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이곳이 입구인가
하이누의 말대로 거목이 있던 자리에는 보물 지도 조각이 있었다. 총 두 개.
이것까지 합치면.
[의적, 푸레고스의 보물 지도 (8/12)]
-제국을 혼란에 빠트린 보물이 숨겨진 곳을 표시한 지도.
“이제야 좀 지도 같네.”
이전까지는 절반이 비어 있어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여전히 조각 4개가 비지만 어느 정도 모양은 잡혔고, 일부 지역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여전히 보물이 숨겨진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좋게 생각하자. 비어 있는 4개의 칸 중 하나에 있다는 뜻이니까.
“남은 기간은 9일.”
27층에서 하루를 소비했으니 남은 기간 안에 30층을 올라야 한다.
28층으로 올라가기 전, 난 상점창을 열었다.
하이누가 씨앗이 되기 전, 마지막 조언으로 식량을 챙기라고 했다.
필시 이유가 있을 터. 그녀는 알리오스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았고, 보물 지도를 나눠 가진 만큼 미궁에 대해서도 아는 것 같았으니까.
내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당장 나 아니면 눈의 정령을 부활시킬 수도 없는데 그럴 리가 있나.
“덕춘아, 이번에는 맛이 아니라 열량 높고 오래 가는 거로 골라야 해.”
“그에에에.”
덕춘이와 함께 식량을 준비했다.
고기와 채소, 탄수화물도 적당히 들어간 밸런스 있는 도시락은 기본이고, 초코바 비슷하게 생긴 에너지바도 구매했다. 아무래도 이런 게 부피에 비해 열량이 높아서.
물은 필요 없다. 워터 스킬이 있으니.
먹을 거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흐음.”
난 소비 물품을 확인했다.
혹시 모르니 포션도 사 두는 게 좋을까.
화기와 냉기, 독은 내성 스킬이 있으니 패스.
회복 포션도 덕춘이가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저주랑 질병 관련된 것들로 사야겠군.”
아직 이쪽으로는 내성이 없다.
육체가 강화되면서 면역력 또한 높아졌지만, 병과 관련된 스킬을 직접 맞는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동안 압도적인 스펙으로 쉽게 층을 깼다.
적어도 단순 등반에는 문제가 없다. 기껏해야 2, 3성급 몬스터가 나오는데 힘들 리가 있나.
하지만 유적이라면?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 히알틴 유적도 그랬다. 내게 무한 코인이 없었다면, 계속해서 성물을 훔치지 않았다면 마그나로크를 굴복시키는 건 불가능했을 터.
이번에는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왜냐.
“보물을 숨긴 사람은 이게 재앙이라고 했어. 절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길 원하지 않았을 거야.”
미궁을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어떤 함정과 몬스터가 기다릴지 모른다.
보물이라는 물건 자체도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하이누 역시 그건 재앙이라고 했으니까.
그거야 알아보면 그만이고.
[구매 완료]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상점창에서 산 물건을 모조리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컨디션을 살폈다. 아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상태.
마지막으로 레벨 10에 도달한 냉기 저항의 등급을 승급시켰다.
[냉기 내성 (E) Lv.10]
[스킬 승급!]
[냉기 내성 (D) Lv.1]
덕분에 포인트는 거의 거덜 났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이런 거에는 아끼는 거 아니니까.
“가자.”
“그에에.”
난 덕춘이와 함께 포탈을 넘었다.
[28층]
[마지막 섬에 도착하라-제한 시간 05:00]
시야가 바뀌며 드러난 풍경은 얼어붙은 바다.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얼음 알갱이가 뺨을 훑었고, 흐린 하늘에는 태양이 반쯤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해안가. 거기에 극심한 추위가 합쳐지니 황량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으으, 추워라.”
냉기 저항을 승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위가 느껴졌다.
입김 한번 불어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이다 보면 열이 오를 거고 추위도 가시겠지.
“섬이 많다, 그치?”
“궤에에.”
