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07화 (107/740)

107화 계승자

난 수정에 봉인된 여인을 바라봤다.

권능이 발휘되며 정보가 떠오른다.

[페니 쥬스터-NPC]

-황금 제국 그레트프론의 황녀

-사망했습니다.

죽어 있다. 상처 하나 없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영혼석에 갇혀 있는 상황.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알리오스는 그동안 저 사람을 지키고 있었던 건가.

-우우우우웅!

수정과 영혼석이 맞닿자 강렬한 파동이 퍼졌다.

영혼과 육체가 서로를 알아보며 공명한 것.

이어 영혼석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흘러나온다.

방향을 찾듯 방황하다 이내 수정 안으로 스며드는 기운.

저게 페니의 영혼인가.

-파삭

영혼이 빠져나간 영혼석이 투명해지더니 힘을 잃고 부서진다.

반면 수정은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고.

꿈틀.

페니 쥬스터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돼, 됐다! 페니가 살아나고 있어!”

알리오스가 들뜬 기색으로 수정을 끌어안는다.

난 적당한 거리 뒤에서 머리를 긁었다.

지금은 내가 끼어들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NPC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사실 사망 처리된 NPC를 처음 보기도 했고. 잠시 나가 주자.

“궤에.”

마음이 통한 덕춘이가 툭툭, 내 어깨를 두드렸고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자. 이제 어쩐다.

막상 나오기는 했는데 할 게 없다.

난 턱을 긁적이며 복도를 바라봤고.

“저택이나 마저 구경해 볼까.”

좀 더 돌아다니기로 결정했다.

혹시 아는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지.

영혼석도 줬는데 선물 하나 정도는 챙겨 가도 되겠지 뭐.

보물을 찾아 나서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 허락도 없이 방을 뒤지는 게 잘못된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기는 한데.

“서로 목숨 노리고 싸운 사이끼리 그런 거 따져서 뭐 해.”

안타깝게도 나와 알리오스의 사이는 상식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정확히 3시간 후.

난 저택 접객실 소파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저택 크기 자체가 별로 크지 않아 둘러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끽해야 3층짜리 건물. 높이에 비해 옆으로 길기는 했지만 꼼꼼히 살피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겸사겸사 지하실까지 뒤졌고.

“쓸 만한 게 있긴 하네.”

“그에에에.”

허름하지만 성능 좋은 신발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대항자의 마지막 부츠 (A)]

-황금 제국의 대죄수 알리오스 페르노가 신었던 신발

-극한의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있게 해 줍니다.

무려 A급 아이템.

생긴 건 씹다 뱉은 가죽같이 생겼는데 등급이 엄청나다.

사이즈도 얼추 맞고. 그동안 탑에 들어올 때 신었던 신발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잦은 전투와 험난한 지형을 돌아다니느라 찢기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바꿔야지.

난 옵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옵션이 아주 마음에 든다.

“스킬이 붙은 게 아니라 의지가 담긴 아이템이라는 거지.”

모든 옵션이 스킬 형식으로 달려 있지는 않다.

당장 내가 사용하는 펠라인 세트도 그런 게 있지 않던가.

각 파츠의 속성이 발현된다고.

경계를 끊은 검도 마찬가지다. 경계를 끊을 수 있다는 문장이 옵션으로 달려 있다.

“상당히 귀한 것들인데 하다 보니 꽤 많이 얻었네.”

사실 이런 것들은 아티팩트로 분류된다.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 중량 팔찌처럼.

보통의 경우 아티팩트는 효과 외의 옵션이 없다.

하지만 이건.

[대항자의 마지막 부츠 (A)]

-힘 +19

-민첩 +23

-체력 +49

-방어력 +74

훌륭한 스텟이 붙어 있지.

신발 주제에 좋은 게 많이 달렸네.

모쪼록 잘 쓰도록 하겠다.

막상 신어 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흠흠.

-끼이이익

음료수를 비울 때쯤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건 알리오스.

“여기 있었네.”

“끝났냐?”

내 물음에 알리오스가 씨익 웃는다.

“덕분에. 영혼과 육체가 오래 떨어져 있어 당장은 일어나지 않지만 조만간 눈을 뜰 거다.”

“잘 됐군. 아, 이 신발 내가 신는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쓰지도 않으니까.”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내젓는 녀석. 쿨하구만그래.

난 맞은편 소파에 앉은 녀석을 응시했다.

이제 보니 신발도 안 신고 있다. 옷도 낡아빠졌고.

그나마 멀쩡한 건 들고 있는 검 한 자루?

머리카락도 대충 잘라 낸 것이 티가 난다.

부랑자. 혹은 범죄자의 모습인데.

슬쩍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을 꺼냈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내가 상대방 정보를 읽어 내는 능력이 있거든? 넌 제국의 죄수. 수정에 봉인되어 있던 사람은 황녀. 조합이 이상하지 않냐?”

제국에서 대죄수라는 칭호를 받고 구속하기 위해 S급 제압 아티팩트까지 만들었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신발에는 대항자라는 단어가 붙었고.

어떻게 생각해도 제국과는 사이가 안 좋아 보인다.

“별거 아니다. 어찌 보면 흔한 이야기지.”

“혹시 아내?”

왜 있지 않은가. 죄수와 황녀의 사랑. 그런 거.

내 말에 헛기침을 한 알리오스가 고개를 흔든다.

“결혼을 하지는 못 했다.”

“아하, 약혼자구나.”

“약혼도 아직 못 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죄수와 황녀의 조합.

약혼을 하기는 힘들만 하지.

“애인이었네.”

“사실은 연애도 아직.”

“…음?”

뭐라는 거야, 이 자식.

