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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06화 (106/740)

106화 영혼석

7층의 보스 몬스터, 보물 고블린을 사냥하고 얻었던 보물 주머니.

그 안에는 몇 가지 보상이 있었고, 영혼석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용도를 알지 못해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여기서 반응을 보일 줄이야.

전투로 달아올랐던 긴장감이 한풀 꺾인다.

이놈의 아이템. 반응만 하면 멋대로 튀어나오고 그래.

-텁

자연스럽게 영혼석을 잡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모래시계를 노려봤다.

벌써 10분 중에 반이 지나갔다. 남은 5분 안에 놈에게 일격을 꽂아야 한다.

난 자세를 다잡고 알리오스를 응시했다.

배려해 준 건가. 바로 공격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흥 깨서 미안. 계속하지.”

어떻게 할까. 달라붙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놈 스스로 제약을 건 덕분에 기동력 자체는 비슷.

근력은 살짝 밀리는 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비벼볼만 하다.

자존심인지 원래 그런 건지 특별한 스킬을 쓰는 것보다는 검과 기술로만 상대하는 것 같은데.

‘디그로 함정을 팔까? 아니면 안개 질주로 일단 붙잡고 되갚기를 터트려?’

짧은 시간 수십 개의 전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덕춘이도 있으니 양동 작전을 펼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처억.

놈이 움직였다. 땅으로 내린 검.

힘을 빼서 속도를 올리려는 건가. 변칙 공격에 능한 놈이니 새로운 기술을 펼치려는 걸지도 모른다.

긴장을 놓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리던 때.

“너, 너! 그걸 어디서 난 거냐!”

놈이 소리를 질렀다.

상태가 이상하다. 큰 충격을 받은 표정.

연기가 아닐까 의심해 봤지만 아닌 것 같다.

크게 떠진 눈. 핏발이 섰고 턱이 떨리고 있다.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

“그 물건을 내놔라. 주지 않는다면 죽여서라도 빼앗겠다!”

홀린 듯 걸어오는 녀석.

뭔지는 몰라도 영혼석에 관심을 보이는 거 같은데.

장난질 좀 쳐 볼까?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영혼석을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위아래로 까딱이는 녀석의 머리.

이거 은근히 재밌네.

“헛! 이, 이 녀석이!”

내가 웃고 나서야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알리오스가 분노를 표했다.

그럼 뭐 하나. 이미 약점은 잡혔는데.

“이게 가지고 싶나 봐?”

“곱게 내놔. 그럼 안전하게 보내 주지.”

알리오스가 손바닥을 내민다.

하. 이것 참.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네.

“싫은데? 내가 왜애애애?”

뿌득. 이를 간 녀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멱살을 쥔다.

살기가 송곳처럼 찔러 들어온다.

오. 살벌한데.

“무력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말로 할 때 들어.”

“무슨 수로? 보물 주머니는 귀속 아이템인데 꺼낼 수 있겠어?”

내가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귀속 아이템은 주인이 아니면 열 수 없다는 것.

물론 무조건 못 여는 건 아니다. 소유권을 양도할 수도 있고 기본적으로 소유자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가질 수도 있으니까.

다만 이곳은 탑. 죽더라도 코인이 있다면 부활한다.

즉, 완전히 밖으로 퇴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소유권은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난 코인이 무한이다.

놈도 대충 눈치채고 있을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코인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그러니까 열댓 번을 죽어도 다시 도전했지.

난 보물 주머니를 열었다. 알리오스의 눈이 빛난다.

기대하는 것 보소. 아쉽지만 꺼낸 건 영혼석이 아니다.

[혈괴의 저주 단검 (E)]

단번에 사망에 이르는 저주가 걸린 물건이었지.

어떤 아이템인지 알아차린 건가 놈의 얼굴이 구겨진다.

“난 이대로 죽어서 도망치면 되는데. 넌 어쩌냐. 이번에 내려가면 여기 절대 안 올 생각인데.”