얼어붙은 바다 너머에는 작은 섬 여러 개가 솟아 있었다.
몇 개인지는 모르겠다. 얼핏 보이는 것만으로도 열 개가 넘었으니까.
그 뒤편에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은 시간- 04:55]
제한 시간은 다섯 시간. 충분하다면 충분하고 부족하다면 부족하다.
다행히 몬스터는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해양 몬스터까지 얼릴 추위라.”
내가 디디고 있는 바다, 그 밑에 다 잠들어 있다.
얼마나 지독한 추위였으면 표면뿐만이 아니라 내부까지 얼어붙었을까.
-그르르르
눈깔이 돌아가는 걸 보아하니 완전히 죽은 건 아닌 거 같다만.
저건 씨 서펀튼가? 4성급 몬스터인데.
다른 쪽에는 3성급 몬스터인 펄 샤크 무리도 있다. 얼핏 봐도 열댓 마리.
괜히 날뛰어서 얼음을 깨지 않도록 하자.
-타앗!
앞으로 달렸다. 마지막 섬은 어디에 있을까.
포탈을 먼저 열어야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을 수 있다.
제한 시간이 지나 사망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퉁!
겉으로 튀어나온 암석을 박차고 위로 뛰었다.
수 미터를 올라갔지만 아직 부족하다.
그렇다고 바로 파이어 밤을 쓰면 얼음이 깨질 수도 있으니.
-푸화아아악!
[안개 질주 (A) Lv.1]
안개화를 이용해 가능한 높이 올라갔다.
바람을 타고 수십 미터를 더 이동.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육신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탁 트인 정경을 바라봤다.
세기말의 모습이 이럴까. 나무가 모조리 죽어 거친 흙을 드러낸 섬. 정체 모를 해양 몬스터의 뼈가 곳곳에 튀어나온 바다는 살벌한 분위기를 띠었다.
-콰아아앙!
파이어 밤으로 추락하는 몸을 다시 띄웠다.
마력은 충분하니 이대로 날아가면 될 듯하다. 포탈만 열면 쉴 수 있는 타이밍이 생길 테니 그때 회복하면 그만.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최대한 멀리 있는 섬을 포착했고.
-콰아앙!
-콰앙!
연달아 폭발을 일으켜 그곳으로 날아갔다.
물론 지나온 곳을 카메라 스킬로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공략에 올릴 때 쓰면 좋을 테니까.
세찬 바람이 불어닥쳐서인지 냉기 내성의 레벨이 올랐다는 알람이 뜨문뜨문 떠오른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고.
“저걸 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다른 섬과 멀리 떨어진 공간, 홀로 서 있는 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섬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마치 성처럼 쌓아 올린 건축물.
섬 전체를 요새화한 것인지 나무는 물론이요, 흙바닥도 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섬 구석에 튀어나온 절벽을 보고 섬이겠거니 하는 거지.
일단 가 보자.
난 방향을 틀었고.
-쿠웅!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물 위에 착지할 수 있었다.
둔중한 충격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지만 살짝 저릿할 뿐이었다.
[마지막 섬에 도착 완료.]
[포탈이 생성됩니다.]
망루 위에 생성된 포탈을 보니 이곳이 마지막 섬인 모양.
난 요새화된 섬을 카메라 스킬로 찍은 뒤 바로 공략 글로 올렸다.
카메라에 저장할 수 있는 사진에는 제한이 있다.
미궁에 들어가기 전에 비워 둬야지.
오케이. 공략은 올렸고.
[쁘띠공듀]: 핥짝, 핥짝! 어디신가요!
이제 핥짝이의 위치만 파악하면 된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핥짝이는 나보다 먼저 20층을 벗어났다.
나도 그렇지만 녀석도 히든 피스를 찾아 돌아다녔을 테니 지금쯤이면 나랑 엇비슷한 곳에 있을 터.
28층을 넘어가지 말라고 전해 줘야 한다.
그래야 핥짝이도 보물을 찾으러 갈 수 있지.
