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 함정은 이제 제 겁니다
탑에 오르기 전 난 수많은 정보를 모았다.
언젠가 탑의 부름을 받을 걸 알기에, 지금의 내 인생에 만족하지 못했기에, 사람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알았기에 힘을 원했다.
그래서 더 탐독했는지 모르겠다. 서점에 나온 몬스터와 던전에 관한 책. 논문. 뉴스.
뷰튜브를 통해 헌터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커뮤니티에서 개인적인 썰도 보았다.
그중에서는 사실 유무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어그로 아니면 뇌피셜로 정리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망자의 램프 괴담.
탑을 등반하다 보면 간혹 본다는 초록색 불빛.
이미 인지했을 때는 함정에 빠진 뒤고, 이후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고스트가 쏟아져 나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백치로 만들어 버린다는 이야기다.
나도 흔하디흔한 자작 괴담인 줄 알았건만.
-파스스.
눈앞에 등장한 초록빛 램프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망자의 램프 안에 들어왔습니다.]
떠오르는 알림.
괴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고.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어디라고 말할 것도 없이 고스트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젠장! 숫자를 세는 건 의미가 없다. 못 해도 수백 가까이는 될 테니까.
살아 있는 자의 정신을 갉아먹는 몬스터.
실체가 없어 물리력은 통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이라도 접촉된다면.
[상태 이상에 걸렸습니다.]
[감각 둔화]
[무기력증]
[의욕 저하]
[정신 착란]
온갖 종류의 정신 디버프를 받는다.
“크흑!”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고스트가 휘몰아친다. 이미 놈들은 하나의 물결.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궤에에엑!”
어째서인지 아무런 데미지를 입지 않는 덕춘이가 반항했지만 놈들에게는 미약한 손짓이었다.
“그에에, 궤엑!”
-푸화아아아악!
특성을 이용한 덕춘이가 불을 뱉어 냈다. 단번에 타들어 가는 고스트 몇 마리.
카오스 속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일순간 주춤해진 놈들이 흩어졌지만 그것도 찰나. 다시금 움직일 기미를 보인다.
그거면 된다.
“잘했어, 덕춘이.”
“궤에.”
놈들이 덤비지 않는 타이밍에 준비해 둔 것을 꺼내 마셨다.
정신 공격 완화 포션, 그리고 저주 해제 포션.
아직 내게는 저주와 정신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스킬이 없다.
기껏해야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준.
[상태 이상이 사라집니다.]
한결 가벼워진 몸.
-아아아아아!
-아아아! 아아!
고스트가 나를 향해 들었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때.
-번쩍!
난 신성력을 터트렸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내게는 신성력이 스텟으로 붙어 있다.
스킬이라 불릴 수준은 아니지만 단순히 움직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히아아악!
-키으으으으!
역시나 고스트는 신성력에 약하다.
만약 조금만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면, 저주나 정신 공격에 대한 내성이 있었다면 대응하기 수월했을 텐데.
“집중하자.”
피드백은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해도 된다.
신성력을 터트려 놈들을 뒤로 물리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저럴지 알 수 없다.
주먹에 신성력을 담아 때려눕힐까?
아니다. 수가 너무 많다. 잡기도 전에 내가 쓰러질 거다.
게다가.
-푸화아아악!
-화아아악!
덕춘이가 불을 뿜을 때마다 고스트 몇 마리가 사라졌지만 금세 빈자리가 메꿔지고 있다.
고스트의 숫자가 상상 이상으로 많던지 사라지는 숫자만큼 다시 생성된다고 봐야 한다.
단순 전투로는 희망이 없다는 말.
그렇다면.
“저걸 노리는 수밖에!”
파앗!
난 앞으로 달렸다.
함정의 트리거가 된 물건은 단 하나. 초록색 빛을 내뿜는 램프!
저게 고스트의 근원이라면 먼저 없애는 게 정답이다.
-우오오오오!
-우아아아!
역시 제대로 고른 걸까. 고스트가 일제히 나를 덮쳤다.
