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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16화 (116/740)

116화 부활을 부탁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강력한 빛!

난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그것만으로는 빛을 가릴 수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이런 수에 걸려들다니!’

함정일 가능성도 염두 했어야 했는데.

마그나로크와 싸울 때도 이런 식으로 당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만만한 놈들과 싸워서 감을 잃기라도 했나.

자책하며 뒤로 한 보 물러섰다.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니 검을 뻗어 견제했고,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공격할 수 있게 마력을 끌어모았다.

-우우우우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은 빛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다행히 공격은 없었다.

그래도 긴장을 놓지 말자. 어디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게 탑이다.

뜬금없이 4성급 괴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

서서히 시야가 돌아옴을 느끼며 정면을 응시했고.

“음?”

거대한 나무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마법처럼 사라진 거목, 그 자리에는.

“뭐야.”

“그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추위에 맞지 않는 얇은 드레스. 하얀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하얀 속눈썹과 창백한 피부.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병약한 이미지에 건들면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만 보면 위협적이지 않다. 실제로 날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때.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점차 줄어드는 여인.

이내 내 앞에 도달했을 때는.

“흐음. 역시 아직은 힘이 부족하구나.”

내 허리 정도까지밖에 못 오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뭔데.

상황 파악이 안 된다. 반쯤 어이가 없는 나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피며 탄식하고 있었다.

“쯧. 하여간 탑이란.”

오케이. 일단 적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너무 무방비하고 느껴지는 기운도 미약하다. 덕춘이가 뺨 한 대 치면 하늘나라로 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

덕춘이도 같은 생각인지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꼬맹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뭐냐?”

“나 말인가? ‘하이누’라고 하지. 눈의 정령 여왕이라네. 그대의 도움 덕에 잠깐이지만 힘을 되찾았다.”

아. 눈의 정령이었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고.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등반자라면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스스로 무지몽매함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훌륭하도다.”

자연스럽게 칭찬인 척 돌려 까는 꼬맹이를 보며 미간을 잡았다.

눈의 정령이라는 놈이 왜 나무인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사람 모습으로 변한 이유도 모르겠다.

“눈의 정령에 대해 모르는 듯하니 내 친히 설명해 주마.”

하이누가 손을 펼친다. 그와 동시에 거뭇하게 물들었던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복이 쌓이는 함박눈.

그녀의 손바닥 위에도 눈이 모인다.

-사아아아

무슨 마법을 부린 건가. 손바닥에 있던 눈이 형상을 갖추더니, 사람과 나무가 뒤섞인 듯한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이어서 다른 손바닥에도 조그마한 눈이 만들어졌는데 꽤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엘프?”

“옳게 봤다. 눈의 정령은 드루이드와 엘프의 모태가 되는 존재. 나무의 형상을 갖춘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 평소에는 이런 모습이지만 힘이 빠지면 나무로 돌아간다.”

“아니, 그러니까 왜 눈의 정령이 나무 모양이냐고.”

“신의 뜻이란 참으로 신비로우니 그대와 같은 아해가 이해하기는 힘들겠지. 그렇게 따지면 불의 정령은 왜 개의 형상이겠느냐?”

“음. 뭐 놀의 모태라도 되나?”

“호오. 제법 눈치가 좋구나. 불의 정령은 놀과 웨어울프의 모태니라.”

진짜 그게 맞았냐?

골 아프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진화의 흐름인지 모르겠다. 다윈이 들었으면 뒷골 잡았을 거 같은데.

됐다. 저쪽 세계에서는 그런가 보지. 그냥 넘어가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아무튼, 힘 되찾은 거 축하하고 약속한 화관이나 내놔.”

“쯧쯧. 참으로 성격이 급한 인간이로고. 정령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거늘.”

“…내가 너 도와준 건 알지?”

“오랜만에 만난 지성체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니라.”

그러냐? 미안하지만 난 그런 거 하나하나 받아 줄 만큼 여유롭지가 않아서.

