!”
무사히 빠져나온 걸 축하하는 걸까.
다시 육체를 되찾은 내게로 덕춘이가 몸을 던졌다.
“어이쿠. 그래그래, 나 왔다.”
내 뺨을 할짝거리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무슨 개냥이도 아니고. 음, 덕춘이는 고양이가 아니니까 개, 구리? 뭐라고 해야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갑다.
잠시 무사히 함정에서 빠져나온 것을 자축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분위기가 바뀌었네?”
“궤에에.”
그동안 미궁은 살벌한 풍경이었다. 조명도 어둡고 통로는 음침했으며, 미적인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야간 시야가 종료됩니다.]
이곳은 조명도 제대로 박혀 있고 벽에도 벽지가 발라져 있다.
여전히 창문 하나 없는 폐쇄된 공간인 건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난 손가락으로 벽을 훑었다.
딱히 먼지는 만져지지 않았고, 핏자국이나 기타 함정이 숨어 있을 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복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모습.
그래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방심을 유도하다가 공격하는 수도 있으니까.
탑에서 하도 일을 당해서 그런지 의심이 먼저 들었다.
소멸 마법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덕분에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힘들다.
지치기는 했지만 안전한지 확인부터 하자.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으음!”
살짝 두통이 오기는 했지만 권능 사용 자체는 성공했다.
앞뒤, 좌우 할 것 없이 숨겨진 함정이 있는지 체크했고.
“아직은 안전하군.”
따로 장치된 것들은 없다는 걸 확인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일단은 회복이 먼저다.
[샤워 (E) Lv.4]
“그에에에.”
“으어. 좋다.”
샤워 스킬을 시전하자 따듯한 기운이 몸을 감싸며 긴장을 풀어 줬다.
조금이지만 몸이 회복되는 느낌. 지쳤던 근육이 힘을 되찾고 피곤함이 어느 정도 가신다.
컨디션을 유지하기에 딱 좋은 스킬.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샤워 스킬은 보조적일 뿐 제대로 회복해야 한다.
다행히 내게는 그럴 방법이 있다.
[파이어 (E) Lv.2]
바닥에 불을 던졌다.
준비는 끝났고.
“흔들어 보실까.”
“그에에.”
나와 덕춘이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춤을 추며 돌기 시작했다.
상황에 안 맞는 건 아는데 어쩔 수 없다.
이게 다 내가 얻은 칭호의 효과를 사용하기 위함이니까.
[불과 춤의 화신-칭호]
-화려한 불길! 격정적인 춤!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면 버프가 생성됩니다.
애꾸 예티 던전에서 얻은 칭호.
효과는 확실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줄어듭니다.]
[회복 효과가 상승합니다.]
[스텟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정신 보호가 활성화됩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는 컨디션.
이 칭호 효과가 좋은 게 나뿐만 아니라 같이 춤을 추는 이들까지 효과가 적용된다.
대략 모닥불 반경 5미터 정도.
광역 버프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덕춘이 역시 팔짝거리며 회복을 받았다.
미궁에서 고생한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이래저래 도움도 많이 받았고.
“이제 좀 살 만하다, 그치?”
“궤에엑!”
10분 정도 효과를 받으니 생기가 돈다.
덕춘이에게 워터 스킬로 물 좀 뿌려 주고 불을 껐다.
이제 다시 움직여야 한다.
미궁으로 들어온 지 벌써 5일이 지났다. 이틀은 더 버텨야 미궁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난 아직 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보물도 마찬가지. 식량도 제한이 있으니 가능한 빠르게 클리어하는 게 좋았다.
앞으로 전진. 꾸준하게 길을 표시하며 나아갔다.
함정은 아직까지 없다.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동그라미 표시가 늘어난 거 같지 않아?”
“그으으. 궥.”
통로에 표시된 동그라미가 많아졌다는 것.
아마 다른 길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오는 통로 같다.
세모도 간간이 보이고 네모는 보이지 않는다.
예상대로 네모 표식은 막다른 길로 가는 모양.
대략적인 지리를 머릿속으로 암기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보물에 근접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도대체 미궁에 숨겨진 보물은 뭘까.
어떤 거길래 재앙이라 생각한 걸까.
제국의 귀족들이 탐냈던 걸 생각하면 대단한 물건인 건 확실한데.
“궤엑.”
상념에 빠져 있던 그때, 덕춘이가 나를 잡아당겼다.
“저기인가.”
난 골목에 위치한 거대한 문을 바라봤다.
막다른 길. 다른 곳이랑 연결된 통로가 도착하는 마지막 장소.
