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애꾸 예티 페스티벌
별을 주시하는 눈은 이런 게 좋다.
내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감춰진 정보, 혹은 내게 필요할 거라 판단되는 정보가 있다면 보여 주니까.
단순히 주변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권능이 없었다면 꽤 고생했을 거다.
지독한 추위로 신체 능력은 떨어지고 감각조차 무뎌진다.
게다가…….
“끼기기긱!”
-촤아아악
눈 속에 숨어 기습을 하는 몬스터들까지.
검을 휘둘러 눈꽃숭이를 베어 냈다.
2성급 괴물. 몬스터 치고는 귀엽게 생긴 녀석이다.
온몸에 돋아난 흰색 털과 앙증맞은 다리. 모르는 사람은 혹할지도 모르는 외향이었지만, 저놈들이 가지고 있는 독침에 한번 찔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일반인은 즉사. 고블린이 쏘는 독침과는 차원이 다른 독성을 가지니까.
-쿡!
발을 옮기려던 때, 뭔가가 발목을 찔렀다.
“키케케케!”
“한 마리 더 있었네.”
눈보라가 하도 쳐서 못 알아차렸다.
방어구 빈틈을 노린 건가. 독침이 달린 촉수를 꿈틀거리며 웃는 것이 승리를 확신한 거 같은데.
[독이 주입됩니다.]
[독 내성 (D) Lv.2]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끼, 끼기긱?”
아쉽게도 난 독 내성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지.
덕춘이이 뱉는 독액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엽지.
“별게 다 덤비네. 아오!”
“키에에에!”
뻐엉! 축구공 차듯 눈꽃숭이를 걷어찼다.
저만치 날아가는 녀석.
[눈꽃숭이 처치 (14/30)]
오래지 않아 클리어 조건이 올라가는 알림이 들렸다.
벌써 몇 마리째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또 만나면 사포로 날려 버려야지.
나오라는 애꾸 예티는 안 나오고 잡다한 놈들만 가득하다.
아니, 예티를 한 마리 보기는 했는데.
“그놈은 일반 예티였단 말이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니 분명하다.
이제와서 생각나는 건데 애꾸 예티의 눈물은 어떻게 얻는 거지?
다른 부산물이면 도축으로 가져가면 그만인데 눈물은 뽑는다고 뽑아지나?
“눈물샘이라도 뜯어서 짜야 하는 건가.”
놈들이 들었다면 기겁할 내용이었지만 진짜 모르겠다.
아니며 두들겨 패? 맞다 보면 울지 않을까.
상점창에서 고춧가루라도 사서 뿌려 봐? 코리안의 매운맛을 보면 눈물 콧물 다 뺄 것 같은데.
“골치 아프네.”
하여간 릴카 녀석. 가져오라 말만 하지 말고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려 주지.
쯧. 혀를 차며 열심히 발을 옮기 결과 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바람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동굴.
“오. 크다.”
“궤에에.”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절벽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묘하다. 동굴이 깊어도 안이 조금은 보이는 게 정상인데 동굴 초입조차 볼 수가 없다. 바람도 불어오지 않고.
몬스터의 발자국이나 털도 보이질 않는다.
시스템적인 뭔가가 적용된 것일까.
일단 찍자.
[카메라 (D) Lv.1]
나중에 공략 올릴 때 등록할 생각.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더 쉽게 찾을 수 있겠지.
사진을 확인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쑤욱. 몸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오른다.
[던전의 진명이 드러납니다.]
[애꾸 예티 페스티벌!]
[모든 종류의 전투가 불가능해집니다.]
“예?”
당황스러운 알림창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몬스터가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던전이다.
이거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전투 불능?”
이런 옵션이 붙어 있는 경우는 처음 봤다.
무슨 수로 전투를 막아? 스킬이나 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주먹만 뻗으면 공격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전투가 안 되면 눈물은 어떻게 얻으라고.”
가서 제발 울어 주십쇼 하고 빌기라도 할까?
방법이야 찾으면 그만. 애꾸 예티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감사하려 했는데.
“길이 막혔네?”
“그에에.”
앞에 길이 없다. 완전히 막혀 벽만 보이는데 다른 출구나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게 있다면 벽면에 커다란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
정교하지는 않지만 모양은 알아볼 수 있었다.