계속된 재촉에 하이누가 손에 쥔 눈사람을 털더니 머리카락 하나를 뽑았다.

이어 그녀가 눈을 감자.

-후우우우

[냉기 내성 (E) Lv.9]

[스킬 레벨 업!]

[냉기 내성 (E) Lv.10]

추위가 몰아닥쳤고 어느덧 레벨 9까지 올랐던 냉기 내성이 10으로 올랐다.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손을 따라 머리카락에 주입된다.

은은한 빛과 함께 팽창하기 시작하는 머리카락.

하얀색 선이 굵어지고 나무 덩쿨의 형상을 갖추더니 이내 꽃이 피었다.

눈처럼 하얀 꽃.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눈의 정령 여왕의 화관 (AA)]

-눈의 정령 여왕이 직접 만든 화관.

-유일하게 남은 눈의 정령의 힘이 담긴 진귀한 물건.

-착용자에게 ‘눈꽃의 가호 (A)’를 내립니다.

-드루이드와 엘프와의 친화도가 상승합니다.

“받거라.”

하이누가 내 손에 화관을 건네 줬다.

자그마치 AA급 아이템.

여왕이라더니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

사실 툭 치면 쓰러질 거 같아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눈빛에 불손함이 가득하구나.”

“착각이겠지. 존경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어.”

시선을 돌리고 릴카의 퀘스트를 확인했다.

화관 자체도 탐이 나기는 했지만 퀘스트가 우선이다.

AA등급 아이템이 귀하기는 하지만 난 100층까지 올라야 한다.

상위층에 올라가면 더한 것들도 많이 얻겠지.

괜한 욕심을 부려서 릴카와의 관계를 깰 필요는 없다.

어디 보자. 퀘스트 재료 목록이.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2)]

-애꾸 예티의 눈물 (30/30)

-눈의 정령의 화관 (0/1)

“그대로네?”

눈을 감았다 다시 봤지만 진짜다.

아니, 왜? 화관 얻었잖아.

“설마 여왕의 화관이어서?”

“궤에에.”

그런 것 같다며 덕춘이가 고개를 까딱인다.

여왕의 화관이면 더 좋은 건데 그걸로 때우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별수 있나. 릴카가 원한 건 메이드 인 여왕이 아니라 평범한 눈의 정령인 것을.

하이누한테 부탁해서 다른 정령의 도움을 받…….

잠깐만.

“유일한 눈의 정령?”

다시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지만 분명하다.

난 하이누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말이 맞다. 눈의 정령은 모두 사라졌지, 나를 제외하면 말이야.”

“평범한 눈의 정령은 없는 건가?”

“그렇지.”

이런 낭패가.

그럼 사실상 깰 수 없는 퀘스트 아닌가?

릴카가 그동안 작업을 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퀘스트를 주면 뭐 해. 깰 수가 없는데.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하다.”

“아직?”

희망 어린 말에 난 기대감을 가졌고.

“눈의 정령이 부활한다면 가능하지. 이 몸은 여왕. 나를 말미암아 새로운 눈의 정령이 태어날 수 있다.”

하이누가 내게 다가와 손짓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자 입꼬리를 올린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구나.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와준다면 네가 평범한 화관을 얻을 수 있도록해 주마. 물론 그 이상의 대가도.”

-띠링

[눈의 정령 부활-유일 퀘스트]

-오랜 시간 동안 냉혈괴목에 힘을 빼앗긴 하이누는 씨앗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씨앗은 세계수가 될 것이며, 눈의 정령은 부활할 겁니다.

-그녀를 도와 적절한 장소를 찾아봅시다.

-보상: 눈의 정령 화관, 정령의 친구 (칭호), 부활의 씨앗.

화려한 보상에 눈길이 간다.

게다가 유일 퀘스트라. 단 한 명만이 가능하다.

내가 얻은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 역시 유일 퀘스트를 통해 얻지 않았던가.

“힘이 많이 쇠약해졌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도 버겁군.”

