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쓰러지다
계승자에게 자신의 힘을 주는 것.
단순히 교육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익혔던 것, 하나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는 정수를 주입하는 것이었지.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SS)-일부 봉인]
-동기화 (1.7퍼센트)
-현재 동화율이 낮아 본래의 힘을 보이지 못합니다.
한 존재가 일평생 쌓아 온 업적과 삶을 권능의 형태로 만들어 동기화시킨다.
그것이 기본적인 계승 방법이었고.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
“크윽!”
가장 빠르게 동기화를 올리는 방법은 권능의 주인과 직접 맞붙는 거였다.
본인보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알리오스가 내려친 일격에 손이 부르르 떨린다.
처음에는 모든 방법을 이용해 전투를 했다.
스킬이면 스킬, 권능이면 권능. 주변 사물과 아티팩트, 칭호 옵션까지.
물론 턱없이 부족했다. 알리오스의 수준은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으니까.
그렇게 대련을 수십 번.
이후에는 오로지 검술로만 대련을 이어 나갔다.
이전보다 훨씬 불리해진 것이 사실.
새삼스럽게 내가 스킬에 많이 의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빠악!
“으학!”
내 검을 쳐 낸 알리오스가 코에 주먹을 꽂았다.
욱신거리는 코를 잡기도 전에 멀리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에잉. 아직도 못 쓰겠군.”
쯧쯧. 혀를 차는 녀석.
뭐가 그리 불만족스러운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난 코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이 자식, 아까부터 마무리할 때 코를 때린다.
나한테 맞은 걸 복수하는 건가. 좀생이 같으니.
“뭐. 코 때릴 거 알고 있었잖아. 알고도 못 막은 게 잘못이지.”
“두고 봐. 내가 반드시 갚아 준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는 녀석.
말하는 건 짜증 났지만 놈과의 대련은 효과가 좋았다.
어느덧 동기화율이 2퍼센트에 근접해지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없다. 나도 언제까지 널 봐줄 수는 없어.”
그가 손가락을 위로 가리킨다.
“10년 안에 네가 100층을 깨야 하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넌 99층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지?”
분명 봤다.
99층에 도전한 자가 가르침을 내린다고.
알리오스 페르노, 성격은 어떨지 몰라도 실력은 진짜다.
펠라인을 제외하고 99층에 도전했다는 타이틀이 보인 건 그밖에 없다. 실제로 몇 명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NPC는 모두 탑을 올랐던 자.
짐작하기로는 100층을 정복하지 못한 이들이라는 걸.
알리오스가 직접적으로 말해 준 건 아니다. 그것과 관련된 것들은 언급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사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탑의 정체가 뭔지. 어째서 우리가 탑을 올라야 하는 건지. 100층을 정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탑에 들어와 모든 코인을 소모하고 밖으로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 모두 현실에서 헌터로 잘살고 있는데 이들은 왜 탑에 갇혀 있는가.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
이미 알리오스는 자신에게 할당된 정보를 모두 말해 줬다고 하니까.
더 물어봤자 알 수 있는 것도 없다.
뚜둑. 목을 꺾으며 검을 들었다.
손이 찢어질 것 같다.
아니. 찢어졌었다. 덕춘이가 회복시켜 줘서 나았지.
“99층이라.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알리오스가 손가락을 두들겼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19년이 걸렸다.”
“…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
모르기는 몰라도 나보다 월등히 강한 상태에서 탑에 올랐을 텐데 19년이라는 시간을 쓰다니.
“당연한 거 아닌가? 기회는 몇 번 없다고. 최대한 신중하게. 가능성이 있을 때 움직인다. 그게 탑에서 살아남는 기본 원칙이야.”
맞는 말이다.
나야 코인이 무한이지만 다른 이들은 평균적으로 3개, 많아야 5개 정도다.
운이 나쁜 이들은 1, 2개 정도 가지고 있고.
느끼는 위기감 자체가 다르다.
죽으면 다시 도전하지. 이런 생각은 나한테만 통용되는 말이었다.
