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한 뼘
수족관을 지나고 난 후, 꼼꼼히 길을 살폈다.
여기부터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으니 알아서 위치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골목길, 통로, 전부 기록했다. 덕분에 수첩 페이지가 빠르게 줄었지만 어쩔 수 있나. 머리로 외우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큰데.
중간중간 벽면에 표시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이어로 지져 주면 그을음이 남으니까. 혹시나 길을 잃어도 표식을 보고 돌아올 수 있을 거다.
-터벅터벅
빈 통로에 울리는 거라고는 내 발소리뿐.
인기척은 없었고 위협적인 함정도 없다.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이전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났다.
“덕춘아, 보물 지도 있잖아. 미궁을 만든 이들끼리 조각을 나눠 가졌다고 했지?”
“궤엑.”
이제는 세계수 씨앗이 되어 버린 눈의 정령 여왕 하이누. 그녀가 직접 말해 줬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보물 지도 조각은 두 개.
한 사람당 두 개씩 나눠 가졌다고 치면.
“못해도 여섯 명은 미궁 제작에 참여했다는 건데. 그런 것치고는 풀린 조각이 적단 말이지.”
하이누도 그렇지만 미궁을 만든 이들은 보통 거물이 아닐 거다.
이만한 규모, 이 정도 난이도의 미궁을 만들려면 힘이 있든 돈이 있든 뭔가가 있어야 하니까.
높은 확률로 탑의 부름을 받아 NPC가 됐을 터.
“NPC는 탑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 장사를 하든 필드에서 뭘 하든. 그치?”
“궥궥.”
“하이누는 필드에서 버텼어. 기력이 쇠해서 씨앗으로 돌아갈 정도로. 그래서 조각 두 개를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있었지.”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하이누와 접촉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진짜 NPC가 돼서 탑의 하수인 역할을 했겠지.
지키고 있던 보물 지도 조각이야 시스템의 의도대로 뿌려졌을 것이고.
내가 각 층에서 얻은 보물 지도 조각이 그걸 증명한다.
몇몇은 이미 진짜 NPC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은.
“시스템에 팔아 버렸을 거야.”
탑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라도 해서 포인트를 벌어야 생존 권리를 살 수 있으니까.
벨라가 지도 조각을 구매할 수 있던 이유도 그들이 팔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미궁 제작 인원들은 탑에 존재한다. NPC가 된 이상 시스템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하고.
즉,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도 조각은 시스템의 의도 하에 배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내가 가지고 있는 보물 지도 조각은 8개, 남은 건 4개.
한두 개라면 다른 NPC가 구매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4개는 너무 많다.
전체 조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니까.
이거 영 꺼림칙한데.
턱을 짚으며 몇 가지 상황을 떠올려 봤다. 가능성 있는 건 하나.
“탑 어딘가에 하이누처럼 버티고 있는 NPC가 있다는 거야.”
대체 어디에?
미궁은 28층에 있다. 그 말은 보물 지도를 주기 위해서는 28층 아래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
이곳까지 오면서 필드란 필드는 전부 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가.
머리를 긁었다. 이 망할 탑은 명확한 게 아무것도 없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의심하며 단서를 찾아야 한다.
이러니까 헌터 중에 신경질적인 사람이 많지.
탑이 헌터 인성 평균을 다 깎아 먹는다.
-휘이익!
상념은 상념대로. 꾸준하게 미궁을 살피며 걷던 중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가볍게 손을 놀려 낚아챈 뒤 화살촉을 살폈다.
독이나 특별한 옵션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검사 결과 평범한 화살.
“이상한데.”
“그엑?”
뭐가 이상하냐며 덕춘이가 나를 바라본다.
“히드라 셸 이후로 너무 쉬워.”
제대로 된 함정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이딴 조잡한 화살을 쏘거나 창날이 튀어나오거나 지뢰가 땅에 박혀 있는 수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이겠지만 미궁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당장 나도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미궁 전체 난이도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함정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어떻게 통로마다 아티팩트를 사용한 함정을 만들겠는가.
