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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05화 (105/740)

105화 갑자기 이게 왜 반응해?

온몸이 아프다. 특히 뒤통수.

“으으. 윽.”

몸을 비틀자 두통이 더 심해진다. 목도 마르고. 물 없나.

손을 더듬자 물컵이 잡힌다. 단숨에 털어 넣자 정신이 좀 든다.

빌어먹을 알리오스. 꽃도 주고 주먹도 줬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사람을 패?

절대 포기 안 한다. 준비하자마자 다시 24층으로 올라…….

“여긴 뭐야.”

난 눈을 꿈뻑거렸다.

낯선 공간. 20층 안전지대 여관이 아니다.

반쯤 부러진 침대. 대충 만든 듯한 나무 책상과 의자. 작지만 따뜻한 열기가 올라오는 난로.

여기까지만 보면 허름한 방인가 하고 넘어가겠는데, 곳곳에 쌓인 잡동사니와 뽀얗게 쌓인 먼지를 보니 버려진 산채 같다.

“잠깐만, 덕춘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덕춘이가 무사한지가 중요하지.

안전지대로 돌아온 게 아니라면 덕춘이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온몸이 삐걱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맨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찌르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제대로 된 경첩도 달리지 않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한차례 돌풍이 불며 눈싸라기가 흩날렸고 그곳에는.

“아.”

저택이 있었다.

눈과 어울리는 새하얀 저택.

특출나게 크거나 치장되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무슨 마법을 걸었는지 눈이 쌓이지 않은 마당에는 잔디가 자라 있었고, 간이 테이블과 의자에는 알리오스가 앉아 차를 즐기는 중이었다.

테이블에 올라간 덕춘이는 과자를 뜯고 있었고.

설마 알리오스가 날 데리고 온 건가? 덕춘이는 무사한 거 같아 다행이기는 한데.

저택이 저기 있었다면 난 왜 저기에?

“어. 깼냐? 놔둘 데가 없어서 대충 창고에 박아 뒀다.”

와. 저 쓰레기.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사람 머리를 깨고 창고에 던져 놔?

저기 멀쩡한 집은 장식이냐?

“불손한 눈빛이군. 난로까지 틀어 줬더니만. 에휴. 은혜도 모르는 놈.”

“사람이 죽을까 말까 하는데 창고에 박아 두는 게 또라이 아닐까?”

“그래서 죽었어?”

죽지는 않았지.

“거 봐, 이상한 애야.”

저놈 은근히 빡친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놈이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킨다.

일단 공격할 의사는 없는 모양.

그럴 거면 이곳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지.

갑자기 어떤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따라 주자. 나도 놈에게 볼일이 있으니.

의자에 앉자 경치가 한층 더 잘 보인다.

설산의 꼭대기, 햇볕이 내리쬐고 풀이 돋아난 곳에 앉아 눈보라가 치는 광경을 보는 건 생경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꽤나 절경. 난 작게 감탄했고.

“멋진 곳이지 않아?”

“그렇긴 하네.”

피식 웃은 알리오스가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뭔가 서로 죽고 죽이던 사이의 대화치고는 화기애애했다.

설마 이 녀석 이 틈을 노리고 기습하려는 건 아니겠지?

차 안에 독이 들었나?

“눈꽃차다. 향이 좋지.”

“아. 그래. 고맙다.”

딱히 권능이 발휘되지 않는 걸 보니 평범한 차인 모양.

혼자 의심한 것이 뻘쭘해 서둘러 차를 마셨다.

그의 말마따나 그윽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한동안 말 없는 티 타임.

덕춘이의 등을 긁어 주며 놀고 있을 때 녀석이 말을 꺼냈다.

“네 놈, 목적이 뭐냐.”

그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돌렸다.

“내가 알기로는 화조국에 너 같은 놈은 없어. 그쪽 소속이었다면 처음부터 증명패를 가지고 찾아왔을 거고.”

역시 들켰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화조국과 거래하는 NPC가 소속 인원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증명패는 단순히 이곳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어쩔까.

후룩. 남은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렇게 저렇게 돌려 말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저 또라이 같은 NPC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겠고.

“찾는 물건이 있어서. 네가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물건?”

“펠라인 세트.”

“그거였군.”

“그리고 하나 더.”

난 손을 내밀었다.

“뺏어간 애꾸 예티의 눈물 내놔. 내가 그거 얻으려고 뭘 했는지 알아?”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내 인생 최대 흑역사가 아닐까.

당시에야 뭐에 홀린 듯 열심히 흔들어 댔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한다.

“큭. 크큭! 크하하하!”

빤히 날 바라보던 놈이 폭소했다.

왜 저래. 뇌 주름이 몇 개 부족한가.

