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스텟 강화권
한 뼘도 되지 않는 양피지 조각.
보기에는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짐작조차 안 간다.
설계도? 문서? 지도? 떠오르는 건 많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조각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선 몇 개 그어진 게 전부였으니.
하지만 릴카라면 알지 않을까?
“이게 뭔데?”
“…몰라서 너한테 물어보는 거거든?”
손에 묻은 기름기를 옷에 문질러 닦은 릴카가 요목조목 양피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템인 건 맞는데. 으음. 자체적인 옵션은 없고. 조건부 발현인가. 아! 이거 트리거 아이템 같아.”
“트리거 아이템이라면?”
“퀘스트나 유적 관련된 거지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진짜였다니.
좋은 소식이다. 트리거 아이템과 연결되는 것들은 보상이 좋으니까.
애초에 특정 아이템이 없으면 퀘스트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히알틴 유적도 열쇠 조각이 없으면 진입하지 못하는 것처럼.
“저도 한번 봐도 될까요? 20층대에 있는 건 대충 아는데.”
관심을 보인 벨라가 손을 내민다.
여기저기 쏘다니는 릴카와 달리 벨라는 20층에 머무는 NPC.
NPC들 간에 커넥션이 있는 걸 생각해 봤을 때, 20층 한정해서는 벨라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릴카에게서 조각을 받아 그녀에게 전했다.
앞치마에 물기를 닦고 양피지를 받아든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이거 봤어요.”
“봤다고요?”
“예.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아니? 다른 조각을 NPC인 벨라가 가지고 있다고?
잠시 창고에 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벨라를 바라보다 릴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걸 NPC가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NPC가 퀘스트를 어떻게 주는 줄 알고.”
맞네. NPC는 퀘스트를 주는 존재.
보상으로 줄 아이템이나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다.
어디서 그런 물건들을 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한 마음에 릴카에게 물었다.
“시스템과 거래하든지, 나 같은 상인한테 얻든지 둘 중 하나지. 직접 구해 오는 경우도 있긴 하다만.”
상인은 그렇다 치고 시스템과의 거래는 무엇인가.
재차 물어봤지만 릴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정보는 돈이 듭니다, 고갱님. 50,000포인트 주면 알려 줄게.”
“50,000포인트는 너무 비싼 거 아니냐?”
“시스템 관련 정보는 원래 비싸. 나니까 이 정도로 해 주는 거야. 뭐, NPC의 호감도가 최대치면 또 모르겠네.”
오호. 그런 게 있구나.
호감도라는 게 별 쓸모없는 건 줄 알았는데 나름 기능이 있는 모양.
하기야 생판 남보다는 익숙하고 친근한 사람한테 더 잘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릴카와의 호감도가 아직 엄청나게 높지는 않다는 거였고.
내 생각을 짐작한 걸까. 릴카가 허리에 손을 얹더니 턱을 들었다.
“나 그렇게 쉬운 수인 아니야. 엣헴!”
“어, 그래. 훌륭하다.”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귀가 쫑긋거리는 것이 느낌이 묘하구먼.
“어머, 사이 좋네요? 릴카는 머리 쓰다듬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창고에서 돌아온 벨라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잠시 나와 릴카의 눈이 마주쳤고.
“멍청이!”
“악! 왜 때려!”
릴카가 내 머리를 치고 의자에서 뛰어 내렸다.
“난 간다! 벨라, 잘 먹었고 넌 내 퀘스트 잘 깨고 돌아와!”
마지막 말을 뱉고 쏜살같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릴카.
난 머리를 문지르며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아오, 아파. 쪼그만한 게 손은 엄청 맵네.
다음에 만나면 죽었다. 바로 딱밤 때린다.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던 때, 벨라가 옆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워서 저래요. NPC는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어서요. 행동도 그에 맞게 할 수밖에 없어요. 릴카는 상인이니까 거래 형식으로밖에 돕지 못하는 거죠.”
품에서 또 다른 양피지 조각을 꺼낸 벨라가 턱을 괴며 날 바라본다. 눈빛이 묘하다.
“이런 아이템 감정도 보통이라면 감정 비용을 받는답니다. 릴카의 마음을 어떻게 산 거예요?”
어떻게 사다니.
가만히 생각해 봐도 딱히 한 게 없는데.
꿀밤은 몇 번 때려 준 적이 있지만 그런다고 친해졌을 리는 없고.
‘생각해 보니 릴카 이 녀석도 꿀밤 정도는 피할 수 있지 않았나?’
일부로 맞아 준 건가? 아니면 나한테 완전히 경계심을 없애서?
