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1등은
때리고 베고 터트린다.
약간의 딜레이도 없이 이어지는 연계.
가장 파괴력이 높은 스킬의 조합과 강인한 신체로 밀어붙이는 패기.
“크어어어.”
불에 휩싸인 3성급 몬스터 트롤이 바싹 익혀 쓰러진다.
재생력이 뛰어난 녀석이지만 온몸이 익어 버리면 재생이 불가능하다.
내 대부분의 스킬이 폭발형이고.
“크하아앙!”
“깨갱!”
트롤을 넘어 달려드는 1, 2성 몬스터는 걷어차는 걸로 끝냈다.
어디 잡몹이 이빨을 들이밀어. 아주 다 뽑아 버릴라.
“후우. 진짜 많긴 많군.”
몬스터 사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닥을 적신다.
5차 웨이브까지 쏟아진 몬스터 숫자만 해도 3,000마리가량.
대부분 3성급 미만의 허약한 놈들이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아직 체력과 마력에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상당히 쌓인 상태.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마 김소담과 이상옥이 3성급 몬스터를 많이 정리해 둬서 다행인가.”
안 그랬으면 더 힘들뻔했는데.
뭐, 지금도 충분히 힘들기는 하지만.
[서쪽 구역 참가자, 박웅식이 사망했습니다.]
숨을 고르는 사이 올라온 메시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쌤통이다, 인마.”
미안한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러게 왜 민폐를 끼쳐. 내가 아니었다면 서쪽 구역 전체가 몰살당했을 거다.
죽을 거면 혼자 곱게 뒤져야지.
침을 탁 뱉고 추가 메시지가 뜨지는 않는지 살폈다.
잠잠하다.
“역시 직접 죽이지 않으면 살인자 칭호가 붙지 않는 모양이네.”
혹여나 살인자로 지정되지 않을까 걱정했더니만 생각 이상으로 기준이 널널한 모양.
나야 다행이지만. 살인자 칭호가 붙으면 실명이 밝혀진다. 나로서는 절대 반갑지 않은 효과.
“크르르르!”
“키히이익!”
잠깐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거 그냥 싸워서는 답이 없겠는데?”
혼자서 분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100마리에 가까운 몬스터가 남은 상황.
일일이 찾아 죽이는 건 힘들다. 그것도 넓은 필드에서 건물을 지키며 혼자 잡기는.
“몹몰이를 해야겠구만.”
생각을 정하는 것과 동시에 파이어를 발휘했다.
말 그대로 불만 피우는 거라 큰 데미지를 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화르르륵!
“크에? 크하아앙!”
놈들의 시선을 끄는 건 충분하지.
꼬리에 불이 붙은 녀석이 광분하며 내게 달려든다.
옳지. 잘 따라온다.
기세를 몰아 사방에 파이어를 뿌리며 어그로를 끌었다.
“크하아아!”
“꾸르르륵!”
저마다 개성 넘치는 울음소리를 내며 쫓아오는 놈들.
“궤에에에!”
질 수 없는지 덕춘이도 갑옷 속에서 포효했다.
아니, 넌 왜.
됐다. 몇 시간째 갑옷 속에 박혀 있으면 답답할 만하지.
가슴을 할짝거리며 회복을 시켜 주는 것도 질릴 거다.
그래. 마음껏 소리쳐라!
“날 따라와라!”
“그에에에에!”
나도 함께 소리를 지르며 질주했다.
필드에 있는 몬스터들이 모두 쫓아오기를 바라며.
-우르르르릉!
피리 부는 사나이의 기분이 이럴까.
땅이 울릴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가 몰려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식은땀이 났을 광경이었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점수로 보일 뿐이었고.
“저쪽이 좋겠군.”
비교적 온전한 상태의 구덩이를 확인한 나는 그곳으로 뛰었다.
-타앗!
떨어지기 직전에 점프. 달려온 속도를 받아 10미터가량을 날아갔고.
-콰가가강
-빠득! 빠드득!
미쳐 속도를 늦추지 못한 놈들이 구덩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래 봤자 금세 가득 찼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한곳에 모여 있기만 하면 되니까.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 (B)]
[버프 다이스 (B) Lv.3]
[2]
[데미지 증가]
버프를 몸에 두르고 몬스터들에 뛰어들었다.
서로 잡아먹겠다고 아가리를 벌리는 녀석들.
“잘 가라.”
[되갚기 (A) Lv.6]
어느덧 6레벨까지 올라간 되갚기 스킬.
사냥을 거듭하며 누적된 데미지는 이미 한계치.
-번쩍!
나를 중심으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콰아아아아앙!
대지를 진동시키는 폭발이 필드 일대를 집어삼켰다.
되갚기 레벨이 오르며 누적시킬 수 있는 데미지의 한계도 증가한 상황.