특정 동작을 표현한 것 같은데.
[파이어 밤 (A) Lv.6]
-콰아아아앙!
그건 관심 없다. 벽이 있으면 뚫으면 그만.
지체없이 파이어 밤을 날렸다. 불꽃과 함께 연기가 터져 나온다.
이 정도면 충분히 뚫겠지. 자그마치 A급으로 올라간 스킬인데.
[애꾸 예티 페스티벌에서는 모든 공격이 무효화됩니다.]
[데미지 0]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멀쩡한 모습의 벽. 흠집은커녕 그슬리지도 않았다.
주먹으로 때려도 반응이 없고, 걷어차도 소리만 울릴 뿐 부스러기조차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를 긁적였다.
무력으로 어떻게 하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이곳을 뚫어야 한다는 건데.
물끄러미 벽화를 바라봤다.
저거. 따라 하라는 건가.
혹시나 싶어 그림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앞으로 한 발 내밀며 양손을 머리 위로. 손목은 아래로 꺾는다.
괴상쩍은 자세가 분명하지만.
-콰앙!
“이게 열리네.”
예상이 맞았는지 벽이 허물어지며 다음 벽이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길을 뚫는 건가.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던전이었지만 뭐 어떤가. 언제부터 탑이 정상적이었다고.
난 몸을 풀었다. 가 보자.
“흡! 합! 차!”
-쾅! 콰앙! 쾅!
벽면에 그려진 동작을 빠르게 이어 갔다.
스텝을 밟고 턴을 하고 포즈를 취한 뒤에 양팔을 벌린 후 얼굴을 감싸며 한 팔은 위로.
이거 의외로 재밌다!
“약간 리듬 게임? 그거 하는 기분인데.”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어느 순간부터 음악 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북이 둥둥 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가 선율을 만든다.
변칙적이고 빠른 리듬!
왠지 모르게 흥이 나 더욱 경쾌하게 동작을 따라했다.
하면 할수록 각 동작의 흐름이 매끄러워진다.
서로 연결된 동작. 어느새 몰입한 나는 서툴지만 박력있는 춤사위를 해냈고.
-콰앙!
[기본적인 구애의 춤을 완료했습니다.]
[애꾸 예티의 페스티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와우.”
마지막 벽이 무너져 내리며 진정한 던전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무대.
수많은 애꾸 예티가 관중석에 앉아 있었으며, 마법으로 이루어진 홀로그램이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몬스터 주제에 한껏 치장한 놈들이 서른.
화려한 조명을 받은 예티들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애꾸 예티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종족입니다.]
[페스티벌에서 성과를 보이세요!]
-띠링!
그와 함께 울리는 알림.
[예티와 함께 춤을! - 특수 퀘스트]
-클리어 조건: 댄싱 서바이벌에 10위 권 안에 들기.
-보상: 방청객들이 흘린 눈물, 스킬북, 프레고스의 보물지도 조각, 상금.
-탈락 시 던전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게 뭐람.”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비슷한 퀘스트를 한 적이 있기는 하다.
8층에서 오크 챔피언쉽을 한 적이 있으니까.
각 종족별 테마를 주제로 진행되는 퀘스트.
애꾸 예티의 던전은 퀘스트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
[당신의 춤 실력을 뽐내보세요.]
[예선전이 시작됩니다!]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퀘스가 진행됐다.
화면으로 떠오르는 얼굴들.
똑같은 예티들이라 구별조차 못 하겠다만 다른 놈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쿠아아아!”
“크하아!”
화면에 누가 보이냐에 따라 함성 소리가 달랐으니까.
맨 마지막으로 보인 건 나.
“…….”
짜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다.
와. 이거 은근히 열받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반응과는 상관없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대 저편에 예티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보였다.
툭. 옆에 있던 애꾸 예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쿡. 쿠륵.”
명백한 비웃음. 울컥 화가 치미는 것도 잠시.
놈이 음악에 맞춰 팔을 펼쳤다.
당당하게 편 가슴. 절묘한 각도로 꺾이는 고개.
이어 앞으로 한 발 내밀며 이어지는 춤사위!
저거, 내가 벽을 뚫었을 때 했던 동작이다.