[보물이 잠든 곳]
-각오하지 않은 자 돌아가라.
문 위에는 살벌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위험할 건 각오했다. 남은 건 그동안의 고생에 적합한 보상을 얻는 것뿐.
-끼이이익
몸 상태를 살폈다.
많이 회복됐다. 마력도 꽤 찬 것 같고.
덕춘이 역시 파이팅 넘치게 몸을 부풀렸다.
짜악. 하이파이브 한 번 하고.
“들어갑시다.”
“그에에.”
난 보물 방을 열었다.
저항 없이 밀리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 저절로 문이 닫혔으며 그 안에서.
“와우.”
박물관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이 나타났다.
깔끔한 선반에는 다양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의적, 푸레고스가 모은 보물]
-푸레고스는 혼란을 일으키는 귀족들의 물건을 훔쳐 모았습니다.
-이곳은 그의 유산이며 그레이트프론의 보물들이 잠든 곳.
-당신은 하나의 보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보물이 사라질 경우 미궁이 폐쇄됩니다.
히알틴 유적 때와 똑같다.
미궁에 들어온 자에게는 보물을 가질 권리가 생기지만 단 하나의 보물만 골라야 한다.
하나같이 대단한 물건들. 금은보화는 물론이요, 가치 높은 미술품과 아이템도 가득했다.
그렇기는 한데.
“이게 메인은 아닌 것 같지?”
“궥.”
말 그대로 보물일 뿐 재앙이라 불릴 만한 물건은 아니다.
난 시선을 돌리고 길을 따라 움직였다.
서서히 선반이 줄어들며 빈 공동이 드러났다.
제단. 높이 솟은 기둥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었고.
“누가 미궁 안에 들어왔는가.”
탁한 음성이 나를 반겼다.
순간 몸이 저릿했다.
진득한 살기.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경고.
난 허공에 떠 있는 존재를 바라봤고.
“…리치?”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4성급에 달하는 언데드 몬스터. 자아가 없는 좀비나 스켈레톤과 달리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모조리 가지고 있다.
상대하기는 더 까다로운 놈이다. 무식하게 달려드는 놈들과는 행동 자체가 다르니까.
“등반자로군.”
리치가 나를 내려다봤다.
텅 빈 안구에서 타오르는 불꽃에는 살기와 사념만이 가득했다.
위험하다.
리치는 기본적으로 마법에 능한 존재.
온갖 기상천외한 마법을 쏟아 내는 것도 위협적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혼이 담긴 라이프 배슬을 깨기 전까지는 끝없이 부활해.’
강력한 신성력이 담긴 공격으로 부정한 존재를 정화시키든, 특별한 봉인 스킬로 잠재우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되살아나 적을 처리한다.
한 마리 잡는 데 많은 수고를 들여야 한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놀랍건만.
[리치-푸레고스]
-유혹에 넘어간 자.
-푸레고스 남작은 악마와의 거래로 불멸을 얻었습니다.
-그는 보물을 지킬 것입니다.
권능을 통해 드러난 정보는 더욱 놀라웠다.
푸레고스 남작.
미궁을 만든 주인공.
이곳의 라스트 보스는 그였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린다.
어째서 보물 지도 조각이 비는지, 누가 미궁에 표식을 남긴 건지, 나보다 먼저 미궁을 찾아온 인물이 누구인지.
“NPC가 되자마자 미궁으로 향한 건가, 푸레고스.”
“호오, 나를 아는가?”
흥미가 동하는지 아크 리치가 턱을 달그락거렸다.
“미궁을 만든 사람이라는 건 알지.”
“지도를 얻은 모양이군.”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걸까. 그가 키득거리더니 양손을 펼쳤다.
거대한 화염구가 떠오른다.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저 불덩이에 담긴 마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저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으니까.
몸을 찔러오는 무형의 기운에 식은땀이 날 지경.
“넌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됐다, 보물에 눈이 먼 자여.”
아크 리치의 말에 난 피식 웃었다.
그걸 본 놈이 이를 갈았다.
“웃어?”
“미안. 개소리를 들으면 웃는 병이 있어서.”
보물에 눈이 멀었다라.
“눈이 돌아간 건 네가 아닌가, 푸레고스 남작?”
분명히 적혀 있었다. 유혹에 넘어간 자라고.
미궁에 표식을 남긴 이유? 별거 있나. 혼자 몰래 들어가서 보물을 취하려고 그랬던 거겠지.
자신을 몬스터로 만들면서까지.
