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알리오스
“그래서 당하고 온 거예요? 어우. 그 NPC도 정상은 아니네요.”
20층 안전지대. 난 벨라의 분식점에서 식사를 하며 한탄했다.
그 나쁜 새끼가 죽이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아이템까지 뺏어 갔다.
이게 뺏었을 때는 몰랐는데 뺏기고 나니까 기분이 더럽다.
오지혁한테 다시 한번 미안함의 법규를 날려 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요즘 뭐 하는지 모르겠네.’
저번 투기장 이벤트 때 대화 몇 번 나누고는 통 소식이 없다.
알아서 잘살고 있겠지. 놈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데 벨라가 다가와 등을 토닥여 줬다.
“고생했네요. 시스템 항의라도 해 보지 그랬어요.”
시스템 항의. 부당하게 NPC에게 공격당했을 시 시스템적인 제약을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도 정신 차리자마자 해 봤는데.
[상대 NPC의 경고를 무시했음을 확인.]
[제재할 수 없습니다.]
안 된다는 통보만 받았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경고 한 번 하고 쓱싹이라니.
망할 NPC 같으니.
자연스럽게 벨라에게 힐링 받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릴카가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퀘스트는! 눈물 필요하단 말이야!”
“시끄럽다. 확 퀘스트 안 하는 수가 있어.”
“너무해!”
“악!”
입술을 내민 릴카가 내 다리를 걷어찼다.
질 수 없지. 바로 꿀밤으로 응징해 줬다. 머리를 감싸 쥐며 우는 시늉을 하는 녀석.
20층에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자마자 찾아와서 밥 사 달라 하기나 하고.
착한 벨라가 무료로 주기는 했지만.
슬쩍 가게를 둘러봤다. 며칠 만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나저나 장사 잘되네요.”
“덕분에 말이죠.”
벨라가 싱긋 웃었다.
20층에서 올라가기 전, 커뮤니티를 통해 벨라의 분식점을 광고해 줬다.
이렇게 하면 손님이 좀 오지 않을까 싶어서 했던 건데 결과는 대성공.
“여기 떡튀순 세트 하나 더 주세요!”
“가게 은근히 예쁜 거 같지 않아? 복고풍 같달까.”
썰렁하기만 했던 가게에 손님들이 가득하다.
맛도 맛이지만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벨라.
“벨라 누님, 오늘도 예쁘십니다!”
“저번에 상담 잘 받았어요!”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평소의 나긋한 성격 덕분에 고객들은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힘든 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단골까지 생긴 모양.
역시 인풀루언서 광고의 힘은 굉장했다.
커뮤니티 멤버들도 벼르고 있으니 확실하겠지.
[냥냥펀치]: 나도 떡볶이 좋아함! 20층 가면 꼭 먹을 거다냥!
[니머리 탈모]: 후욱… 훅…공듀가 간 분식점. 후우우욱…….
[정수리 핥짝]: 너, 쫌 변태 같다?
[니머리 탈모]: 변태라니! 순수한 내 맘을 몰라 주고!
[냥냥펀치]: …더러워.
[니머리 탈모]: 냥펀, 너마저!
핥짝이야 이미 위로 올라가 버려 올 수는 없었지만 친절한 냥펀이 따로 개인 거래로 보내 주기로 했다.
역시 냥펀이 제일 착하고 정상이 아닐까.
탈모맨 저 녀석이야 딱 생각한 대로고.
“그보다 놀랐어요. 현수 씨가 쁘…….”
“쉿. 그건 비밀이에요.”
“맞네요. 이건 지켜 줘야죠.”
광고하는 과정에서 벨라가 내 정체를 알게 되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은 안 된다.
벨라도 나한테 빚진 게 있어서 비밀로 지켜 주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충격이기는 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미묘해진 건 사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쇼. 상처받으니까.
“흠흠. 다시 도전할 건가요?”
“그래야죠. 볼일도 있고 뺏긴 눈물도 받아야 하니까.”