모르겠다. 나름 이유가 있겠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퀘스트를 깨 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 10층에서 받은 퀘스트를 말하는 거군요. 흐음.”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벨라가 내게 양피지 조각을 건넸다.
어느새 서로 붙어 있는 조각들.
선이 이어지고 문양이 완성됐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이건.
“여기요. 제가 알기로는 이 양피지는 지도예요. 28층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보물 지도!”
그녀의 설명에 눈을 빛냈다.
권능을 사용해 정보를 읽었다.
[의적, 푸레고스의 보물 지도 (2/12)]
-혼란하던 제국의 남작 푸레고스 메르딘은 의적이었습니다.
-수없이 진행되던 영지전, 고통받는 제국민을 위해 싸움의 원인을 훔치기로 결심.
-끝내 모두가 탐하던 보물을 훔쳐 봉인하는 데 성공합니다.
-푸레고스 메르딘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보물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범상치 않은 내용이다.
제국이라는 단어는 쉽게 붙지 않으니까.
그곳의 귀족들이 가지기 위해 날뛰었을 정도의 보물이라면 분명 대단하겠지.
반드시 얻어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조각을 가져가야 하는데.
“선물이에요. 가게를 지켜 줬는데 이 정도는 줄 수 있죠.”
“감사합니다!”
“궤에!”
쿨하고 멋진 벨라!
난 만세를 했고, 벨라 역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바로 떠날 건가요?”
“이벤트도 끝났으니까요. 일단 광장을 돌면서 쓸 만한 아이템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지만요.”
20층에서 할 퀘스트나 이벤트는 없다.
대신 상인들이 파는 물건 중에 숨겨진 옵션이 있는 아이템을 찾을 생각.
10층에서 얻은 단검도 요긴하게 쓰지 않았던가. 이곳에도 괜찮은 게 있을지 모른다.
식사도 마쳤으니 바로 움직여 볼까.
“밥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후우. 가시면 이제 말동무도 없을 텐데 그때까지 심심해서 어떡하죠?”
아쉬운지 벨라의 눈꼬리가 내려간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기는 한다.
장사가 안되니 손님도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을 거다.
외상만 하는 밉상 손님인데, 릴카가 올 때마다 눈에 띄게 반기던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흐음. 난 잠시 턱을 매만지며 가게를 둘러봤다.
고작해야 네 테이블.
오래된 주방과 장식도 딱히 없는 홀.
이벤트마다 가게가 무너졌으니 꾸미는 것도 힘들었을 테지.
이목을 못 끄니 손님도 없었을 거고. 동쪽 구역만 가도 괜찮은 가게가 많으니까.
장사도 장사인데 다음 디펜스 이벤트도 문제다.
이번이야 내가 나섰지만 다음에는 어찌 될지 모른다. 여전히 서쪽 구역은 비인기 지역.
다시 한번 가게가 무너지면?
‘손님이 더 줄겠지.’
장사하는 시간보다 가게 다시 만드는 시간이 더 길 테니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이…….
‘있군.’
결국 장사가 잘되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가게가 무너져도 복구 퀘스트 보상으로 지불할 포인트가 충분하다면 사람들도 찾아와주겠지.
장사하는 기간이 늘어나면 돈을 더 벌 테고. 가게를 리모델링을 하든 이벤트를 하든 하면 될 거다.
맛은 보장한다. 가격도 착하다. 가게 주인인 벨라? 두말할 것도 없이 친절하고 따뜻하다.
항상 예민한 사람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
어쩌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다.
난 스킬을 사용했다.
[카메라 (D) Lv.1]
허공에 떠오른 촬영 장비.
처음 보는 스킬에 호기심을 느낀 벨라가 눈을 깜빡였고.
“벨라, 가기 전에 선물 하나 할게요.”
그녀를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쁘띠공듀의 이름값. 사진이라는 시각 이미지. 나를 추종하는 집단의 존재.
인플루언서라고 들어 봤나 모르겠네.
* * *
21층.
뜨거웠던 10층대와 달리 20층은 냉기의 공간이었다.
각 환경에 적응해 보라는 탑의 안배일까.
가혹하리만치 추운 필드는 생존 자체를 제약시켰고, 그 대상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 따뜻하다.”
“궤에에에.”
물론 나와 덕춘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나는 파이어를. 덕춘이는 특성, 화염을 이용해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미 화기 내성의 레벨은 상당히 올라간 상태. 직접 불을 두른다고 화상을 입을 걱정은 없었다.
“몸 좀 녹이고 다시 움직여야겠네.”