덕춘이가 연신 불을 뱉어 댔지만 역부족.
-콰아아앙!
나 역시 파이어 밤을 터트렸지만 아무런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단순 스킬로는 저지할 수 없는 건가.
신성력이 담긴 공격이 필요하다.
파이어 밤에 신성력을 실어 사용하려고도 했지만.
[파이어 밤은 마력 기반 스킬입니다.]
[신성력으로 구동할 수 없습니다.]
안 된다는 메시지만 떳다.
따로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내게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성 스킬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물은 있지.”
딱 하나. 지금까지 쓰지 않은 성물을 사용할 때가 왔다.
마그나로크로부터 훔친 여섯 개의 성물, 그중 마지막.
[지옥불의 순례자 (AA)]
-불의 신전의 성물
-목표 지점까지 신성한 불로 이루어진 길을 연결합니다.
-불의 인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신성력이 받쳐 주는 한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유일한 불의 신전의 유물.
신성력이 빠져지는 것이 느껴지더니.
-파하아앗!
불길이 치솟았다.
강렬한 기세. 나를 중심으로 일어날 불길이 앞을 가로막는 고스트를 소멸시키며 전진했다.
목적지는 망자의 램프.
-키하아아아!
-아아아아!
불길에 가로막힌 고스트들이 몸을 던져 가며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치이이익
-사아아
신성한 불길에 가로막혀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고, 난 이번 일의 원흉인 램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망자의 램프 (AA)]
-귀속 아이템
-인지할 수 없는 경계를 만듭니다.
-경계에 들어온 자들을 봉인하고, 끝없이 증식하는 고스트를 생성합니다.
-침입자의 정신이 망가질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악의가 느껴지는 설명들.
동시에 의문이 풀렸다. 인지할 수 없는 경계를 만들다니.
원래였다면 한참 멀리서부터 램프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거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드러난 설명이고.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권능을 통해 보여진 설명에는.
[망자의 램프 (AA)]
-램프를 가리면 작동을 멈춥니다.
-램프를 가린 자를 주인으로 인식합니다.
망자의 램프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AA급 아티팩트 잘 가져가겠습니다.
난 망설임 없이 망자의 램프를 보물 주머니에 넣었고.
[망자의 램프 (AA)가 종료됩니다.]
[망자의 램프가 조현수 님에게 귀속됩니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거짓말처럼 고스트의 비명 소리가 멎었다.
-후우우
성물을 비활성화되자 평범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움직인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망자의 램프 영역 안에 들어와 인지 능력이 조작됐기 때문이겠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저주의 여파가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멈춰 있을 시간은 없다.
산성 안개처럼 시간차로 작동하는 함정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지독한 곳.
이제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함정 하나에 AA급 아티팩트를 쓰다니.
“의적이라더니 이것도 장물 아니야?”
“그에에.”
미궁을 만든 놈은 의적이라고 불렸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얼굴도 모르는 인물이지만 잘근잘근 씹어 주고 싶다.
[워터 (E) Lv.1]
그 전에 찬물로 정신도 좀 깨고 목도 축였다.
언제 전투를 치를지 모르니 지금 수분을 보충해 둬야지.
후.
물 마시니까 좀 낫네.
앞으로 뻗어 있는 통로를 지그시 바라봤다.
사방으로 꺾이는 갈림길도.
언제까지 헤맬지 모를 미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로 그 길을 나아가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가야지.”
난 앞으로 전진했다.
용기가 있어서?
아니.
“으흐흐. 이번에 AA급 아티팩트를 얻었으니 다음에는 더 좋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함정이 곧 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서.
빠졌던 힘이 다시 솟아난다.
발걸음도 가볍게 전진했고.
“…그에에. 쯧.”
덕춘이는 띠꺼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 * *
결과적으로 오른쪽 길은 꽝이었다.
수많은 골목을 돌고 되돌아왔다가 다른 길로 가 보고 해 봤지만 항상 끝은 막혀 있었다.
위협적인 함정을 돌파하고 어지러운 구조의 미궁을 헤맨 결과치고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여기 같지?”
