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푸레고스의 미궁
눈을 뜬 곳은 어두운 방이었다.
방이라기에는 아무것도 없기는 했지만, 살벌하게 벽지조차 발리지 않은 벽과 천장.
창문은 당연히 없었고, 조명이라고는 벽 틈에서 자라난 발광 이끼가 전부다.
야간 시야가 발동된 덕분에 보는 건 문제 없었다.
“여기가 미궁인가.”
“구에에에.”
덕춘이까지 무사히 들어온 걸 확인한 뒤 보물 지도를 살폈다.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따로 출입구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복잡한 구조. 우선 내 위치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일단 방에서 나가야 하는 건데.
“분명 들어올 때 메시지가 떴었단 말이야.”
그러기 전에 확인할 게 있다.
난 메시지 로그를 살폈고.
[미궁에 있는 동안 상점창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주일간 미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메시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눈의 정령 여왕이 식량을 챙기라고 했던 이유를.
컨디션이나 무장 상태와 상관없이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다.
일주일. 최소 그 기간을 버틸 만큼의 식량이 있어야 한다는 말.
보물 주머니를 열어 식량을 확인했다.
덕춘이도 있는 만큼 여유롭게 사기는 했는데,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갇힐 줄은 몰랐다.
방 입구에 알람 스킬을 설치하고 바닥에 앉았다.
모아 온 식량을 전부 늘어놓자.
“아껴 먹으면 10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
굶는 것까지 염두 해 두면 보름까지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 같다.
중간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으면 일주일은 충분히 버틴다.
작게 심호흡을 하며 미궁 내부를 노려봤다.
이번 유적은 죽지 않고 성공해야 한다.
며칠 후면 새로운 사람들이 탑에 들어온다.
그 전에 30층에 도착해야 대형 길드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 있다.
보다 쾌적하게 포션을 만들 수도 있고.
“혹여나 죽어서 20층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시간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손해다. 그뿐일까. 화조국이 들락거리는 24층도 지나가야 한다.
운이 나빠서 그들에게 잡히면? 글쎄.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힌다. 금천황후가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지도 모르니까.
최악의 경우 그곳에 갇혀 탑을 오르지 못하거나 죽겠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잠시 제쳐 두고.
“워터.”
-사아아아
난 워터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만에 하나 식량을 잃어도 물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겠지.
도로 식량을 보물 주머니에 넣고 문으로 향했다.
방에 존재하는 문은 이것뿐.
-철컹
손잡이를 돌렸고.
[침입자 확인.]
[미궁이 가동됩니다.]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문을 열어젖히는 동시에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쒜에엑!
-티잉!
곧장 날아오는 화살.
혹시나 적이 있을까 싶어 해 봤더니만 화살 공격인가.
저 정도라면 맨몸으로 막아도 될 것 같은데.
“궤에에에.”
덕춘이가 화살 끝을 가리킨다.
뭔가가 있다. 단순한 화살이 아니다.
[폭뢰 화살 (B)]
-폭발과 함께 뇌전이 흐릅니다.
-생명체에 닿기 전에는 발동되지 않습니다.
특별한 옵션이 달린 물건이었지.
화살 하나에 B등급?
“미쳤네.”
이곳.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문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복도 천장에 드물게 박혀 있는 발광석.
야간 시야 스킬이 없었다면 형체나 겨우 알아볼 빛이다.
나야 제법 잘 보였지만.
수상해 보이는 건 없다. 정면으로 쭉 이어진 복도. 화살이 날아왔을 법한 곳에는 길쭉한 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이즈를 보아하니 단발성 트랩인 것 같고.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손에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검을 뽑아 쥐었다.
“덕춘아, 넌 뒤편 주시해. 알겠지?”
“궤에.”
아무래도 뒤통수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피하기 힘들어서.
덕춘이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어차피 일주일 동안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조급해하지 말자.
오감을 키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함정이 어디에 있을까. 몬스터의 기척은? 막다른 길목에 갇힐 가능성도 염두 해야 한다.
고요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데.’
지금쯤 함정이 한 번은 발동해야 한다. 지나온 거리가 그만큼 기니까.
문을 열자마자 트랩이 발동되는 곳에서 이렇게 나온다? 분명 뭔가가 있다.
눈에 힘을 주며 주변을 살폈다.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동됩니다.]
없다. 어떠한 함정도 없다.
맥이 탁 풀린다. 진짜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니. 괜히 긴장하느라 힘만 뺐다.
애초에 이걸 노린 거였나. 긴장하면서 천천히 움직이라고?
잠깐만.
“…천천히 움직여?”
위기감이 엄습했고 난 바로 앞으로 달렸다.
그렇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화살을 날려 긴장감을 끌어올린 후 천천히 움직이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왜? 그야 내가 곧장 움직이면 곤란하기 때문에!
-파바밧!
전력으로 돌진했다. 복도의 끝이 보인다.
불안하게 깜빡이는 발광석.
-취이이이익
이내 어디선가 기체가 뿜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구구궁
복도 끝에 설치된 문이 잠기기 시작했다.
조금. 아주 조금 모자라다.
[파이어 밤 (A) Lv.6]
[스킬 레벨 업!]
[파이어 밤 (A) Lv.7]
-콰아아아앙!
냅다 등 뒤로 폭발을 일으켰다.
온몸에 들이닥치는 충격파. 난 튕겨 나가듯 앞으로 나아갔고.
-철컹
-구구궁
문이 닫히기 직전 간신히 복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떨어진다.
문에 달린 창문을 통해 복도의 풍경이 보인다.
척 봐도 좋지 않아 보이는 기체가 가득 차고 있다.
