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10화 (110/740)

110화 네 번째로 소중한 것

단순 정신력으로 NPC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럼 정석대로 가면 그만이다.

알리오스는 지금껏 페니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이 교류만 했고, 탑 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천황후와 계약해 보석 세공사로 일을 한다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지.”

탑 내에서 생산 활동을 하니까.

벌어들인 포인트로 생존 권리를 찾으면 된다.

“고, 고맙다!”

“악!”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알리오스가 날 끌어안았다.

어디 땀내 나는 게!

정강이를 차며 벗어나자 그가 실실 웃는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군.”

“방심하지는 마. 넌 두 사람 몫을 벌어야 해.”

“뭐든 끈기 있게 하는 게 내 장점이지.”

그러니 검귀가 된 거겠지.

“그런데 넌 릴카랑도 인연이 있지 않았나?”

“릴카는 안 돼. 걔는 개인 거래 위주야.”

굳이 친분이 있는 릴카가 아닌 금천황후를 고른 이유.

릴카가 여러 NPC와 친분이 있고 수많은 구역을 돌아다니는 건 맞지만 결국에는 혼자다.

평소 돌아다니는 꼴을 보아하니 일도 엄청 많은 것 같지도 않고.

반면에 금천황후는 금전적으로 여유로울 뿐만 아니라 화조국이라는 개인 상단을 이끌기까지 한다.

취급하는 상품도 다양하고, 대량으로 거래를 하니 지속적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좋다.

내 설명을 들은 알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신세를 졌군.”

“됐어, 앞으로 할 것만 생각해. 돈 많이 벌어야지.”

턱으로 페니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헬다잉 키친도 종종 불러야 할 거 아니야. 저렇게 좋아하는데.”

“물론이지. 매일 부를 수도 있어.”

자신감 있게 답한 알리오스가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크흠. 저거 한 번 부르는 데 얼마나 들지?”

“정가로 주문하면 95,000포인트.”

“95,000포인트?”

“어. 첫 주문이면 45,000포인트짜리 사도 저걸로 업그레이드해 준다. 참고해.”

어째 넋이 나간 것 같은 녀석의 등을 밀었다.

“멍 때리지 말고 가 봐. 가서 페니한테 점수 따야지?”

“그, 그렇지!”

다시 신이 나서 페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녀석.

좋겠다. 단순해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던 때.

[알리오스 페르노와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SS)의 동화율이 상승합니다.]

“오? 이런 것도 있었나?”

권능의 동화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떴다.

딱히 노린 것은 아니지만 나야 땡큐지.

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저택을 한 바퀴 산책한 후 합류했다.

식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디저트와 음료가 나오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연주자가 첼로를 연주하기까지.

비싸기는 해도 서비스는 확실하네.

“달달하구만.”

테이블 위에 올려진 마카롱을 집어 먹었다.

탑에는 단 게 부족한 편이라 한 번씩 당 충전을 해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혀가 살살 녹네.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주위를 살폈다.

알리오스는 페니 옆을 졸졸 쫓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고.

덕춘이는.

“궤에에. 그헤헤헤.”

만족스럽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역시 성장기. 많이 먹어라 그래.

“조현수 고객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흐뭇한 얼굴로 덕춘이를 바라보던 때, 관리인으로 보이는 NPC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남색 피부. 녹안에 외뿔을 지닌 사내.

정장 가슴에는 이름이 적혀 있다.

존 페딕.

“무슨 일이시죠?”

“이번 주문에 감사를 표하려고 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존.

뭘 그런 걸로.

“그리고 이거.”

고개를 든 존 페딕이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다.

세련된 블랙에 붉은 인주가 찍힌 것이었는데.

“초대장입니다. 헬다잉 키친에서는 주기적으로 파티를 열죠.”

파티? 탑 안에서도 그런 걸 하나?

헬다잉 키친은 기본적으로 출장 뷔페다. 거기서 파티를 왜 열어?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주는 것이니 받았다.

초대장을 뒤집어 보니 멋들어진 글씨체로 VIP가 적혀 있다.

아직도 내가 아는 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헬다잉 키친을 이용하시는 고객님 중 첫 주문에 스페셜 세트를 주문하시는 분은 많지 않죠. 비록 첫 구매 혜택이라 하더라도요.”

그야 그렇겠지.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밥 한 끼 먹는데 45,000포인트를 태워.