덕춘이를 보며 옆머리에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덕춘이 역시 궥 하고 울더니 손가락을 돌린다.

“이상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맛이 간 녀석이였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쪽이 하니 난 뭐라고 해야 할까.

“너, 등반자 아닌가? 한 번만 죽어도 겁에 질려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게 보통이야.”

그건 맞다. 나도 무한 코인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발을 돌렸을 테니까.

“넌 열 번도 넘게 내게 도전했다. 정상적인 코인 개수가 아니지. 더 재밌는 게 뭔지 알아?”

큭큭. 웃음을 흘리던 녀석이 꽃다발을 흔들었다.

“위장 신분을 이용해서까지 날 때리려고 했다는 거지. 그러고서는 뭐? 원하는 물건이 있어서 찾아왔다? 흐흐. 으하하하!”

내가 들어도 정신 나간 것 같기는 한데 어쩔 수 없다.

두들겨 맞았는데 나도 때려 줘야지.

받는 대로 돌려준다. 그게 내 인생 모토다.

배를 잡고 웃던 녀석이 급 정색을 한다.

“그래서 내가 펠라인 세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는 방법이 있다.”

“보나마나 릴카가 말해 줬겠지, 튕기기는.”

뜨끔. 알면서 물어본 건가.

하기야 정보가 새어 나갈 곳이 릴카밖에 없기는 하다.

폐쇄적인 공간, 적대적인 NPC. 찾아오는 곳이라고는 화조국 상인뿐.

상단이 고객의 정보를 넘겼을 리는 없으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왕 들킨 거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왜 이렇게 구역에 예민하지? 릴카도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걔는 너무 위험하거든.”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릴카가 위험하다라?

“화조국 녀석들은 내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릴카 그 녀석은 힘들지만. 이곳이 파괴되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그가 저택을 가리킨다.

놈이 지키고 있는 곳이 저건가.

겉으로만 봐서는 딱히 특별할 게 없는데.

그보다 릴카를 경계하는 게 더 이해가 안 된다.

녀석이 짜증 날 때가 있기는 해도 어디 가서 행패를 부릴 성격은 아니니까.

내 의문을 짐작한 걸까. 그가 말을 잇는다.

“네가 릴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리 만만한 녀석은 아니야. 위험할 수 있는 건 들이지 않는다. 그게 내 방식이야.”

“난 왜 데려왔는데.”

“넌 위험하지 않으니까?”

은근히 기분 나쁘네 이거.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 난다.

자고로 팩트는 건드리는 법이 아니다.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린 알리오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흥미가 동해서 일단 데려오기는 했는데 더 볼 게 있을지는 모르겠어.”

“납치범이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납치라니. 생명의 은인한테.”

열두 번을 죽인 생명의 은인이라.

재미없는 농담 아닌가.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죽였겠지만 노력한 게 가상하니 이야기를 좀 더 하지.”

그가 손을 튕기자 허공에서 아이템이 떨어진다.

갑옷의 오른팔.

그것도 청명한 파란색.

대번에 알아차렸다. 저거 펠라인 세트다.

장인도 울고 갈 멋진 디자인에 저딴 색을 박아 넣는 아이템은 그거밖에 없으니까.

빨간 투구에 노랑 흉갑. 파란색 오른팔이라.

그럼 다음 세트 아이템 색깔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걸 갖고 싶다며. 넌 뭘 줄 수 있지?”

알리오스의 말에 상념이 깨진다.

그래. 뒷일은 나중에 생가하고 지금은 목적에 충실하자.

뭘 줄 수 있느냐.

난 곰곰이 생각했고.

‘없다!’

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원래 계획은 애꾸 예티의 눈물로 친분을 쌓은 다음 살살 구슬리는 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적이 변질됐다.

이제 와서 친하게 구는 건 말도 안 돼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놈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네가 뭘 준비했든 난 필요 없어. 그러니 제안 하나 하지.”

-차캉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느슨한 자세건만 뿜어지는 기세가 대단하다.

“나 때리고 싶다며? 때려 봐. 단 한 대라도 날 때린다면 이걸 주지.”

놈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간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

-스르릉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발검했다.

선택권은 없다. 이렇게 된 거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해내는 수밖에.

어느새 어깨 위로 올라온 덕춘이.

“크흐흐. 도전 정신 아주 마음에 들어.”

펠라인 세트를 도로 없앤 알리오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또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수갑.

권능으로 정보를 살폈다.

[대죄수의 수갑 (S)]

-황금 제국, 그레이트프론의 대죄수 알리오스 페르노를 수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템.

-능력치의 98퍼센트를 억제합니다.

S급 아이템!

최상위급 디버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설명에 떠오른 이름. NPC 본인 아닌가.