안 그래도 강력한 데미지를 자랑하는 스킬인데 지금은 어떨까.
“와우.”
한차례 후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었고, 한곳에 모여 있던 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살 조각 하나까지 증발시키는 에너지의 파동!
그 여파가 남아 하늘을 울리고 있었으니 위력을 짐작할 만했다.
[서쪽 구역 디펜스가 종료됩니다!]
[첫 번째로 모든 웨이브를 클리어했습니다.]
[서쪽 구역에 보너스 점수가 부여됩니다!]
“끝났다아아아!”
난 양팔을 뻗으며 소리 질렀다.
결국 해냈다. 쉴 틈 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를 베고 또 베고. 터트리고 조각내면서 기어이 디펜스를 끝마친 거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계속해서 움직이느라 뜨거워진 몸을 식히며 털레털레 걸어갔다.
웨이브도 끝났으니 보호막 안에 넣어 둔 사람들도 꺼내 줘야지.
“저, 저기 이블아이다!”
“진짜 혼자서 다 잡았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분 정도 걷자 성물을 설치한 곳이 나왔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일까 새된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성물, 수호자의 의지 (AA)가 비활성화됩니다.]
보호막을 해제하자 너나 할 거 없이 달려오더니 헹가래질을 하기 시작한다.
“이블아이 만세!”
“이블아이 만세!”
“와아아아아!”
한차례 난리가 끝나고 땅에 내려선 난 몸을 풀었다.
헹가래는 처음 받아 보네. 나쁘지는 않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대단하게 보였다는 거니까.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저 많은 괴물을.”
“이전에 한 행동들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웅식 그 자식 말에 넘어가서… 아니죠,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둘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생존이 확실시되니 머리가 돌아가는 거 같다.
“됐습니다. 지난 일 가지고.”
일일이 따지기 귀찮기도 하고 결과론적으로 이들을 보호막에 가둔 덕분에 5차 웨이브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사냥한 몬스터가 줄어든 만큼 내가 얻은 점수가 올라간 것.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는 좋았다.
“고생 많이 했어요, 이블아이 씨.”
“신세를 졌군. 이상옥이라고 한다.
“아, 맞다. 소개가 늦었죠. 김소담이라고 해요.”
이상옥과 김소담이 악수를 청했,고 난 차례로 두 사람의 손을 맞잡았다.
“반가워요. 그냥 이블아이라고 불러 주세요.”
뭐가 그리 좋은지 김소담이 방긋 웃는다.
“저 사실 10층에 있을 때 이블아이 씨 경기 봤어요. 경기도 대박이었지만 끝나고 탈모맨을 구하는 것도 대박이었어요!”
“그걸 봤어요?”
“당연히 봤죠. 전 투기장 이벤트가 시작할 때 올라와서 참가는 못 했지만 구경은 했어요. 자극받아서 열심히 굴렀죠. 으으. 고생은 좀 했지만.”
맞네. 내가 히알틴 유적에서 2주를 소모했으니 당시 10층에 있던 사람들이 20층에 오르기 충분한 시간이었을 거다.
그녀의 말에 이상옥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경기를 따로 보지는 못했지만 커뮤니티로 소식은 좀 들었지. 듣자 하니 쁘띠공듀와 커넥션이 있는 거 같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고맙다고 전해 줄 수 있나?”
이상옥이 말을 하다 말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따로 개인 메시지를 보내 볼까도 했는데 친추를 안 받아서. 크흠! 딱히 사심이 있던 건 아니고 꽃다발이라도 하나 보내 주려는 착한 의도…….”
오. 세상에. 탈모맨에 이어 멍청이가 하나 더 있었다니.
끔찍한 사실을 목도한 난 눈을 감았다.
아니, 그보다 이상옥 얘는 처음 봤을 때 날 피하지 않았었나?
난 의문을 담아 물었고.
“처음에는 그쪽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지. 권능이 절대 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거든. 정체를 알고 나니 이해가 된다. 이블아이면은 그럴 수 있지.”
그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피했던 이유가 그거였구먼.
생존의식, 상당히 괜찮은 권능이다. 객관적으로 강적을 판단할 수 있다는 거니까.
“사실 우리도 그쪽과 같은 쁘띠공듀의 추종자지. 그녀의 공략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거든.”
그녀가 아니라 그입니다.
굳이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쁘띠공듀 추종자라.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
기분이 이상하다. 간질거리는 것도 같고 부끄러운 것도 같고.
“맞다. 이블아이 씨도 추종자면 연합 소속인가요?”
“…연합이요?”
연합은 또 뭐야.
“쁘띠공듀 추종자끼리 모인 연합이에요. 길드 같은 건 아니고 서로 모여서 떠들고 정보 공유하는?”
“모르는 눈치군. 하긴 아직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나중에는 쁘찡연합의 이름도 널리 퍼지겠지.”
프, 뭐?