주변에는 죽은 몬스터 시체가 가득했다.
2성급 몬스터 더블혼 베어.
북극곰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머리에 길쭉한 뿔 한 쌍이 달린 몬스터였다.
대략 50마리 정도 잡았나.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미 클리어 조건은 완료.
게다가.
[냉기 내성 (E) Lv.2]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패시브 스킬도 얻었다.
탑이 이게 좋다. 죽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어 놨지만 그냥 죽게 두지 않는다.
11층에서도 열기에 저항하라며 화기 내성 스킬을 숨겨 두지 않았던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눈으로 뒤덮인 필드에 스킬북이 있었으니.
비록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지키고 있었지만 내 상대는 되지 못했다.
-피쉬쉬쉬
몸에 두르고 있던 불을 꺼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장 찾아온 냉기에 손끝이 다 아릴 지경.
“냉기 내성도 빨리 레벨을 올려야지.”
그래야 움직임도 더 편해질 테니까.
21층이 이 정도면 29층에 올라서는 얼마나 추울지 가늠도 안 됐다.
“덕춘아 시작하자.”
“그에에에.”
내 말에 덕춘이가 싫은 소리를 하더니 갑옷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저번부터 꾸준하게 하고 있는 수련.
[독에 중독됩니다.]
[회복됩니다.]
[산성에 노출됩니다.]
[회복됩니다.]
덕춘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독과 산성 그리고 회복.
내가 가지고 있는 독 저항 스킬의 레벨을 올리기 위한 비법이다.
겸사겸사 덕춘이의 특성 등급도 올리고.
원래는 독성만 훈련했는데.
[강체强體 (D) Lv.5]
-몸이 단단하고 질겨집니다.
-외부 자극에 저항합니다.
이번에 새로운 스킬을 얻으면서 산성침도 같이 수련하고 있다.
디펜스 이벤트 보상으로 받은 중급 랜덤 스킬 박스에서 나온 스킬.
보상은 더 있었다.
“1만 포인트에 스킬 승급권, 스텟 강화권, 스킬북도 얻었지.”
A급 장비 하나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대략 3, 4만 포인트.
나야 릴카와 인연이 있어 좀 싸게 사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 정도 비용은 내야 한다,
1만 포인트면 상당히 많은 금액.
스킬 승급권이야 말 그대로 스킬의 등급을 올려 주는 아이템이다.
등급이 높을수록 레벨을 올리기도 힘들고 승급 쿠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건 나중에 쓰도록 하고.”
굳이 지금 쓸 필요 있나. 훗날 한계에 부딪히면 그때 쓰면 되지.
다음으로 스킬북.
[독자무강獨者武强 (A) Lv.1]
-인생은 개인전!
-홀로 싸울 때 더욱 강해집니다.
무려 A급 스킬이다. 디펜스 이벤트의 보상이 화끈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A급 스킬을 줄 줄이야.
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벤트에 참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점수가 압도적이었기에 더 좋은 보상을 얻은 것도 있지만.
“꽤 유용하게 쓰겠어.”
10층대도 그렇고 20층대도 그렇고 혼자 탑을 오른다.
패시브 스킬인 만큼 그냥 등반만 해도 레벨이 오르겠지.
특히 나 같은 경우 폭발형 스킬이 많아서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제 위력을 내기 힘들다.
여러모로 좋은 스킬.
뭐, 여기까지는 다 좋은데.
“이걸 어디다 쓸지가 고민이네.”
[하급 스텟 강화권 (A)]
-어떠한 스텟이든 10 증가합니다.
하급 주제에 A등급을 받은 아이템.
스텟 자체를 상승시켜 주니 할 말은 없지만.
“보통이라면 마력에 쓰겠지만 난 딱히 필요 없단 말이야.”
이미 마력은 충분하다. 더 있으면 좋겠지만.
[21층 클리어 보상.]
[성과에 따라 스텟이 상승합니다.]
[힘 +12]
[민첩 +10]
[마력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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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층을 깨는 것만으로도 스텟이 올라간다.
나 같은 경우 스킬을 많이 활용해서 그런지 마력 스텟이 특히 더 붙는 경향이 있고.
그렇다면 신성력?
남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스텟.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헌터가 가질 수 없는 스텟이다.
난 사제 계열이 아니니 인위적으로 올릴 방법도 마땅치 않고.
나중에 신성력을 이용하는 스킬을 얻을 수도 있으니 좀 더 투자해 봐?
그것도 아니면.
“거기다 쓰면 되겠군.”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스텟.
스테이터스에도 표시되지 않는 특별한 스텟이 내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