“쉽지는 않겠네요. NPC 중에도 과격한 애들이 많지만 그 NPC는 정도가 심해서요.”
걱정스러운지 내 등을 쓰다듬어 준다. 역시 날 생각해주는 건 벨라밖에 없다.
난 자연스럽게 몸을 기댔다.
좀 더 쓰다듬어 주세, 억!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옆구리를 꼬집었다.
너 이제 꼬집을 줄도 아니?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내 몸에는 안 좋은 거 같지만.
덕춘이만 난리면 좋으련만 릴카도 거들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나도 작업해야 한단 말이야.”
이 망할 꼬맹이는 같으니. 부활한 지 3시간 된 사람한테 땡깡 부리고 앉았다.
에라, 한 대 더 맞아라.
“꿱! 진짜 아파!”
같은 곳을 두 번 쳐서 그런가 아주 좋아 죽으려 한다.
흡족하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맛있게 먹었어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요? 좀 더 쉬었다 가도 되는데.”
“쉰다고 해결되지는 않으니까요. 될 때까지 덤벼 봐야죠.”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벨라를 뒤로한 채 가게를 나섰다.
어차피 내 코인은 무한.
안 되면 될 때까지 도전한다.
단순히 퀘스트 재료를 되찾고 펠라인 세트를 얻기 위함만은 아니다.
도전 의식.
아무런 반격도 못 한 채 당했다는 사실에 오기가 생겼다.
“죽을 때는 죽더라도 얼굴에 한 대 꽂아 줘야지.”
“궤에에엑.”
각성하기 전에도 독종으로 불렸던 나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끈질긴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보여 주마.
의지를 다지며 21층으로 올라가는 포탈로 향했다.
* * *
열두 번.
24층에 있는 NPC, 알리오스에게 도전한 횟수다.
결과는 참패. 단 한 번도 놈을 때리지 못했다.
열세 번째 도전을 앞두고 난 진저리를 쳤다.
“역시 NPC는 NPC라는 건가.”
설산 정상으로 들어가는 경계선에 선 채 어딘가 있을 놈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보면 이게 정상이었다.
S급 헌터들도 NPC한테는 덤비지 않는다.
다른 NPC와의 관계가 악화돼서? 이득 볼 일이 없어서?
아니. 그냥 싸워 봤자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니까.
그래도 S급이면 60층대에 올랐다는 건데 NPC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오른 층수에 비해 강하다지만 맞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
실제로 단 일격도 피하지 못하기도 했고.
아. 딱 한 번 피한 적이 있기는 하다. 내 능력이 아니라 행운 스텟이 발휘돼서 발이 미끄러진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두 번째 공격에 당했다.
한 가지 위안 삼을 게 있다면 약간이지만 성과가 있었다는 거 정도?
흐릿하지만 알리오스를 봤다. 찰나의 순간이라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가벼운 옷차림에 검을 들고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정면 돌파로는 답이 없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
들어가자마자 되갚기를 써 보기도 했고, 버프 다이스에 밤을 부르는 자 칭호까지 사용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후후후. 이걸로 일단 유혹하고 기회를 틈타 기습을!”
내 손에 들린 건 꽃다발.
계획은 간단했다. 실력으로 안 된다면 함정을 파자!
어느 순간부터 그를 찾아온 목적이 변질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한두 번 죽을 때는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는데 두 자릿수를 넘어가니까 반드시 턱주가리를 때리고 싶어졌다.
“냥펀 덕을 이렇게 보네.”
이번 계획은 엄밀히 따지면 내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홉 번째였던가. 하도 털려서 커뮤니티 멤버들한테 징징거렸더니 냥펀이 반응을 보였다.
[냥냥펀치]: 알리오스? 왠지 낯익은 이름인데. 잠깐만.
[냥냥펀치]: 아항. 걔 우리 고갱님임.
냥냥펀치는 10층 NPC, 금천황후의 상단 화조국花鳥局 소속으로 들어갔다.
화조국의 역할은 금천황후가 마음에 들 만한 물건을 찾아내 진상하는 것.
