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알아서 살아
4차 웨이브에 이은 5차 웨이브.
앞에 있던 세 개의 웨이브와 달리 4, 5차 웨이브는 10분이라는 짧은 텀을 두고 진행되었다.
참가자를 극한까지 몰고 가는 악랄함!
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몬스터의 공세는 매서웠고, 수많은 탈락자를 배출했다.
대형 길드가 체계적으로 준비한 구역도 그러할진대 사람이 적은 서쪽 구역은 어떨까?
“이, 이런 빌어먹을!”
박웅식이 이를 악물었다.
처음만 해도 그를 따르는 무리가 40명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몬스터.
“쿠화아아악!”
“키하아아!”
4차 웨이브부터 등장한 3성급 몬스터.
이어 5차에 이르러서는 대형급 몬스터까지 등장했다.
이제 막 20층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상황.
쁘띠공듀와 다른 멤버들과 달리 박웅식의 무리는 무난하게 탑을 올랐고, 3성급 몬스터를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15층 히든 퀘스트와 17층 히알틴 유적을 제외한다면 10층대에서 3성급 몬스터를 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쉽게 올라간 자는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과 마찬가지.
한순간의 선택이 뼈저린 후회로 다가왔다.
물론 박웅식은 본인이 아닌 남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블아이 개자식아! 일부러 이쪽으로 유도한 거지!”
사실 반쯤은 그의 생각이 옳았다.
조현수는 일부러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으니까.
박웅식과 그 무리가 다시는 방해할 수 없도록, 따라오려 해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이미 몬스터에 포위된 상황.
하지만 애초에 따라온 건 그들이었다.
“선생님, 또 몰려옵니다!”
“젠장! 저거 막을 수 있는 거야?”
“지, 지원! 아무나 지원 좀,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가는 사람들.
바닥나기 시작한 마력을 끌어모아 공격을 해 대도 3성급 몬스터를 뒤로 물리는 것이 전부였고, 어떻게 한 마리를 잡더라도 다른 몬스터가 자리를 채웠다.
“조금만 버팁시다! 5차 웨이브도 결국 끝날 거예요! 물러서면 안 됩니다!”
박웅식이 악을 썼다.
정작 본인은 선두에 서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애초에 박웅식은 그런 사람이었다.
몬스터와 직접 싸우는 것이 무서웠고 그래서 무리를 만들어 몸을 숨겼다.
자신은 죽기 싫었으니까, 남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더라도 살고 싶었다.
원초적인 생존 본능이자 윤리를 저버린 비겁함이었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괴, 괴물 새끼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자신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토록 좌절에 빠졌는데 저들은 뭐란 말인가!
-콰아아아앙!
-콰앙! 쿠콰가가강!
이블아이는 폭발을 일으키며 몬스터를 휩쓸어 댔다.
두려움의 대상인 3성급 몬스터마저도 그의 공세에 몸이 터져 나갔다.
-찌유우우웅!
-카가가각!
좌측에 있는 김소담? 그녀 역시 수십 개의 메카닉을 이용해 사냥을 하고 있었다.
로봇이 레이져를 뿜을 때마다, 칼날이 회전할 때마다 몬스터의 신체 일부가 뚫리고 잘려 나갔다.
말도 안 되는 무위.
-쿠구구구궁
그뿐일까. 홀로 대형 몬스터의 목을 따 낸 이상옥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잡기도 버거웠다.
좁힐 수 없는 힘의 격차.
믿기지 않는 현실에 박웅식이 비명을 질렀다.
“이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된다고!”
“정신 차려요! 그쪽이 정신 나가면 다 뒈져!”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라고! 너 때문에 다 이쪽으로 온 거 아니야!”
반발하는 사람들. 각자가 최고의 역량을 내도 모자랄 판에 멘탈이 나가는 리더라니.
최악이다. 애초에 서쪽 구역을 고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나마 코인에 여분이 있는 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개새끼야! 난 이번에 죽으면 퇴출이라고!”
“마지막 남은 코인이란 말이야!”
코인이 남지 않은 이들은 박웅식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다.
도박이었다. 층을 올라갈수록 한계를 실감했고, 이대로는 21층조차 깨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기적을 바라면서 큰 보상을 받기 위해 선택한 것이 이곳.
3성급 몬스터의 무서움을 알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결정이었다.
“이거 놔! 제기랄!”
거칠게 멱살을 잡은 이의 손을 뿌리친 박웅식이 살벌한 눈으로 무리를 바라봤다.