나도 덕춘이가 멋대로 주문하지 않았다면 쳐다도 안 봤을 거다.

“앞으로 자주 이용해 주시길 바라는 것도 있습니다만…….”

잠시 말을 끊은 존 페딕이 씽긋 웃었다.

“저희는 각 세력과 집단, 개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재료 수급팀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한마디로 돈 많고 앞으로 강해질 것 같으니 친하게 지내자 이런 건가.

겸사겸사 단골도 되고, 필요하면 식재료로 쓸 몬스터 사체도 얻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무엇보다 단 한 번의 주문만으로 나를 높게 평가해 줬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고객님을 상대했지만 조현수 님처럼 NPC와 친밀한 자는 오랜만에 봅니다.”

옷을 가다듬은 존 페딕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개인적인 호감의 표시기도 하니 때가 된다면 초대에 부응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깔끔하게 말을 끝낸 그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가 세심하게 서비스를 관리하는 모습에서 프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어디 한번 봐 보자.

[헬다잉 키친 파티 초대권]

-선별된 고객에게 건네주는 물건.

-맛보고 마시고 즐기고!

-VIP의 특권을 누려 보세요!

권능으로 확인해서는 영 모르겠다.

뜯어 볼까도 했지만.

[헬다잉 키친 파티 초대권]

-파티가 개최되기 하루 전에 개봉됩니다.

-강제 오픈 시 효력이 사라집니다.

주의 문구가 적혀 있는 관계로 얌전히 인벤토리에 넣어 두기로 했다.

머리에 깍지를 끼고 편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흩날리는 설산.

유일하게 눈이 내리지 않는 정상.

하얀 저택과 웃고 떠드는 알리오스와 페니.

“평화롭네.”

오늘 하루는 좀 쉬어도 될 것 같다.

* * *

페니의 부활 기념 파티가 끝나고 다음 날.

알리오스가 내준 방 침대에서 자던 난 슬며시 눈을 떴다.

“일어났군.”

침대 옆에는 알리오스가 와 있었다.

“어. 인기척이 들려서 말이지.”

“좋은 습관이야. 잘 때만큼 무방비할 때가 없으니까.”

덕춘이는 아직 자고 있고, 창문 밖은 아직 밝지 않았다.

새벽 4시쯤 될까.

“짐 챙겨서 나와라.”

그 말을 끝으로 알리오스가 방 밖으로 나갔고, 나 역시 졸린 덕춘이를 갑옷 속에 품고 밖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저택과 거리가 떨어진 공터.

두툼한 기둥이 몇 군데 꽂혀 있다.

알리오스가 훈련할 때 쓰는 곳인 것 같은데.

“새벽부터 뭔 일이냐.”

“좋은 날이야. 나한테는 변환점이 되는 날이고.”

뭔 일이냐니까 딴소리를 하고 있다.

난 목을 긁적였다.

그의 말과 달리 정상 경계 밖은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내게는 야간 시야 스킬이 있는 만큼 보는 건 문제 없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오늘 아침에 화조국 사람이 오기로 했다. 오늘부터 보석 세공사로 일하게 되겠지.”

“빠르네.”

한 며칠은 있다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금천황후가 알리오스가 만든 브로치를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다.

“왕래가 이어질 거다. 넌 그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왜지?”

가능하면 이곳에 좀 더 머물면서 알리오스에게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와 대련하는 것만으로도 권능 동기화율이 빠르게 올랐으니까.

“금천황후는 상인이며 동시에 수많은 걸 모으는 수집가지. 정보도 그중 하나야.”

알리오스가 나와 자신을 가리킨다.

“네가 계승자인 것도 알아차릴지 몰라. 이곳으로 찾아올 화조국 사람 목록을 확인했다. 전원 정보 수집에 능한 녀석들이었어. 쁘띠공듀에 대해서도 언급하더군.”

금천황후가 내 정보를 원한다?

어떤 목적으로?

그가 말했었다. 계승자가 된 시점에서 적대적인 NPC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기는데.

“계승자라는 거 NPC 한 명한테만 받을 수 있냐?”

“아니. NPC야 한 명밖에 고를 수 없지만 등반가는 여러 NPC의 계승자가 될 수 있지.”

“그럼 크게 걱정할 거 없는 거 아닌가. 혹시 알아? 나를 계승자로 삼으려는 걸지도.”

“금천황후가 계승자를 뽑았다는 소문이 있다.”