“아, 미리 말하는데 무리하게 탑을 오르려고 하지 마라. 각 층에서 뽑아먹을 걸 모조리 뽑아 먹고도 운 나쁘면 고꾸라지는 곳이 탑이야.”
“그건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지.”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 아니다. 네가 성공해야 나랑 페니가 잘 먹고 잘살거든.”
어째 말하는 것마다 밉상이다.
저렇게 말해도 은근히 걱정하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언행은 썩 좋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나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시작이다. 검 들어.”
“안 그래도 그럴 거야.”
우리는 다시 검을 맞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하루.
삼 일이 지나는 시점.
“스텝을 의식하면 뭐 해! 저절로 움직이게 하란 말이야!”
“이익!”
-촤아아악!
발이 꼬인 나는 그대로 바닥을 쓸며 굴렀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자지도 않고 대련을 이어 나갔다.
진전이 있었느냐?
조금은 있었다.
“이번에는 코 안 맞았다.”
“땅바닥 구른 놈이 말이 많구나.”
처음으로 놈에게 코를 얻어맞지 않은 것.
그 때문에 자빠지기는 했지만.
움직임도 나아지고 있다. 권능 동화율도 5퍼센트를 넘겼고.
초반에는 폭발적으로 동화율이 오르더니 4퍼센트를 넘기고 나서는 성장이 더디다.
그래도 검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건 사실.
이전의 나와 비교한다면 확실히 강해졌다.
“뭘 좋아하고 있냐. 갈 길이 멀다.”
“나도 안다고.”
어째 칭찬 한 번을 안 한다.
딱히 듣고 싶지도 않지만.
“기초는 어느 정도 잡힌 것 같은데 아직도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툭. 그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차 내게 보냈다.
“검을 무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신체 일부라고 생각해라. 감각을 익히고 몸과 친숙하게 만들어. 검과 친해지는 것. 그게 가장 중요…….”
조언을 하던 알리오스가 말을 멈추었다.
-우우우우웅
저택에서 진동이 울린다.
퍼져 나오는 마나의 파장.
알리오스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페니!”
나는 신경도 안 쓴 채 저택으로 달려가는 녀석.
나도 덕춘이를 챙기고 뒤를 따랐다.
* * *
저택 꼭대기. 페니의 방에서 신선하고 청아한 바람이 불었다.
[부활까지 남은 시간- 10:00]
이전과 달리 수정 속에 갇힌 페니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살아 숨 쉴 것 같은 모습.
10시간 후면 완전히 되살아나는 건가.
신기하다. 나도 여러 번 죽으면서 부활하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니까.
어? 잠깐만. 10시간 뒤면 내일이고. 내일은 그 날인데?
“이런 젠장!”
잠시 잊고 있던 걸 떠올리던 때, 알리오스가 욕설을 내뱉더니 냅다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야! 어디 가!”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따라가자, 덕춘아.”
“궤에.”
그를 뒤쫓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얼마나 빠른지 보이지도 않는다.
뒤져 보면 알겠지.
난 위에서부터 내려왔고 지하실에서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녀석.
테이블에 올려진 물건을 바닥으로 쓸어내리더니 각종 조각칼을 꺼내 든다.
“젠장. 너랑 대련하느라 잊고 있었어. 페니가 깨어나면 줄 선물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온 김에 좀 도와!”
“아니, 내가 왜.”
“아, 좀 도와줘!”
반강제로 그가 자리에 날 앉힌다.
빠르게 굴러가는 눈동자. 그가 지하실 곳곳을 살핀다.
“뭘 해야 하지, 재료가. 그래, 이게 좋겠군.”
결정을 내렸는지 알리오스가 서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낸다.
저거 왠지 낯익은데.
그가 주머니를 쏟자 애꾸 예티의 눈물이 쏟아진다.
“이 자식이? 잊고 있었네. 그거 내놔. 퀘스트 재료야.”
생각해 보니 펠라인 세트를 얻고 계승자가 되느라 이걸 잊고 있었다.
눈물을 뺏으려 했지만 저항이 거세다.
“좀만 쓸게!”