다들 눈이 맛이 갔다. 어쩌면 자신은 몬스터에 죽는 게 아니라 사람들한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꿀꺽. 침을 삼킨 박웅식이 랭킹 표를 살폈다.
[디펜스 이벤트 랭킹]
-1위 이블아이
-2위 1등 하는 거 보여 준다 탈모 쉐키야
.
.
.
-78위 네크로맨서 박웅식
무려 전체 78등. 상위권이다.
시체 폭발을 이용해 막타를 쳐 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거기에 한 가지 변수가 더 적용했으니.
‘사람들이 죽으면서 점수가 배분됐어.’
그를 따르던 무리가 줄면서 죽은 이들의 점수가 추가로 들어왔다.
2차 웨이브까지만 해도 200위 정도에 걸쳐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가파른 변화.
그의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어차피 집단 사냥은 글렀다. 신뢰를 잃었고, 흥분한 무리는 더 이상 아군이 아니라 언제 뒤를 찌를지 모르는 폭탄이야. 어이없이 뒤통수를 맞아 죽을 바에야… 차라리 사지로 몰아넣고 점수를 올리는 편이 낫다!’
그럼 그도 죽지 않는가? 의구심이 들 법도 했지만.
[시체놀이 (E)-권능]
-죽은 척합니다. 시스템적으로 사망자로 분리됩니다.
-몬스터의 공격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권능, 시체놀이라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
눈이 빠르게 돌아간다.
-까드드드득!
-카아아앙!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김소담의 모습이 보인다.
완전히 집중했는지 이쪽은 보지도 않는 상황.
박웅식은 생각했다. 무리에 이어 김소담까지 죽게 만들면?
‘30위권 안에 들지도 모른다!’
어차피 웨이브는 괴물 같은 이블아이가 막아 낼 거다.
본인은 권능을 이용해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버티면 그만.
“여러분, 저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진 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겁니까? 어떻게든 살아서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계산을 마친 박웅식이 목청을 높이며 랭킹창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 대형 길드원 못지않게 랭킹이 높지 않습니까? 이대로 포기할 거냐는 말입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우리도 잘 알아! 아는데 살 수가 있냐고!”
박웅식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 방법이 있습니다.”
한순간에 잦아드는 웅성거림.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고.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니 강자 옆에 붙어 살아남아야 합니다. 왼쪽을 보십시오! 그나마 3성급 몬스터가 적습니다. 그곳을 뚫고! 김소담에게 붙는 것입니다. 이블아이를 쫓을 수 없다면 차선책을 고르면 되는 거예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던진 이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상황.
“그래. 그거밖에 방법이 없어.”
“여기 계속 있어 봤자 개죽음일 뿐이라고.”
“가자. 가자고!”
“으아아아아!”
공포는 광기가 되어 사람들을 밀어붙였다.
* * *
난 검을 휘두르고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미리 파두었던 구덩이에 몬스터가 들어가면 그대로 폭사시켰고, 기습을 하는 놈은 검으로 베어 넘겼다.
“후우. 많기는 많네.”
수십 마리를 사냥한 거 같은데 여전히 그 수가 많다.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잡았다. 혼자 사냥했다면 더 오래 걸렸겠지만.
“잘 싸운단 말이지.”
김소담과 이상옥의 활약으로 예상외로 더 빠르게 사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잡은 몬스터만큼 점수를 덜 얻게 되긴 했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 둘 덕분에 건물들도 지킬 수 있었고.
장애물로 쓸 건물이 적다는 건 지켜야 할 게 적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보다.
“어째 안 보인다?”
아까까지만 해도 김소담의 메카닉이나 이상옥의 모습이 종종 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질 않는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던 박웅식의 목소리도 들리질 않고.
설마 죽었나? 그래도 적당히 살아남을 수는 있게 위험한 놈들은 붙잡고 있었는데.
3성급 몬스터 수십 마리가 몰려가면 전멸할 게 뻔했으니까.
일대를 학살하고 생겨난 잠깐의 여유.
다른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돌렸고.
“저 새끼 뭐 하는 거야?”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박웅식 미친 녀석이 무리를 이끌고 필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목적지는 김소담이 있는 곳.
-쿠르르르릉!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니 몬스터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고, 그들을 따라 거대한 몬스터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김소담이 메카닉을 불러 모았지만 역부족.
이상옥까지 김소담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속도를 조금 늦출 뿐 몬스터의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 갑자기 조용해졌나 했더니만 저런 짓을!
“그냥 다 죽겠다는 거 아니야!”
균형이 깨졌다.
내가 최선두에서 몬스터 무리를 조각내면 좌우로 갈린 놈들을 김소담과 이상옥이 해치우는 형식으로 디펜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몬스터가 쏠린다면 그때부터는 난전이다.