하지만 이곳은…….
“단 한 번도 아티팩트를 이용한 함정이 없어.”
그뿐일까.
난 벽면에 튀어나와 있는 기계 장치를 살폈다.
파괴된 함정.
[망가진 상위 환상 함점]
-‘환상 감옥 (A)’을 시전합니다.
-현재 망가져 기능하지 못합니다.
A급 스킬을 발동하는 물건이다.
공들여 만든 함정이 망가져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럴 리가 있나. 장전된 화살 함정도 멀쩡히 작동되는 마당에 아이템을 활용한 함정이 망가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난 경계심을 끌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누군가 먼저 이곳을 지나간 거야.”
그러면 이해가 된다, 위협적인 함정이 없는 이유가.
모두 파괴되었으니까. 이미 작동돼서 없으니까!
망상일까? 아닐 것 같다.
왜 이걸 지금에 와서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 발견 메시지가 없었어.”
다시 한번 메시지 로그를 살펴봐도 똑같다.
미궁에 입장했다는 말은 있었지만 최초 발견, 최초 도전과 관련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떤 놈이?
나보다 먼저 탑을 오른 사람 중에 있는 건가?
불가능한 건 아닌데.
뭘까, 계속해서 드는 불안감은.
“궤엑!”
검을 움켜잡던 때, 덕춘이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비교적 입구가 적은 통로.
그 위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난 빠르게 지도를 살폈다.
미궁에 들어오고 몇 가지 표식을 봤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
처음에는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보일 때마다 지도에 표시했고, 그 결과 대략적이나마 의미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네모는 막다른 길로 가는 곳. 세모와 동그라미는 어디론가 이어져 있다. 그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세모와 동그라미의 차이?
그건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의심하는 건…….
“보물이 숨겨진 장소로 가는 길인 거 같아.”
지도를 살피면 세모가 그려진 곳보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이 더 많다.
적어도 내가 지나쳐 온 길목은 그렇다.
짐작하건대 세모는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지만 좀 더 돌아가는 곳이 아닐까?
동그라미는 보물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목이고.
실제로 세모가 그려진 곳보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에 더 함정이 많았다.
보물과 직결되는 만큼 함정에 공을 들인 게 아닐까?
문제는 이 표식들이 왜 있냐는 것인데.
미궁의 구조를 아는 사람은 미궁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뿐.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 걸까.
분명 하이누가 말했다. 미궁에 잠들어 있는 건 보물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보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미궁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상충되는 정보가 너무 많다.
움직이자. 뭐든 직접 확인하면 명확해지겠지.
“가자.”
“그엑.”
난 덕춘이와 함께 동그라미 표식이 있는 통로로 진입했다.
* * *
복도가 좁다.
아니, 좁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두 발로 걸어갔지만 지금은 엎드려 기고 있다.
다행히 더 이상 좁아지지는 않았지만 움직이기 불편한 건 사실.
이 상태에서 함정이 발동되면 피하기는커녕 대응조차 힘들 뻔했다.
“후우. 후.”
거친 숨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움직여서일까. 아니면 주변 온도가 높아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정신적인 압박감 때문에 심장이 뛰는 탓일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내가 얼마나 안으로 들어왔지? 못해도 30분은 넘게 전진한 거 같은데.
답답하다. 약간 숨쉬기 힘든 것 같기도 하고.
폐쇄 공포증일 가능성도 있다.
움직임이 제약된 공간. 언제 끝날지 모르는 통로를 끊임없이 가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이었다.
왜 좁은 어항에 갇힌 물고기가 폐사하는지 알겠네.
스트레스에는 꽤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탑에 들어오니 말이 쏙 들어간다.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람을 몰아가는데 미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커뮤니티라도 켜서 잠깐 쉴까? 멤버들이랑 떠들다 보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궤에에.”
