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25층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울렸다.
발신자는 냥냥펀치.
[냥냥펀치]: 공듀공듀, 너 무슨 사고 침?
사고를 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냥냥펀치]: 금천황후가 너에 대해서 묻던데 우리 쪽 NPC들 24층으로 출발함.
[냥냥펀치]: 24층인 거면 일단 ㅌㅌ.
“이런. 아침에 출발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그에에에.”
금천황후라는 NPC 보통이 아니다.
통보한 시간보다 일찍 움직이다니.
알리오스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금천황후는 나에게 관심이 있다.
“빠르게 움직이자.”
“궤엑.”
설산을 빠르게 내달렸다.
그때마다 발자국이 남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눈보라가 치고 있으니 흔적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질 테니까.
문제는.
“아직 포탈을 못 만들었다고.”
최소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고 포탈을 만들었더라도 죽은 뒤 재도전을 하여 다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눈꽃숭이 30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
조화국 사람들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지금 빠르게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흔적이 확실하게 남아.”
핏자국도 눈이 덮이면 흔적이 줄겠지만 30마리에 달하는 눈꽃숭이를 사냥한 흔적은 글쎄.
눈이 많이 내리고는 있지만 조금은 남지 않을까. 핏자국이든 뭐든 간에.
알리오스가 말했다. 이번에 오는 조화국 사람들은 정보 수집에 능한 자들이라고.
내 위치를 파악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우우우우우
공기가 울린다.
저 멀리, 산맥 아래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검은 실루엣 몇 명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화국 사람들일 게 분명했고.
-파앙! 팡!
인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대는 NPC. 마땅한 은신 스킬도 없는 내게 모습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니. 있더라도 금방 들키겠지.
여기서 움직이면 흔적이 남을 테니 추적당할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아, 씨. 여기서 또 죽네.”
-푹
보물 주머니에서 혈괴의 저주 단검을 꺼내 허벅지에 찔렀다.
빠르게 퍼져 나가는 저주.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었지만 가만히 때를 기다렸고.
[사망했습니다.]
메시지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부디 내가 있던 자리가 눈으로 덮여 있기를.
* * *
조현수가 사라진 직후.
일단의 무리가 설산을 올랐다.
분명 눈을 밟고 있었지만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굉장한 수준의 경공법.
화조국의 증명패를 찬 채 주변을 살피던 NPC 하나가 손을 들어 올린다.
“이곳에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 미세하지만 한 곳이 가라앉아 있어.”
정확히 조현수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매서운 눈이었지만 주변 NPC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
“주변보다 낮은 지형이라서 그렇겠지. 주변에 다른 흔적은 없다.”
“고작 20층대를 오르고 있는 등반자가 우리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해.”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없잖아.”
타당한 말이었다.
그들은 정보 수집에 특화되어 있는 이들.
다른 NPC라면 모를까 한낱 20층대 등반자가 속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동료의 말을 인정하는지 말을 꺼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천황후의 명령으로 새벽같이 이곳을 찾아왔다.
받은 명령은 두 개.
알리오스 페르노와의 계약.
24층에 존재할지 모르는 등반가에 대한 정보 수집 및 확보.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금천황후 밑에서 일하는 자들이었고 그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계속 수색하면서 움직여라. 금천황후께서 그자와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쁘띠공듀 말인가?”
“확실하지는 않다. 쁘띠공듀인지, 관련된 누군가인지 확인해 보면 알겠지.”
“알겠다.”
-파앙!
동시에 산개하는 이들.
천천히, 시간을 가지며 동이 틀 때까지 수색하던 이들이 저택으로 향했다.
그들은 몰랐다. 이미 조현수가 20층 안전지대로 사라진 것을.
* * *
난 이틀간 20층 안전지대에 머물다 위로 올라갔다.
원래는 20층으로 돌아온 김에 릴카한테 애꾸 예티의 눈물을 건넨 후 바로 위로 향하려고 했지만.
“릴카가 잠시 있으라고 했었지.”
화조국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나를 찾았는지는 모른다.
알리오스의 말대로 날 견제하는 걸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직까지 난 NPC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대신 릴카가 도움을 줬다.
24층에 올라가 조화국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뒤 안전하다 싶으면 말해 준다 했다.
그 결과가 이거.
“이틀 동안이나 알리오스의 저택에서 머물렀을 줄이야.”
“그에에에.”
조화국 사람들은 이틀 동안 나의 단서를 찾았다.
명목상으로는 알리오스가 거래할 수 있는 세공품을 선별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웠다고 하는데 또 모르지. 언제 얼굴을 들이밀지.
마음 같아서는 알리오스한테 들러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릴카의 조언대로 바로 25층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난 잠시 알리오스가 있을 설산 정상을 바라봤고 이내 포탈로 발을 옮겼다.
-우우우우웅
포탈을 넘어서자 설산이 아닌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25층]
[실험실 전력 가동 (0/3)]
역시나 추운 날씨.
한 가지 다른 게 있었다면.
“건축물?”
이전까지의 필드와 다르게 인위적인 건축물 안이었다는 것.
보기에는 무슨 연구실 같다.
철판으로 덮인 벽과 깨져 버린 전구.
몇몇 구석에서 빛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턱없이 약했다.
[야간 시야 (E) Lv.5]
물론 나한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밀었다.
원시적인 문명이나 자연 그대로였던 필드와 달리 이곳에선 과학의 흔적이 엿보인다.
당장 옆에 놓인 환풍구와 소파, 벽에 걸린 모니터가 그러하다.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사이즈가 하나같이 작다는 것?