“어때?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알리오스가 테이블 위에 있던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모래알.

“제한 시간 10분. 발버둥 쳐 봐라.”

-콰앙!

놈이 발을 박찼다.

“이런 미친!”

난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무려 98퍼센트의 능력치가 봉인됐음에도 놈은 빨랐다.

한순간 빛이 번뜩이는 듯하더니.

-주륵

턱 끝에 생채기가 그어진다.

앞으로 스텝을 밟는 녀석.

허초가 섞인 공격이 이어진다. 뱀처럼 검이 일렁인다.

검로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곳을 찌르고 있는 변칙적이면서도 빠른 쾌검!

-카가가가강!

세차게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냈다.

손이 울린다. 저 빠른 속도에 이만한 힘이 담긴다고?

기겁할 일이었지만 난 입꼬리를 올렸다.

‘할 만하다!’

원래였다면 반응조차 못 했을 놈의 공격을 막아 냈다.

0퍼센트에 가까웠던 승률이 올라갔다는 말.

단 1퍼센트라도 승산이 있다면 도전한다.

[버프 다이스 (B) Lv.3]

[4]

[충격분산]

버프를 두르고 손을 펄쳤다.

[파이어 밤 (A) Lv.6]

놈을 뒤덮는 화염. 강력한 열기와 폭발이 공간을 뒤덮었지만 놈은 멀쩡했다.

옷 하나 그을리지 않은 모습으로 불길을 돌파.

“흠!”

호흡을 고르는 동시에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막을까?

찰나의 순간 대응책을 고민했고.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현됩니다.]

-무형의 기운

날아오는 검격을 뒤따라오는 무색의 일격을 포착할 수 있었다.

검은 페이크.

-콰아아앙!

바닥에 폭발을 일으켜 옆으로 몸을 튕겨 냈다.

-푹!

-푸북!

알리오스의 검이 땅에 꽂히고 이어 보이지 않는 일격이 한 번 더 꽂힌다.

저걸 막고 반격하려 했다면?

숨은 공격에 어디 한 쪽은 날아갔을 거다.

그만큼 은밀하고 위험한 일격이었다.

“눈치가 좋군!”

“칭찬 고맙다!”

이를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절삭. 강철도 베어 내는 날카로움이 검에 담겨 뻗어 나갔다.

-카가가가각!

놈이 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흘려보낸다.

튀어오르는 불똥.

여기까진 예상했다. 검술의 경지가 다르다. 검으로만 상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

[독자무강獨者武强 (A) Lv.2]

[강체强體 (C) Lv.8]

[물리 공격 내성 (D) Lv.1]

내 스킬을 믿자.

버프로 충격분산까지 얻은 상황.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최대한 개판으로 싸우는 거지!”

-콰과과과광!

-쿠아아아앙!

알리오스에게 달라붙으며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놈이 몸을 피했지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막을 수 있는 건 막고 애매한 건 몸으로 때우면서.

[데미지가 누적됩니다!]

페시브뿐만 아니라 되갚기 효과까지 사용하며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그 기세에 질렸는지 놈 또한 헛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미친놈이었군!”

-쿠웅!

-푸화아아아악!

놈의 기운이 한 번에 뿜어졌다.

마력이 의지를 가지고 물리력을 지닌다.

강력한 반발력!

“끄으으아아!”

기합을 지르며 버텼다.

발이 땅에 파묻히든 말든, 부하를 이기지 못한 피부가 찢어지더라도 기필코 한 방 먹여 준다.

조금만 더. 난 부르르 떨리는 팔을 내뻗었으나.

-파앙!

쏟아지던 기운이 일시에 수축하더니 2차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이건 안 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튕겨 나간다.

“제법 잘 싸웠다만 아직 멀었구나!”

때에 맞춰 달려드는 알리오스.

이대로면 당한다. 난 이를 악물며 방법을 찾았고.

-콰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려 날아가는 궤도를 바꿨다.

목적지는 저택.

놈이 애지중지하는 그곳.

노림수를 깨달은 놈이 속도를 올렸지만.

“뭐, 계속 덤벼보시지?”

내가 더 빨랐다.

저택을 등 뒤에 두고 자세를 잡았다.

충격파를 제대로 먹어서 그런가 속이 울렁거린다.

침을 뱉자 나오는 건 핏물.

속까지 데미지가 들어온 건가. 어쩐지 더럽게 아프더라.

“이, 이 놈이!”

놈이 부들대거나 말거나 난 저택에 뒤꿈치를 댄 채 공격 자세를 취했고.

[영혼석이 반응합니다!]

“응?”

그동안 보물 주머니에 곱게 넣고 다니던 영혼석이 빛을 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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