“…네 놈이 펠라인 세트를 원하는 건 알고 있다. 그냥 떠날 리가 없어.”

“딱히 상관없지 않아? 펠라인 세트가 탐나는 건 맞는데 장비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을 끊으며 녀석의 손을 살며시 밀어냈다.

표정은 살벌했지만 순순히 멱살을 놓는다.

옳지. 말 잘 듣는다.

사실 거짓말이기는 하다. 펠라인 세트가 생긴 건 저래도 기능 하나는 확실하니까.

그동안 고생한 것도 아깝고.

다만 아쉬운 쪽은 알리오스인데 내가 먼저 접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겪어 봐서 알겠지만 내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널 엿 먹일 수 있다면 세트 하나 포기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크으윽!”

정말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 생각한 건지 알리오스의 안색이 하얘진다.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건 내놓을까.

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고 알리오스가 부르르 떨며 굴복했다.

“원하는 걸 주마. 널 공격하지도 않겠다.”

“그걸 어떻게 믿고? 영혼석 받고 날 찌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난 약속은 반드시 지켜!”

“아. 난 그런 거 몰라요. 계약서 쓰든가.”

“NPC는 계약 작성이 불가능하다. 시스템적으로 묶여 있으니까.”

그건 몰랐다.

시스템은 탑의 룰. NPC는 시스템에 속한 존재.

잠시 거쳐 가는 등반가와의 거래보다 시스템이 우선시되는 건 당연하긴 했다.

NPC가 주관하는 이벤트와 퀘스트. 그것들이 개인의 계약으로 엉킬 수도 있으니까.

돌아다닐 수 있는 활동 범위에도 제약이 있고.

결국 말로만 하는 약속이라는 건데.

어쩔까 고민하던 찰나. 그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대신 널 계승자로 삼겠다.”

“계승자?”

“NPC는 자신이 고른 계승자를 공격하지 못 해.”

이건 또 처음 듣는 말이네.

계승자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NPC 알리오스 페르노가 조현수 님을 계승자로 삼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NPC는 단 한 번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NPC는 본인의 계승자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떠오른 메시지가 그걸 증명했으니까.

좋다. 이 정도면 믿어도 되겠지.

“수락한다.”

[조현수 님은 알리오스 페르노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미묘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는다.

알리오스와 연결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덕춘이를 얻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제 영혼석을 내놓아라.”

“어. 줘야지. 그 전에.”

난 알리오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래는 거래고 하던 건 마저 해야지.

-뻐억!

“크하악!”

냅다 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코피를 흘리며 멀리 나가떨어지는 녀석.

캬. 속이 다 시원하네.

입꼬리를 올리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아직 10분 안 지났다. 펠라인 세트 내놔.”

* * *

약간의 실랑이가 있은 후.

난 알리오스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오른팔에는 펠라인 세트를 낀 채로.

[펠라인의 파란 오른팔 (D)]

-힘 +3

-민첩 +2

-체력 +2

-마력 +4

-방어력 +9

-세트 아이템 (3/7)

-본래의 힘 일부를 되찾습니다.

성능만 보면 보통 쓰레기가 아니다.

하지만 괜찮다. 애초에 펠라인 세트는 단일 성능을 보고 쓰는 게 아니니까.

세트가 모일수록 강력해지는 추가 효과가 중요한 거지.

“이번에도 대박이군. 으흐흐흐.”

세트 효과를 바라보니 웃음이 절로 난다.

[펠라인 세트 효과! (3/7)]

-올 스텟 +20

-패시브 스킬, ‘쾌적 (D)’ 적용.

-자가 수복 기능 활성화

-완전 파괴 불가

-펠라인 세트의 방어력이 통합됩니다.

-각 파츠별 속성이 개화됩니다.

-‘감각공유 (C)’ 적용. (펠라인 세트에 한정됩니다.)

먼저 올 스텟 증가가 10이 더 붙었다.