“우오오오오!”
“쿠아아아!”
예티들이 함성을 내지른다.
화면으로 비친 녀석의 옆으로 점수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다른 놈들도 이에 질세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는 건 나뿐.
여기저기서 야유와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래, 이게 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다. 그래.”
보상을 얻기 위해서라도 해 주고 만다.
* * *
예선 탈락.
그렇다. 저 망할 예티들한테 참패했다.
분한 것을 떠나 기분이 더럽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몬스터한테 이딴 취급을 받을 줄이야.
“허허. 어허허허.”
탑에 들어오고 온갖 위기와 역경을 돌파했다.
수많은 위기를 이겨 내고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해 승리했다.
악에 받쳐 날뛴 적은 있어도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와. 이거 멘탈 갈리네.”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차라리 전투를 벌이는 거면 여기에 있는 모든 놈들을 해치울 수 있겠다만. 춤은 좀…….
얼굴을 쓸어내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서 자빠질 수는 없지.
찬찬히 방금 무대에 있던 일을 상기시켰다.
어색하기는 했다. 애초에 춤을 춰 본 적도 없었다. 몬스터들의 춤은 당연히 모르고.
그나마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어거지로 춤사위를 이어 가기는 했지만.
“이걸로는 안 돼.”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미친 예티들은 밥 먹고 춤만 춘 게 분명하다.
매끄러운 움직임. 절도 있는 동작. 박력 넘치는 포즈까지.
이건 전투다. 무력이 아닌 몸짓으로 이루어지는 전투!
“궤에에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덕춘이가 등을 두드린다.
걱정 마라. 기운 차렸으니까.
난 주변을 살폈다.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던전에서 쫓겨나지는 않았다.
[곧 패자 부활전이 시작됩니다.]
자비로운 시스템께서 기회를 주었으니까.
어떻게든 패자 부활전을 뚫어야 한다.
내가 있는 곳은 탈락자들이 모인 대기실.
대략 열 마리에 가까운 애꾸 예티들이 모여 있었다.
-쾅!
“크에?”
시험 삼아 옆에 앉아 있던 애꾸 예티의 머리를 때려 보았다.
역시나 데미지 0.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예티가 날 바라본다.
음. 예상은 했지만 진짜 데미지가 안 들어가는군.
시간이 부족하다. 북북춤인지 구애의 춤인지 그걸 연습하는 건 사실상 무리.
그러니.
“덕춘아, 처리해. 기절만 시키자.”
“그에에.”
전부 처리하는 수밖에.
자고로 경쟁할 대상이 없으면 생존자가 올라가는 법.
덕춘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예티의 뺨을 때렸다.
-철썩!
[던전의 효과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속성, 카오스가 설정에 저항합니다!]
“쿠헤에엑!”
얼굴이 잔뜩 부은 채 쓰러지는 녀석.
예상치 못한 일인지 예티들이 발악을 해 댔지만.
-찰싹!
-처어얼썩!
덕춘이의 손바닥은 자비가 없었고.
[패자 부활전 참가자들은 모두 무대로 나와 주십시오.]
난 혼자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크룩?”
“크오오?”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예티들.
시간이 지나도 올라오는 놈은 없었고.
[패자 부활전에서 승리합니다.]
[본선 무대로 진출합니다.]
춤 한 번 안 추고 본선에 참가할 수 있었다.
덕춘이가 불경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뭐. 왜.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승부했는데.
“그엑. 게으으으. 쯧.”
방금. 저거 혀 찬 거 맞지?
날이 갈수록 감정 표현이 다양해지는 덕춘이를 갑옷 속에 넣었다.
당찬 걸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예티들이 나오고 있었다.
대략 20마리. 못해도 반은 가야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
춤으로는 승부가 안 되고.
남은 건 그것뿐인가.
[본선이 시작됩니다.]
알림과 함께 조명이 빛을 뿜었고, 연주가들이 박진감 넘치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선곡이 나쁘지 않다.
“이제부터는 내 무대다.”
모두가 자세를 잡는 가운데.
난 그동안 쓸 일이 없었던 스킬을 사용했다.
[치명적인 포즈 (E) Lv.1]
“크오오오?!”
“크헉! 크허억!”
함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