[산성 안개 (AA)]
-강한 산성을 지닌 안개입니다.
-살과 근육이 녹고 싶지 않다면 멀리하세요.
만약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찌 되긴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았겠지.
어떻게 버티더라도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려 AA등급이 붙어 있는 산성 안개니까.
난 그 부분에 주목했다. 등급이 붙어 있다는 건 스킬 기반의 함정이라는 것. 아티팩트든 마법 공학이든 썼을 게 분명하다.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 오로지 침입자의 죽음을 위해 준비된 함정이 가득하다.
난이도 한번 기가 막히네.
철저한 살인 설계에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덕분에 튜토리얼 구간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쯧. 혀를 한번 차고 고개를 돌렸다.
“세 갈림길이라.”
정면으로 하나 좌우로 하나씩. 셋 중 한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도 뭐가 있을지 모른다.
가능하면 계속해서 권능을 유지하고 싶지만.
“심적으로 너무 지쳐. 가능하면 필요할 때만 써야 해.”
권능이라는 놈은 한두 번 쓸 때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유지하면 빠르게 피곤해진다.
최소 일주일을 버텨야 하는 만큼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한다.
혹시나 숨겨진 함정이 없나 살피고 지도를 꺼냈다.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복도랑 연결된 방. 길게 이어진 복도. 복도 끝에 세 갈래길.
난 눈을 찌푸렸다.
“네 군데나 있군.”
비슷한 구조가 여러 곳 있다. 정확한 위치를 판별하는 건 불가능. 정보가 더 있어야 한다.
각 통로로 이어지는 입구를 찬찬히 뜯어 보자 벽면에 낙서 같은 게 그려져 있단 걸 깨달았다.
“삼각형. 저건 네모. 동그라미도 있군.”
좌측 통로부터 삼각형 네모,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뭘 의미하는 거지?
파우치에서 수첩을 꺼냈다. 일단은 기록해 두자. 의미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혹시 아는가. 미궁을 돌파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 줄지.
문양을 적은 난 수첩과 볼펜을 도로 넣고 오른쪽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
-취이이익
“어엇?”
내가 통로로 나가자마자 입구가 닫힌다.
한 번 길을 선택할 때마다 다른 길이 막히는 시스템인가.
만약 그렇다면 길을 잘못 들 때마다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지게 된다.
간만에 느끼는 악독함이다.
양심적으로 통로는 막지 말지.
불평해 봤자 들어 줄 사람은 없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수밖에.
그 전에.
[파이어 밤 (A) Lv.7]
-콰아아아앙!
닫힌 문을 향해 폭발을 일으켰다.
강력한 화력. 폭탄이나 다를 바 없는 위력은 평범한 철판으로는 막을 수 없다.
통로가 막혔으면 뚫으면 되지. 굳이 미궁 설계자의 의도에 놀아날 필요 있나.
-후우우우
피어올랐던 연기가 가시고 폭발에 직격당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다.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진.
“마법 처리가 된 물건이었군.”
그렇다면 벽과 천장도?
시험 삼아 파이어 밤을 사방에 터트렸다.
운 좋게도 숨겨져 있던 함정 몇 개가 충격의 여파로 망가져 떨어지까지 했다.
정작 원하던 벽과 천장은 멀쩡했지만.
그래도 문은 찌그러지기라도 했건만 이것들은 흠집도 안 난다.
온종일 두들기다 보면 무너질 것도 같았지만 그건 마력 낭비겠지.
지도로 봤을 때 미궁의 규모는 상당한 편. 무작정 힘을 낭비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도 문은 부술 수 있을 거 같아서 다행이네.”
“궤에에에.”
뚜둑.
목을 한번 꺾어 주고 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반응합니다.]
알리오스가 내게 준 권능이 움직였고 검을 휘두를수록 힘이 솟구쳤다.
일 검, 일 검에 최선을 다해 내려친 결과.
-콰직
-콰가가각!
기어이 문을 부술 수 있었다.
후. 숨을 고르고 대략 얼마나 걸렸는지 상기해 봤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대략 3분 정도 걸린 거 같은데.
파이어 밤으로 부순다면 1분이면 충분할 거 같다. 마력은 좀 쓰겠지만.
그래도 탈출구 하나를 만들어 둔 거 같아 기분은 좋았다.
“통로는 미리 부숴 둬야겠는데.”
분 단위의 시간은 위급한 상황 때 굉장히 긴 시간이다.
앞으로 닫히는 문이 있으면 가능한 빠르게 뚫어 놓기로 결심하며 통로를 따라 걸었다.
언제든 반응할 수 있게 검은 앞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며 전방을 살폈다.
-파스스스
종종 권능이 발현되며 숨겨진 함정이 드러났다.
바닥에 구덩이 함정. 상당한 사이즈였지만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뒤로 약간 물러났다가.
-후웅!
그대로 뛰어넘는다!
10미터 길이를 그대로 통과했고.
-콰가가가가!
[굴러 굴러 돌덩이]
-이 돌은 열심히 구릅니다!
-당신을 찌부러트리기 위해서요!
경사로를 따라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바위는.
-콰아아앙!
그대로 걷어차 부숴 버렸다.
단번에 터져 나가는 바위. 사방으로 터져 나간 파편이 벽과 천장을 때리다 바닥에 떨어진다.
고전적인 함정들.
하긴 이런 것들이 없으면 좀 아쉽기는 하지.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위험한 함정들이었는데 이제는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긴장감은 늦추지 말자.
이런 잡다한 함정 외에도 강력한 함정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예로 들자면.
“저런 거?”
와. 저게 여기서 나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