천장도 낮아 까치발을 들면 머리가 닿을 지경이다.
흩뿌려진 종이와 알 수 없는 물품들.
바닥에 굴러다니는 파일철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언어였지만 권능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아이스 쉘터 붕괴 시나리오]
-…마지막 인류의 희망이 수명을 다해 가고 있다.
-발전기와 공기 순환 시스템의 80퍼센트가 파괴… 몬스터의 습격…….
-우리는 살아남을… 미래의 아이들.
부분부분 지워져 있었지만 몇 가지 문장은 읽을 수 있었다.
아이스 쉘터라.
아무래도 이곳을 그렇게 부르는 거 같은데.
예전이라면 무슨 소린지 몰랐겠지만 지금은 안다.
“이곳도 멸망한 세계의 흔적인 것 같지?”
“그에. 그에.”
내 말에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해 보면 16층에서 겪었던 일도 비슷하다.
얼음과 불의 신전. 그것과 관련된 환상과 언데드가 된 사람들.
그들 역시 멸망한 세계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의 존재들이 몬스터가 되는 건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아직까지 몬스터에 대한 정보는 많이 풀리지 않았으니까.
뭐, 모든 몬스터가 그럴 거 같지는 않지만.
어찌 됐든 기분 나쁜 곳이다.
지구도 이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
시선을 돌려 클리어 조건을 찾았다.
전력 가동이 목표라고 했었지.
어딘가 전력실이 있을 거다.
보통 지하나 구석진 곳에 있으니 내려가 보는 게 좋을 듯한데.
-아아아아아
통로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바로 검을 뽑았다.
건축물 안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탑. 몬스터가 없을 리 없었다.
“어떤 놈인지 봐 보자고.”
덕춘이를 어깨 위에 올리고 천천히 전진했다.
기껏해야 2성급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이 컸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위이이잉
들리는 거라고는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기계 잡음뿐. 인기척은 없었다.
불안하게 깜빡이는 조명이 시선을 잡아 끌었지만 정신을 다잡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세 갈림길.
선택해야 한다. 왼쪽과 우측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겠고, 정면은 반쯤 열리다 만 문이 있다.
서늘한 냉기가 그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냥 냉기가 아니었다.
[독 내성이 발동합니다.]
독성이 섞여 있는 공기.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다.
뭔지는 몰라도 안에 들어가 보는 게 좋겠지.
덕춘이도 독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으니 문제없을 거다.
-끼이이이익
망가진 문을 밀었다.
안에 기계 장치가 있는지 저항감이 제법 있었지만 내 근력도 보통은 아니라서.
“으음.”
방 안으로 들어간 난 미간을 찌푸렸다.
창고로 보이는 공간, 원통형 드럼이 엎어져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뒤섞여 있다.
이 정도 기온이면 얼어붙는 게 정상이련만 어째서인지 액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프레노옥토토신]
-부동액의 일종.
-물과 결합하면 독성을 내뿜습니다.
권능으로 떠오르는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물질. 지구에도 저런 게 존재할까?
잠시 액체를 보다가 상점창에서 유리병 몇 개를 구매했다.
“챙겨 두면 쓸 데가 있겠지.”
혹시 아는가. 몬스터를 사냥할 때 쓸모가 있을지.
대략 여섯 병 정도 챙겼으니 3리터 정도 얻었다.
따로 챙길 만한 건 없을까 싶어 둘러봤지만 상한 게 분명해 보이는 통조림이나 딱딱하게 굳은 기름, 약품으로 보이는 거 몇 개가 전부다.
약품은 패스. 어차피 쓸 줄도 모른다.
“진짜 현대 기술이랑 비슷하네.”
선반에 올려진 체크 리스트와 보안 카드. 단말기 비슷한 물건을 보니 더 그렇다.
좋지 않은 소식이다.
지구와 비슷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곳도 멸망했다는 뜻이 되니.
샅샅이 창고를 뒤지던 중 바닥에 묻은 흙을 발견했다.
바닥에 얼굴을 가까이 댄 채 바람을 불자 흙가루가 흩어진다.
아직 굳지 않았다.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는 이야기.
“사람 발자국은 아닌데.”
정사각형으로 찍힌 발자국.
다른 흔적과 조합해 보니 다리가 네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사이즈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최소 내 허리까지는 오는군.”
발자국이 있는 곳 근처에 찌그러진 철제 선반을 보아하니 그쯤 되지 싶었다.
어쩌면 더 클 수도 있고.
쇳덩이를 찌그러트린 걸 보아하니 꽤 무겁고 단단할 것 같은데.
“궤에에에.”
한창 추리하고 있을 때 덕춘이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덕춘이가 가리킨 곳은 창고 구석, 비상 통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비상구의 등 아래로 단단하게 잠긴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꾸드드득
힘을 줘 봤지만 열리지 않는다.
폭발이라도 일으켜 봐?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폭발 소리를 듣고 몰려들 몬스터는 걱정되지 않았지만 이곳, 아이스 쉘터는 온갖 약품과 기재가 있다.
연화성 물질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운이 나빠 대폭발이 일어나 전기실이 망가지면 포탈을 열 방법이 없다는 뜻.
안전지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무조건 거쳐야 하는 24층에 화조국 NPC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괜한 위험은 짊어질 필요는 없는 법.
난 방을 빠져나왔고.
-위이잉, 철컥
“하. 진짜.”
아이스 쉘터를 지키는 몬스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