“크흠! 진정한 마음은 언젠가 전해지는 법. 따지고 보면 연애의 초입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지!”

“그걸 보통 짝사랑이라고 하지 않냐?”

“…닥쳐.”

팩트를 맞은 알리오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 *

알리오스의 저택에 하룻밤을 자며 그에게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알리오스와 황녀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사이?

검에 취해 전투와 전투를 반복하고 이내 제국의 위협이 되어 버린 알리오스가 제국군에게 잡힌 이유도 황녀를 흠모했기 때문이라나.

설산에 저택을 지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의 냉기를 모아 수정을 유지하고 있다 했으니.

영혼을 찾아도 육체가 썩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사실 이런 건 별 관심이 없다. 남의 연애사야 알아서 잘하라 하면 되지.

내가 관심 있는 건 하나.

“계승자라.”

“넌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계승자란 것은 엄청난 기연이야.”

나와 알리오스는 저택 밖에 나왔다.

설산 정상 구석에 마련된 공터.

찬 바람이 불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NPC는 단 한 번 자신의 계승자를 고를 수 있다.”

“너한테는 내가 그 대상이고?”

“그렇지.”

“기회가 한 번이면 더 신중해야 하지 않나?”

“나한테는 페니가 더 중요해.”

아. 짝사랑의 위대함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널 뽑은 건 아니야. 수많은 죽음. 그럼에도 덤벼드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경험.

실제로 탑에서 사망한 이들은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탑으로 소환된 이들이라면 더욱.

“어설프고 기교가 없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건 나쁘지 않았지.”

잠시 말을 멈춘 알리오스가 한 걸음 다가온다.

평상시의 껄렁함은 없었다. 나 역시 긴장하며 그를 바라봤다.

“NPC는 탑에 속한 존재. 탑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른다.”

그의 눈이 진지해진다. 갑자기 NPC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누군가는 한 층의 보스가 되는 것으로, 누군가는 장사를 통해 번 포인트를 대가로 탑에서 살아갈 권리를 얻는다.”

몰랐던 사실.

궁금하기는 했다. NPC들이 왜 장사를 하고 포인트를 버는지.

왜 19층의 보스는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었는지.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생존 법칙이 있었다.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포인트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자아를 잃어. 완전히 탑에 녹아드는 거지. 말 그대로 NPC가 되는 거야.”

“넌 따로 역할이 없는 것 같은데.”

“맞아. 그래서 난 안전지대에 머물 수 없어.”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NPC는 안전지대에서 살아간다.

이유가 있던 걸까.

“안전지대는 하나만 존재해. 하지만 필드는? 등반가에 맞춰 끝없이 분열한다.”

맞는 말이다. 나와 탈모맨, 핥짝이, 냥펀 모두 탑을 올랐지만 필드에서 마주치진 않았다.

10명의 사람이 21층에 들어가면 10개의 21층이 생겨나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이곳과 독립된 또 다른 24층을 공략하고 있을 거다.

잠깐만. 그럼 24층에 머무는 NPC는?

“나라는 존재가 수십 수백 개로 쪼개지는 것. 그게 내가 감당해야 할 대가다.”

막대한 페널티.

영혼 자체가 뜯기는 혼란과 고통을 그는 담담히 받아 내고 있었다.

“사실 내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곧 페니가 살아날 것이고, 난 그녀 몫의 부담감도 함께 짊어질 생각이니까. 그렇게 하기로 시스템과 계약했다.”

심각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자아가 깨지는 고통을 두 배로 받는다?

NPC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너, 버틸 수 있냐?”

강함과는 별개로 스스로를 지키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내 물음에 알리오스가 피식 웃는다.

“말했잖아. 시간 없다고. 길어야 10년. 그게 내가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차캉. 그가 검을 뽑았다.

살벌한 예기가 검에 깃든다.

단순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경지가 얼마나 고강한 지 느낄 수 있었다.

일평생 검만 갈고 닦은자가 내뿜을 수 있는 기세.

“NPC는 자신의 계승자가 탑을 클리어할 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계승자가 탑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잃고 평생 탑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것. 그게 결말일 테니까.

“수많은 NPC가 너를 노릴 거다. 이미 기회를 날려 버린 녀석. 계승자를 찾아냈다는 것을 시기하는 녀석. 순전히 재미로 너와 나를 엿 먹이려는 녀석.”

NPC라고 다 같은 NPC가 아니다.

내가 만난 이들이 유독 좋은 녀석들이었던 거지 악성향인 NPC도 있다고 들었다.

“강해져라. 탑을 정복하지 못하면 너 또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길을 걷게 될 터이니.”

“그게 무슨, 크윽!”

-푸화아아아악!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의 기세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강대한 힘!

스스로를 제약하지 않는 알리오스는 뛰어넘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들어라, 계승자여.”

천천히 자세를 취하는 알리오스.

그의 얼굴에는 단단한 의지와 투기만이 서려 있었고, 약자를 상대한다는 마음가짐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엄청난 압박감이 몸을 옥죈다.

하늘마저 숨을 멈추는 긴장감 속,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알리오스 페르노. 제국을 삼키려 한 검귀이자 황금 제국의 마지막 기사.”

-우우우우웅!

알리오스의 검이 진동한다.

마력이 요동치고 이내 형태를 갖춰 눈 부신 빛을 내뿜는다.

[NPC, 알리오스 페르노와의 결속이 강해집니다!]

-동화율(0.1퍼센트)

-알리오스 페르노의 정수 ‘굴하지 않는 검귀 (SS)’가 권능에 추가됩니다!

“내 모든 것을 가져가라. 그럼 탑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99층에 도전했던 자, 알리오스 페르노가 계승자에게 가르침을 내립니다!]

콰아아앙! 그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