“그으으. 궤엑.”
어느 정도 주변 지리를 익히고 나니 보물 지도에서 위치를 특정 지을 수 있었던 것.
혹시나 채우지 못한 지도 조각 위치에 떨어진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현재 나와 덕춘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지도 기준 동쪽에서 살짝 아래. 외곽에 가까운 곳이었다.
난 턱을 짚었다.
내가 얻지 못한 보물 지도 조각은 총 4개.
남쪽 맨 아래와 중앙에 가까운 서쪽 어딘가. 하나는 지도 귀퉁이 부분이라 무시해도 될 것 같다. 거리도 제일 머니 맨 나중에 찾아가면 그만이다.
“가장 가까운 빈칸은 위로 올라가야 하네.”
남은 빈칸은 내가 있는 곳과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
단순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편이었지만 미궁의 특성상 빙 돌아가야 한다.
위치를 파악했으니 이동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가는 길에 숨겨진 함정들이 문제지.
일단 내가 지나온 곳들을 볼펜으로 꼼꼼히 체크해 뒀다. 어떤 함정이 있는지도 적어 뒀고, 몇몇 설명하기 힘든 건 카메라 스킬로 사진을 찍어 뒀다.
“후우.”
대략적인 정보를 정리하고 펜을 파우치에 넣었다.
3일.
미궁을 헤맨 시간이다.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움직일 때마다 긴장하다 보니 정신적인 피로감도 상당하다.
[샤워 (E) Lv.4]
-사아아아.
뜨뜻한 기운이 몸을 훑으며 활력을 가져다 준다.
아. 몸이 살살 녹는다.
진짜 샤워 스킬의 등급을 높인 건 신의 한수였어.
밀폐된 공간. 어디를 가도 똑같이 생긴 통로들.
정신병 걸리기 딱 좋은 곳이었고, 이런 식으로 긴장감을 풀어 주지 않으면 금방 지쳐 나간다.
덕춘이야 태생 자체가 탑이라서 그런지 별 문제 없는 것 같지만.
“이제 4일 남았나.”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미궁에 몇 개 없는 안전지대.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2일 차 때부터 위치를 파악했고 속도가 붙었다. 4일이면 충분하다.
미궁의 구조도 대충은 알겠고 몇 가지 패턴도 깨달았으니까.
먼저 모든 통로에 함정이 있지는 않다.
단순한 기계 장치 함정이나 독이 묻은 화살,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덩이 같은 거야 흔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런 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니까.
진짜 위험한 함정들은 긴 복도나 옆으로 꺾이는 골목에 주로 포진되어 있었다.
시야가 제한되거나 긴장감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곳들.
특이 사항이 하나 있다면.
“몬스터는 아직까지 못 봤어.”
미궁 내부에는 몬스터를 배치하지 않은 걸까?
고개를 흔들었다.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몬스터는 생명력이 질기다. 먹을 게 없으면 동족이라도 물어 뜯어 생존할 놈들.
게다가 이곳은 탑 아닌가.
시스템의 영향으로 원래라면 다 죽었을 몬스터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
난이도를 봤을 때 1, 2성 같은 놈들은 있을 리가 없고 최소 3성급 몬스터가 준비되어 있을 거다.
“어쩌면 4성급이 있을 수도 있고, 그치?”
“궤엑.”
최대 4성급까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5성급은 제외다. 이곳 시설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5성급을 풀어 둘 정도는 아니다.
당장 나도 문을 부술 수 있는데 5성급이면 어떨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함정이란 함정은 죄다 발동시키게 만들었을 거다.
공들여 만든 미궁이 기능을 잃는다는 것.
13층에서 만났던 5성급 몬스터 화갑룡만 봐도 그렇다. 그런 놈을 가둬 놓기에는 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염두해 두기는 하자.
대충 생각을 마치고 커뮤니티를 살폈다.
메시지가 와 있다. 발신자는 이준석.
난 메시지를 클릭했고.
“오호?”
내용을 읽은 난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