“응?”

“자세한 건 몰라.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역시 나 말고 다른 계승자가 존재하는 건가.

“계승자는 결국 맞붙게 되어 있지.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금천황후가 네 정체를 알게 되면 견제할 수도 있어.”

“맞붙는다는 게 뭔 소리야.”

“탑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

짝. 그가 박수를 쳐 주위를 환기했다.

“그녀의 목적이 뭔지 모르는 이상 너와 나의 관계를 숨기는 게 좋아.”

동의한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렇기는 해도 무작정 헤어질 수는 없지. 앉아 봐.”

그가 손짓했고 우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일단 넌 검에 큰 재능이 없어.”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술이라고 해 봤자 밖에 있을 때 틈틈이 체육관에서 배운 게 전부.

홀로 제국과 싸웠다는 녀석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겠지.

“불만이냐?”

“아니, 적당해. 나도 딱 그 정도였거든. 평범, 약간의 센스, 악바리.”

이건 의외다. 저 강한 녀석이 평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넌 천재가 뭐라고 생각하지?”

“음. 한 번만 가르쳐 줘도 그 이상을 해내는 것?”

“맞아. 그게 천재다. 그럼 천재의 약점은 뭘까.”

뜬금없는 질문.

천재의 약점이라.

“똑같이 노력한다고 가정했을 때 천재는 약점이 없지 않나?”

남들과 똑같이 노력해도 앞서 나간다면 사실상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공평하다, 약자의 소리라며 욕해도 상관없다.

현실이 그러니까. 자신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 역시 탑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건지 알리오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 똑같이 노력하는 수준으로는 천재를 이길 수 없어. 하지만 천재나 둔재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지.”

“컨디션? 아니면 실전 경험에 따른 성장이라든가.”

“아니. 죽는 거.”

알리오스가 검으로 땅에 선을 그었다.

“이게 네 수준, 천재는.”

선 위로 그어지는 또 하나의 선.

“여기에 있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못 따라잡아. 하지만 모든 성장은 죽으면 끝나지.”

“천재를 찾아서 죽이기라도 하라고?”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너에게는 도움이 안 돼.”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알리오스가 바라봤다.

너 같으면 그럴 거 같아서 답했더니만 어이가 없네.

“자. 왜 죽으면 성장할 수 없을까.”

“그야 죽었으니까. 죽었는데 뭘 어떻게 해.”

당연한 소리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표정이 웃긴지 낄낄대던 알리오스가 머리를 쳤다.

“아, 씨.”

“멍청한 녀석. 죽는다는 건 더 이상 생각도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거다. 우리는 늘 그런 현상을 가까이에 두고 살지.”

그가 손을 펼친다.

“수면. 넌 자면서 꾼 꿈을 모두 기억하나? 자면서도 움직일 수 있어? 정답은 거기에 있다.”

“설마 자면서도 수련하라는 건 아니지?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된다.”

알리오스가 손을 흔들자 구슬 하나와 스킬북 하나가 소환됐다.

“평범한 자가 천재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많은 시간을 수련에 쓰는 수밖에 없어. 지름길은 없다. 하루 24시간을 모조리 써라.”

그가 내민 스킬북을 확인했다.

[수면 전투 복기 (A)]

-수면을 통해 기억 속의 전투를 재현합니다.

-정신적 피로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A급 스킬!

얘가 나한테 이런 걸 줄 줄이야.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찌르고 싶게.”

“어허. 감동받은 눈빛이구만.”

한숨을 내쉰 알리오스가 말을 이었다.

사뭇 진지한 말투.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건 첫 번째가 페니고, 두 번째가 검이며, 세 번째가 나 자신이다.”

그가 쥐고 있던 구슬을 내게 건넸다.

미묘한 보랏빛 기운이 감도는 물건.

“그리고 넌 나와 페니를 구했지. 네 번째로 소중한 것을 선물로 주마.”

[알리오스 페르노의 기억 파편]

-그가 살아오며 겪었던 전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두 가지면 내가 겪어 온 전투를 경험할 수 있을 거야. 경험보다 좋은 선생은 없지.”

툭. 그가 어깨를 쳤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페니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하마. 정상에 서라, 계승자.”

미련 없이 일어선 알리오스가 저택으로 걸음을 옮긴다.

난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고.

-후우우웅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산 밖으로 나섰다.

25층으로 갈 때다.

그때.

-띠링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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