이것이 가장 기본이었고 다른 역할은.
“NPC들과 거래하는 거였지.”
릴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릴카는 NPC 개인을 상대로 하는 소매업자라면 화조국은 도매라는 것.
안전지대에 있는 수많은 편의시설과 상점. 릴카 혼자서 물건을 대고 있을 리가 없었다. 화조국이 움직여서 물자를 옮기는 거지.
금천황후가 왜 손에 꼽히는 부자 NPC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도전하는 알리오스는 화조국과 거래를 튼 녀석.
따로 뭘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개인 거래인 릴카를 거부하고 대형 집단이랑 손을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름에 이유가 있나.
“상관없지. 나야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한 손에는 꽃다발. 다른 손에는 메달을 쥐었다.
화조국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패. 냥펀한테 잠깐 빌렸다.
금천황후한테 걸리면 큰일 난다고 하니 빠르게 쓰고 돌려줄 생각.
물론 합당한 대가와 함께. 친한 사이여도 계산할 건 해야지.
“궤에에에.”
덕춘이가 어깨를 탁탁 두드린다.
가자는 신호.
심호흡 한 번 하고 발을 내디뎠다.
[NPC 알리오스의 구역에 진입합니다.]
하도 들어가서 그런지 알림창까지 뜬다.
한순간에 멎는 눈보라.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 낼 틈도 없이 살기가 폐부를 찌른다.
“또 왔냐. 와. 징글징글하네. 열 번은 죽인 거 같은데.”
역시나 방향성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열 번이 아니라 열두 번이다, 알리오스.”
존대는 없었다. 서로 칼 겨누는 사이에 존댓말은 무슨.
“코인이 남아도는 건가. 아니면 아바타? 신체 대체? 뭔지 모르겠군.”
호기심이 생긴 건지 아니면 자주 보다 보니 정이 든 건지 웬일로 바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래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여덟 번째 때도 비슷한 패턴으로 죽었으니까.
나보다 월등히 강한 주제에 대화로 허점을 만들고 기습을 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뭐, 내가 할 말은 알고 있지? 지금 나가면 살려 준다.”
“싫은데?”
“그럼 죽어야지.”
어느 순간 따끔한 감각이 목을 타고 흐른다.
주륵.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오른쪽 목에 칼날이 닿아 있다.
보통이었다면 여기서 죽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내 손에는 증명패가 들려 있었으니까.
“…너.”
“어, 맞아. 화조국에서 왔다.”
난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검을 쥔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날 노려보고 있다.
이제야 제대로 보네.
키는 나랑 비슷. 다듬지 않은 수염이 지저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미남이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뒤로 묶고, 옷차림은 기온에 맞지 않게 얕은 면티 하나. 겉으로 드러난 근육만 봐도 얼마나 단련했는지 알 것 같다.
반갑다, 자식아.
손가락으로 칼날을 밀어내고 왼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건 화조국에서 보내는 선물.”
증명패는 자연스럽게 보물 주머니 속으로 넣고.
꽃다발을 그의 손에 쥐여 주는 순간.
“이건 개인적인 선물!”
-파앙!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지척의 거리. 아무리 NPC라도 이번만큼은……!
“엇?”
놈의 턱에 주먹이 꽂히기 직전,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한 번에 쫙 빠지는 힘. 뒤늦게 올라오는 후두부의 통증.
시야가 돌아간다.
바닥이 나를 반겼고.
-풀썩
난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진짜 깨졌나? 목을 타고 뜨끈한 게 흘러내리는 거 같은데.
“게, 게에엑!”
덕춘이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흐릿한 시야로는 바로 앞에 있는 거 같은데.
손가락을 까딱일 힘조차 없다.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또 실팬가. 턱주가리 날릴 수 있었는데.
“와, 이 새끼. 제대로 또라이네.”
눈을 굴려 알리오스를 바라봤다.
계속해서 감기는 눈으로 머리를 긁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암전.
눈이 감겼고.
“어휴. 내 팔자야.”
알리오스가 내 발을 잡고 끌고 가는 것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