털썩. 하이누가 주저앉았다.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나는 곧 씨앗으로 돌아간다. 아이템으로 분류될 테니 이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이니라.”

그녀의 말대로 점차 그녀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퀘스트라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차분하게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널 묻어 버리면 된다 이거지?”

“…맞는 말인데 어감이 좀 그렇구나.”

하이누가 투덜거렸지만 무시했다.

묻히면 묻히는 거지.

“적절한 장소라는 게 어디지? 알아야 널 묻든가 하지.”

“묻는 게, 됐다. 하이 엘프나 드루이드 프리스트를 찾거라. 도움을 줄 것이다.”

엘프와 드루이드라. 어디서 만날지는 알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안전지대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그곳에는 다양한 NPC가 살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녀석 27층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알고 있지 않을까?

“너, 혹시 보물 지도 아냐?”

그동안 모은 보물 지도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 줬다.

[의적, 푸레고스의 보물 지도 (6/12)]

-혼란스럽던 제국의 남작 푸레고스 메르딘은 의적이었습니다.

-수없이 진행되던 영지전, 고통받는 제국민을 위해 싸움의 원인을 훔치기로 결심.

-끝내 모두가 탐하던 보물을 훔쳐 봉인하는 데 성공합니다.

-푸레고스 메르딘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보물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어느덧 반 정도 모은 보물 지도.

저걸로는 부족하다. 당장 다음 층에 보물이 숨겨진 미궁이 있으니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이, 이걸 어디서 났느냐!”

졸린 눈으로 바라보던 하이누가 눈을 크게 떴다.

“등반하면서 얻었는데?”

“허어. 분명 찢어 나누었거늘 어찌하여.”

보물 지도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

난 좀 더 정보를 캐물었고.

“그레이트프론 제국의 재앙이다. 이 몸과 동료들이 남작을 도와 봉인시켰지. 지도 조각 역시 나누어 가졌다.”

그녀가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눈앞의 꼬맹이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레이트프론? 그거 알리오스랑 페니가 있던 제국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걔한테 물어볼걸.

아쉬웠지만 이미 그와 작별을 한 후였다.

“둘을 아느냐?”

“같이 밥도 먹고 그랬지.”

“흥미롭구나. 그놈 성격이 개차반인데, 크흠.”

본의 아니게 본심이 나왔는지 하이누가 헛기침을 했다.

그건 관심 없고.

“그래서 보물에 대한 정보 좀 말해 봐. 지도 조각이랑 꼭 필요하다고.”

“그렇겠지. 미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니.”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하이누가 내 눈을 응시했다.

“다른 이라면 말하지 않았겠지만 너라면 괜찮겠지. 눈의 정령의 명운을 쥔 자이니.”

그녀가 가는 손가락으로 거목이 있던 자리를 가리킨다.

“내가 있던 곳 아래, 지도 조각 두 개가 있, 크흠!”

-꾸드드득

거칠게 기침을 한 그녀의 몸이 더욱 작아진다. 웅크린 몸을 감싸듯 단단한 껍질이 돋아났다.

시간이 얼마 없음을 직감했다.

“다른 조언은 없어? 보물의 정체라든가 위치라든가!”

난 다급히 물었고.

“식량을 충분히 챙기거라.”

-파앗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씨앗이 되어 버린 그녀가 손에 잡혔다.

야구공보다 좀 더 큰 수준.

[세계수의 씨앗 (???)]

-엘프가 어머니로 모시는 거목. 드루이드가 신성시 여기는 세계의 기둥이 이 안에 잠들어 있습니다.

-세계수는 곧 눈의 정령계. 하나의 세계와도 같습니다.

난 잠시 세계수의 씨앗을 바라봤다.

본의 아니게 수행하게 된 퀘스트. 보상도 보상이고, 릴카의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씨앗이 되는 중에도 도움을 준 여왕을 위해서도.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 씨앗을 넣었다.

“파 보자.”

“궤에에.”

난 거목이 있던 자리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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