하이누는 끝까지 버텼는데. 정작 미궁을 만들자고 한 녀석은 봉인한 보물을 사용해? 어이가 없다.
“내 희생을 모욕하지 마라! 다른 무지한 자들이 그것을 가지게 둘 수는 없다. 내가 지키는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그래. 자기 합리화 열심히 하고.”
난 제단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미궁의 진정한 보물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담백한 디자인의 물건.
[악마를 부르는 뿔피리 (S)]
-악마를 소환해 불멸의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불멸은 얻은 자는 악마에게 귀속됩니다.
-상위 악마의 기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중급 이하의 악마종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정신력이 약한 자들을 유혹합니다.
S급 아티팩트.
불멸의 계약이라. 언데드로 만들어 준다는 건가.
남작이 아크 리치가 된 것처럼.
멸망을 향해 돌진하는 세계. 귀족들이 욕심 낸 이유는 하나다.
악마와 계약해서라도 살아남고 싶으니까. 언데드가 돼서라도 세상에 남고 싶으니까.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원래라면 금기시될 행위였으나 세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의미 없었겠지.
게다가 유혹 옵션. 가뜩이나 불안한 사람들이 버틸 수 있었을까?
“그대는 이곳에 잠들리라.”
그 말을 끝으로 아크 리치의 공세가 시작됐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염구.
곧장 옆으로 달렸다. 정면으로 덤비는 건 어리석은 짓.
-쿠아아아앙!
땅을 강타한 화염구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일대를 완전히 뒤덮은 일격.
저 정도 파괴력을 내려면 파이어 밤을 몇 번 사용해야 하지?
꿀꺽. 침을 삼켰다.
“궥!”
덕춘이가 경고했다. 놈이 만든 화염구는 두 개. 아직 하나 남았다.
“끝까지 발버둥 치거라, 등반자여. 오래도록 즐겨 주마. 다음 침입자가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젠장!”
빠르게 다가오는 화염구.
다시 한번 몸을 날리려는데 징조 없이 땅에서 돋아난 덩굴이 발목을 잡았다.
-서걱!
검으로 덩굴을 잘라내는 동시에 화염구를 향해 파이어 밤을 날렸다. 직격당하면 안 된다. 폭발을 유도할 생각.
-콰아아앙!
나에게 닿기 전에 화염구가 폭발했다.
파이어 밤이 어느 정도 위력을 경감시켜 주면 좋으련만 아크 리치의 마법이 너무 강하다.
“크하학!”
폭발의 여파가 불길이 되어 나를 덮쳤다.
[화기 내성 (C) Lv.1]
[강체 (C) Lv.9]
[되갚기 (A)의 효과. 데미지가 흡수됩니다!]
[상태 이상, 치명적인 화상에 걸립니다.]
연달아 패시브 스킬이 발동되며 몸을 보호했지만 충격은 엄청났다.
온몸이 바싹 익는 느낌.
속까지 스며드는 열기에 숨조차 쉬기 힘들다.
하다못해 물리 공격이면 어느 정도 버티겠는데 마법 공격에는 면역력이 없다.
난 바닥에 엎드린 채 놈을 노려봤다.
오랫동안 즐기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추가타는 없었다.
방심해 주면 나야 고맙지.
[독자무강 (A) Lv.2]
[버프 다이스 (B) Lv.3]
[5]
[팔라딘의 방패]
난 버프를 몸에 둘렀고.
[파이어 (E) Lv.2]
[펠라인 세트의 속성이 부여됩니다!]
마력을 쏟아부어 허공에 불을 질렀다.
펠라인의 투구의 속성은 불.
더욱 강력해진 화력에 제단은 삽시간에 붉은빛을 띠었고.
-파앗!
놈의 눈이 어지러워진 틈을 틈타 도약했다.
목적지는 아크 리치.
“어리석군.”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데스 사이드 (AA) Lv.10]
-죽음의 낫을 휘두릅니다.
-피하세요!
권능이 경고를 날렸다. 그만큼 위험한 일격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피하지 않았다.
-스아아아!
[안개 질주 (A) Lv.1]
안개화된 몸을 죽음의 낫이 가른다.
타격은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난 모든 공격에 면역이었고.
[망자귀환 (A) Lv.5]
-모든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300퍼센트 증가합니다!
-버프와 회복 효과가 300퍼센트 증가합니다!
안개화가 풀린 타이밍 망자귀환을 사용했다.
화상이 사라지며 온몸에 힘이 솟구친다.
버프 다이스로 얻은 효과가 더욱 강해졌으며.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SS)가 발휘됩니다.]
난 놈의 목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