내 상태가 안 좋다는 걸 느꼈는지 덕춘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한다.
덩치가 작은 관계로 앞장서서 나아가는 덕춘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최고다.”
“궤엑. 궤엑.”
당연하다는 건지 가슴을 탕탕 치는 녀석.
그래. 덕춘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탑에 오래 있는 사람 중에는 모순된 감정이 뒤섞인 이들이 많다.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 외로움을 느끼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정작 만나면 의심부터 하게 되는 그런 감정.
그래서 커뮤니티에 환장하는 이들이 많은 걸 테지만.
아득. 혀끝을 씹었다.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며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네.
약해지지 말자. 탑에서 살아가려면 강인한 육체만큼이나 건강한 정신이 중요하니까.
-파스스
“빛이다!”
그런 내 노력이 통한 걸까.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통로의 끝이 보였다. 다시금 넓어질 기미를 보이는 통로.
기쁜 마음에 힘차게 손을 내뻗는데 권능이 발현됐다.
[소멸 마법진이 가까워집니다!]
명백한 경고.
그와 함께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들었다.
소멸 마법진?
[단발성 기나긴 굴의 소멸 마법진 (S)]
-한없이 긴 통로에 설치된 함정.
-입구부터 공간이 소멸합니다.
S급 함정!
난 어떻게든 몸을 틀어 뒤를 바라봤다.
내가 기어 왔던 통로.
-사아아아아!
그곳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블랙홀? 스파크?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의 파장이 몰려온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거에 노출되면 죽는다.
생존 본능이 소리쳤다. 도망치라고! 저것에 닿으면 안 된다고!
“젠장!”
어쩐지 쉽게 간다 했다.
난 악을 쓰며 앞으로 기었고.
“거의 다 왔어!”
통로가 넓어지는 구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앞으로 내달렸다.
소멸 마법진이 빠르게 다가온다.
50미터? 30미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점점 가속한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쾅! 콰앙!
난 통로를 막고 있는 문을 가격했다.
이내 검을 꺼내 휘둘렀고 파이어 밤을 날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봐 왔던 문과는 재질 자체가 다르다.
벽과 천장을 이루고 있는 것과 흡사한 재질.
-콰직!
“열려. 열리라고!”
문틈 사이로 검을 찔러 댔지만 미세한 흠집만 날 뿐 큰 변화는 없었고.
-스아아아아!
어느새 소멸 마법진과는 10미터 거리.
어떻게든 열어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투루 돌아가서는 안 된다.
[버프 다이스 (B) Lv.3]
[4]
[스플래시 데미지]
[파이어 밤 (A) Lv.7]
[프로즌 브레이크 (A) Lv.7]
난 내가 쓸 수 있는 스킬을 연달아 쏟아 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진다.
급속도로 마력이 떨어졌지만 무시했고.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SS)가 발휘됩니다.]
-콰가가각!
-카아앙!
쉼 없이 터지는 폭발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하나.
문이 열리는 틈!
-까가가가각!
무차별적인 공격이 끝난 뒤 얻은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문이 벌어지기는 했다. 고작 한 뼘 정도로.
소멸 마법진과의 거리는 다섯 걸음.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왔고.
“덕춘아, 들어가.”
난 덕춘이를 벌어진 사이로 밀어 넣었다.
“빨리!”
“궤, 궤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망설이던 덕춘이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덕춘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개구리. 먹는 양에 비해 나름 슬림하잖아.
나를 뒤돌아보는 녀석에게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후우.”
녀석이 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난 몸을 돌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소멸 마법진.
[소멸 마법은 영혼까지 찢어지는 고통을 선사합니다.]
설명 한번 살벌하네.
뭐, 그렇기는 해도.
“곱게 당해 줄 수는 없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소멸 마법진과 닿기 직전.
[안개 질주 (A) Lv.1]
난 안개가 되었다.
고작 한 뼘.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