[정수리 핥짝]: 나 이제 28층 진입했지. 조만간 30층이다. 후후후.
다행이네, 아직 안 올라가서.
[쁘띠공듀]: 고렇다면 거기 딱 기다리세욧. 전에 저한테 줬던 거 있죠?
[정수리 핥짝]: 아, 그 양피지 조각? ㅇㅇ 등반하다 보니 한 개 더 얻었어.
[쁘띠공듀]: 양피지 조각의 정체를 알아냈지요. 우후훗. 그거슨 보물 지도였답니다!
[냥냥펀치]: 보물?
[정수리 핥짝]: 진짜로? 뭔 보물?
[니머리 탈모]: 난 보물 같은 남자지. 공듀, 우리 언제 봐?
보물이라는 말에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탈모맨이야 평소와 같이 뻘소리를 하고 있지만.
어째 이 녀석은 보물이라는 말에도 관심을 안 보이냐.
[쁘띠공듀]: 28층 어딘가에 보물이 숨겨진 곳이 있어요. 일단 제가 올린 공략 보고 포탈부터 만들어요. 그래야 28층에 머물 수 있죠.
[정수리 핥짝]: 아, 그렇네. ㅇㅇㅋ 일단 클리어 먼저 하고 옴.
[쁘띠공듀]: 저를 돕는 사람들이 보물에 대해 알아보고 있으니 확실히 되면 공략으로 올리겠습니닷!
[냥냥펀치]: 보물 뭐 있는지 꼭 말해 줘랑! 나 실적 쌓아야 함!
[니머리 탈모]: 28층이라… 아, 맞다. 냥펀, 나 이제 20층 들감. 어디 있냐?
[냥냥펀치]: 으냐아아앙…….
[니머리 탈모]: 아니, 넌 또 왜 나 만나기 싫어하냐? 나한테서 냄새나?
[정수리 핥짝]: 응^^.
[냥냥펀치]: 탈모도 점염된뎅… 그러기 싫음.
자연스럽게 잡담으로 넘어가는 녀석들.
그래. 이래야 멤버들이지.
“탈모맨 녀석도 20층 가까이 왔나. 생각보다 빠르네.”
저번에 떠들 때는 17층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진 건가.
다음에 만날 때가 기대된다. 가뜩이나 괴물 같은 녀석이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언젠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 만큼 탈모맨보다 강해져야 한다. 혹시라도 놈이 날 때리면 도망칠 수 있게.
“그럼 찾아보실까.”
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유일하게 인위적인 섬. 미궁이 있다면 이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 기대를 반증하기 위함인가.
[행운 스텟이 발동합니다!]
-콰드드득!
행운이 발휘되었고, 내가 밟고 있는 타일이 부서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우아아아!”
“그에에에에!”
행운이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쿠우웅!
난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타일이 무너지다니. 깜짝 놀랐네.
위를 올려다보니 대략 6미터 정도 되는 거 같다.
방어구도 입고 있겠다, 몸도 튼튼하겠다 다친 곳은 없다.
“숨겨진 공간이군.”
내가 도착한 곳은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 방.
빛이라고는 무너진 복도에서 내려오는 게 전부였고, 벽면에는 철판이 덧붙어 있다.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모양.
-스스스스
행운 스텟은 여전히 발동되고 있다.
방 한가운데 이질적으로 돋아난 문. 그곳에 빛무리가 번지고 있었으니까.
거무튀튀한 쇠로 만들어진 문. 난 손잡이를 잡았고.
[푸레고스의 미궁에 진입하겠습니까?]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가운 알림이 떠올랐다.
푸레고스. 보물 지도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당연하지.”
난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뜨기는 했지만 탑에서 안 위험한 곳이 있던가?
-우우우웅!
강력한 에너지가 나를 잡아끈다.
암전되는 시야.
허공을 부유하는 감각이 온몸을 감쌌고.
[유적, 푸레고스의 미궁에 진입합니다.]
[미궁의 효과!]
[상점창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미궁은 일주일 동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연달아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