와, 씨. 그게 뭐야. 이름 구려. 징그러워.
“도대체 그딴, 아니 그 연합은 누가 만든 겁니까?”
“이준석 회장님이 만드셨지. 그분도 쁘띠공듀와 직접 커넥션이 있다 하더군.”
“아, 이준석.”
요즘 통 말이 없길래 뭐 하나 했더니 팬클럽을 만들어 놨냐!
머리가 아프다. 어째 주변에 정상인이 없어.
가만히 머리를 짚고 있는데 김소담이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튼 고생했어요. 비록 1등은 못 했지만 충분히 잘했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랭킹 표.
[서남쪽 구역 디펜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모든 웨이브를 클리어했습니다.]
[서남쪽 구역에 보너스 점수가 부여됩니다!]
촤르륵. 랭킹이 계속해서 변화했고 가장 위에는.
[디펜스 이벤트 랭킹]
-1위 1등 하는 거 보여 준다 탈모 쉐키야 (점수: 53,713)
-2위 이블아이 (점수: 44,393)
-3위 길명보_무학성 (점수: 21,856)
핥짝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약 10,000점의 차이.
난 빠르게 상세 정보를 읽었고.
[서남쪽 구역 생존자]
-1등 하는 거 보여 준다 탈모 쉐키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남쪽 구역의 생존자는 핥짝이 단 한 명.
대략 20명 정도가 생존한 서쪽과는 상황이 달랐다.
디펜스 이벤트는 사망자의 점수가 생존자에게 분배된다.
즉.
‘핥짝이 혼자 모든 웨이브 점수를 다 먹었다는 거네.’
허탈하게 웃은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 가요? 아직 다른 구역은 이벤트가 안 끝났어요.”
“아쉬워서 그런가? 충분히 잘했어. 굳이 자책할 필요는.”
“아뇨.”
난 김소담과 이상옥의 말을 잘랐다.
2등을 했다는 사실에 낙담해서 일어선 게 아니다.
“1등 챙기러 갑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디펜스 이벤트의 시스템을 들었을 때부터 말이지.
-우우우우웅
각 구역의 경계를 나누는 장막 앞에 섰다.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절대 넘을 수 없는 경계. 그 앞에서 검을 뽑았다.
-차캉
[타락한 천사의 검 (A)]
-???의 경계선을 끊은 검입니다.
-마기에 침식당해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일격 (C)이 적용됩니다.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릴카에게 20,000포인트를 주고 산 검.
권능을 통해 확인한 숨겨진 옵션은.
[타락한 천사의 검 (A)]
-천족의 배반자 플레타가 천계의 경계를 끊을 때 사용한 검.
-중죄를 지은 그는 영원한 미궁에 갇혔으나, 4년 뒤 영원한 미궁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죄수로 기록되었습니다.
-경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경계를 끊는 것.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핥짝아 미안하지만.
“1등은 내 거다!”
-촤아아아악!
크게 내지른 검에 장벽이 찢겼다.
시스템적으로 지정된 경계가 무너졌고.
“어디 한번 휩쓸어 보실까.”
난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서남쪽 구역의 디펜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알림을 확인한 핥짝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위험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탈락자가 속출했고 핥짝이의 부담은 커져 갔으니까.
모두가 분발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핥짝이뿐.
어떻게 싸웠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는 난전 속에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고, 기어이 마지막 몬스터까지 해치울 수 있었다.
“흐, 으흐흐. 아하하하!”
몸은 고됐지만 터져 나오는 건 웃음이었다.
1등! 이블아이를 꺾고 1등을 쟁탈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탈락해 점수를 독점한 결과.
서쪽 구역의 디펜스도 종료되었으니 반전의 여지는 없었고.
“내가 이겼다아아아!”
승리를 취한 핥짝이가 함성을 질렀다.
모든 고난은 우승의 달콤함에 사라진다.
그게 핥짝이의 지론이었고 이번 이벤트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어떻게 탈모맨을 놀려야 할까. 쁘띠공듀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냥펀한테 자랑하는 것도 좋은데.
행복한 고민을 하는 핥짝이의 시선이 랭킹창으로 향했다.
표정이 점차 딱딱해진다.
점수가 바뀌고 있다.
절대 변할 리 없는 사람의 점수가 올라갔다!
-촤르르르륵
[랭킹이 변동됩니다.]
“어?”
[디펜스 이벤트 랭킹]
-1위 이블아이 (점수: 74,595)
-2위 1등 하는 거 보여 준다 탈모 쉐키야 (점수: 53,713)
-3위 길명보_무학성 (점수: 21,856)
“그러니까 내가 2등?”
한 구역의 웨이브를 전부 먹었는데?
믿기지 않았지만 랭킹은 바뀌지 않았고.
“말도 안 돼!”
핥짝이는 투구를 집어 던졌다.
투구 속에 감춰져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