“조금은 개뿔.”
“아, 알았어. 퀘스트 재료로 몇 개나 필요한데?”
테이블에 몸을 밀착한 채 그가 물었다.
“30개.”
“끄응. 좋아. 대신 남은 22개는 못 넘겨줘.”
알리오스가 굉장히 주기 싫다는 표정으로 예티의 눈물을 건넸다.
누가 보면 네 건 줄 알겠다. 그거 원래 내 거거든?
“에휴.”
됐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서 선물하겠다는데 쪼잔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나야 퀘스트만 깨면 그만이니까.
애꾸 예티의 눈물 30개를 챙긴 후 얌전히 물러나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그걸로 뭘 할 건데?”
“원래는 반지랑 목걸이, 귀걸이 세트를 만들려고 했는데 수가 줄었으니 아쉽게나마 목걸이만 만들려고.”
자세를 바로 한 알리오스가 내 쪽으로 조각칼 세트를 넘긴다.
“거기 조각칼마다 번호 적혀 있지? 달라는 걸로 줘.”
“칼은 왜?”
“왜는, 세공해야지. 설마 이걸 바로 쓴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가 예티의 눈물을 집어 든다.
저걸로 충분하지 않나?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혀를 찬다.
“네 눈은 장식이냐? 그냥 지켜보기나 해.”
알리오스가 조각칼을 집더니 세공을 시작했다.
그가 달라는 대로 조각칼을 넘기며 보조한 지 20분.
“봐라. 이 정도는 돼야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세공을 마친 그가 내 쪽으로 눈물을 밀었다.
모양이 달라졌다. 아니, 빛깔마저 바뀌었다.
이전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
[가공된 애꾸 예티의 눈물]
-세심하게 가공된 애꾸 예티의 눈물
-냉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이걸 만든 자는 장인이 아닐까요?
설명도 바뀌었다.
먹을 걸 제외하면 관심이 없는 덕춘이도 입을 딱 벌리고 보석을 구경한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리오스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너, 보석 세공도 할 줄 알았어?”
“예전부터 취미로 많이 했지. 말했을 텐데? 검과 친숙해지라고. 칼날 달린 건 뭐든 옆에 두고 써야 하는 법이다.”
이미 취미 수준은 넘은 것 같은데.
“화조국과 거래하는 보석들도 품질이 좋기는 하지만 내 손을 거치면 작품이 되지. 페니의 방에 있던 것들 전부 내가 직접 재가공한 거야.”
그런 거였나.
가공한 예티의 눈물을 도로 가져간 알리오스가 다음 눈물을 꺼냈다.
“페니는 내가 만든 장신구를 좋아하지. 서두르자. 10시간이 지나기 전에 완성해야 해.”
나와 알리오스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 *
10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결국 목걸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장시간 집중한 탓에 피로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완성품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얼음 눈물의 목걸이 (C)]
-매우 아름다운 목걸이입니다.
-냉기를 물리칩니다.
특별한 스킬을 쓴 것도 아닌데 C등급을 얻었다.
생긴 것도 아름답고.
알리오스가 뿌듯한 얼굴로 목함에 목걸이를 넣었다.
“이제 곧이군.”
우리 앞에 놓인 수정.
꿈을 꾸기라도 하는 걸까.
수정 속에 봉인된 페니의 눈꺼풀이 떨리고 있다.
[부활까지 남은 시간- 00:03]
남은 시간은 3분.
수정의 냉기가 점차 감소한다.
그녀를 가두고 있던 수정이 조금씩 빛을 잃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2분.
수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남은 시간 1분.
-솨아아아아
수정이 가루가 되며 사라졌다.
알리오스가 페니를 끌어안는다.
[페니 쥬니퍼가 부활합니다.]
그동안 알리오스가 지켜온 사람이 부활했다는 알림이 떠올랐고.
[알리오스 페르노가 페니 쥬니퍼의 자아 붕괴를 대신 감당합니다.]
[알리오스 페르노의 자아 붕괴가 가속됩니다.]
“알리오스!”
알리오스가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