거기에 감각공유. 장비를 착용한 생태인데도 맨몸인 것처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스윽

난 몸통을 쓸어내렸다.

흉갑을 입고 있는 만큼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아야 정상이었지만.

“신기하네.”

마치 맨살에 직접 손이 닿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각이 살아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접촉한 대상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말랑한지 딱딱한지. 그런 정보 하나하나가 모여 대응책을 만들 수 있게 해 주니까.

시각적인 정보만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좋은 효과라고 볼 수 있었지만.

-각 파츠별 속성이 개화됩니다.

이것 역시 범상치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펠라인 세트는 총 세 개.

노랑 몸통은 땅 속성을, 빨간 머리통은 불 속성을, 새롭게 얻은 파란 오른팔은 물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워터 (E) Lv.1]

-수와아아아

생활형 스킬인 워터. 오른팔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지더니 기존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이 생성됐다.

그뿐일까. 스킬을 제어하는 능력까지 상승했다.

그동안은 워터를 쓰면 바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지금은 구체 모양으로 잡아둘 수도 있었다.

“궤에에에.”

좋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덕춘이.

마력이 그리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놀게 놔두기로 했다.

“짜증 나는 녀석.”

시시덕거리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알리오스가 눈살을 찌푸린다.

나한테 얻어맞은 코가 빨갛게 부어 있다.

“어허. 짜증 나다니. 정정당당하게 싸웠는데.”

“혹시 정정당당이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냐?”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표정은 밝았다.

그의 손에 영혼석이 들려 있었으니까.

[영혼석에 봉인된 영혼이 반응합니다.]

-우우우웅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울리던 진동이 점차 강해진다.

그를 따라 저택에 들어오면서 느낀 건데 외부도 그렇지만 내부도 담백한 맛이 있다.

크게 화려하지는 않아도 평화롭고 느긋한 느낌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절대 알리오스랑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하는 짓이랑 다르게 취향이 꽤 괜찮네.”

“그러냐? 흠흠. 내가 잘 만들기는 했지.”

“네가 직접 지은 거였어?”

그건 몰랐네.

하기야 벨라도 이벤트로 건물이 무너지면 직접 건축했으니 알리오스라고 못할 건 없었다.

“정성껏 만들었다. 나야 땅바닥에서 자도 상관없지만 그녀는 아니거든.”

“그녀?”

설상 정상에 알리오스 말고 다른 NPC도 있었나?

릴카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알리오스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저택의 꼭대기. 가장 전망이 좋은 곳.

다른 곳과 달리 문에 화환이 걸려 있다.

아이보리색으로 칠한 나무판에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권능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페니 쥬스터의 방]

함께 산다는 그녀의 이름인가.

추가로 떠오르는 정보는 없다.

“크흠. 들어간다, 페니.”

노크까지 한 알리오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그와 동시에 냉기가 쏟아진다.

정상 부근은 눈보라도 안 치고 기온도 제법 따뜻한 편이었는데, 이곳은 설산보다도 춥다.

[스킬 레벨 업!]

[냉기 저항 (E) Lv.7]

스킬 레벨이 오를 정도로.

정작 내 시선을 잡아끈 건 다른 거였지만.

“이건 대체.”

“아. 페니가 이런 걸 좋아해.”

그가 테이블에 올려진 인형 위치를 다듬는다.

의문이었다.

어째서 드레스와 꽃, 인형 같은 물건만 거래를 하는지.

그렇게 모은 물건들은 어디에 있는지.

저택을 돌아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

벽을 가득 채운 꽃. 빛을 반짝이는 보석함. 다양한 모양의 인형.

다른 방 서너 개 정도의 크기의 공간 그 가운데는.

“페니… 오래 기다렸지?”

거대한 수정이 있었다.

냉기의 근원.

투명한 수정안에 잠들어 있는 여인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말없이 몸을 웅크린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을 뿐.

알리오스가 수정에 손을 얹었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공명하는 영혼석.

알리오스가 영역에 집착을 보인 이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침입자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유.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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