저 멀리 박웅식 무리가 보인다. 악착같이 김소담을 쫓는 놈들.
이동 중에는 방어가 어려운 게 당연. 박웅식의 무리가 하나둘 줄어 가고 있다.
정작 본인은 중앙에서 안전하게 가고 있고.
저 새낀 진짜 안 되겠다.
-콰아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리며 허공을 날았다.
빠르게 김소담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쿠웅!
“키헤에에엑!”
착지와 함께 몬스터를 깔아뭉개고 그대로 손을 내뻗었다.
[프로즌 브레이크 (A) Lv.7]
[파이어 밤 (A) Lv.4]
급속 냉동 및 압축. 균열과 함께 폭발.
깔끔한 스킬 연계에 열댓 마리의 몬스터가 그대로 사망했다.
“이블아이 씨!”
급격하게 불어난 몬스터에 치이고 있던 김소담이 나를 불렀다.
3성급 몬스터 세 마리에 공격당하는 중.
난 즉시 보물 주머니에서 바리스타를 꺼냈다.
디펜스 이벤트를 준비하며 구매한 물건.
장전은 이미 되어 있었고.
-콰앙!
그대로 발사. 도끼를 휘두르던 오크 부족장의 옆구리에 바리스타가 박혔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메카닉을 이용해 목을 따 버리는 김소담.
나 역시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다른 한 놈의 눈을 꿰뚫었다.
남은 한 놈?
[절삭 (C) Lv.10]
검으로 몸통을 반으로 갈라 냈다.
웨이브를 거치며 스킬 레벨이 많이 올랐다.
이제 3성급 몬스터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후욱. 후. 고마워요. 까딱했다가는 죽을 뻔했는데.”
“감사 인사할 때가 아닙니다. 상황이 안 좋아요.”
“이게 다 저 자식 때문에!”
울컥 화가 났는지 눈썹을 세운 김소담이 박웅식을 노려봤다.
“자리를 피하죠.”
“하지만 저기, 상옥 씨가.”
홀로 몬스터 무리를 저지하고 있는 이상옥.
그의 활약은 돋보였으나 암살에 특화된 이상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이야 버티고 있지만 저대로 놔두면 죽을 것이 분명하다.
박웅식에게 휘둘려 사지로 달려든 사람들?
당연히 전멸이고.
짜증 난다. 안될 것 같으면 뒤에서 구경이나 하지 왜 이 사달을.
‘어지간하면 아끼려고 했는데.’
난 보물 주머니에서 성물을 꺼냈다.
19층 필드 보스와 싸우면서 쓴 성물이 4개.
아직 두 개가 남아 있었고 그중 하나는.
[수호자의 의지 (AA)]
-신성한 보호막을 만듭니다.
-시전자의 신성력에 따라 지속 시간이 달라집니다.
-현재 가능한 유지 시간: 1시간 20분.
오로지 방어만을 위해 만들어진 성물이다.
1시간 20분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잡아요.”
“예? 으악!”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를 안고 질주했다.
중간중간 막아서는 몬스터들을 단칼에 베어 내고, 이어서 탈진하기 직전까지 몰린 이상옥을 붙잡았다.
“어엇?”
뒷덜미를 잡힌 그가 당황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나와 김소담을 확인하고는 검을 거두었고.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는 몬스터는 저 혼자 처리합니다.”
“그게 무슨, 혼자서는 무리예요!”
“네가 강한 건 알겠지만 아직 200마리는 넘게 남아 있다. 조금만 휴식을 취하면!”
“아뇨. 그 상태로 뭘 어떻게 합니까.”
내 말대로 둘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기동성을 위해 방어구가 얇았던 이상옥은 모든 장비가 파괴되어 있었고, 곳곳에 자상과 타박상을 입어 정상적인 피부색을 찾기가 어려웠다.
김소담? 주력인 메카닉이 괴멸 직전이다. 사실상 전투에 큰 도움이 못 된다.
급작스럽게 몰린 몬스터에 당해 허리 쪽을 크게 다치기도 했고. 당장 움직이는 것도 힘들 게 분명했다.
“이, 이블아이다!”
“사, 산 건가? 산 거냐고!”
“죄송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김소담과 이상옥을 허리에 끼고 박웅식의 무리한테 돌진하니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사람들이 살려 달라 아우성친다.
하나같이 만신창이. 몇몇은 아예 팔 한쪽이 날아갔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 사람도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연민보다 괘씸한 마음이 먼저 든다.
하지만…….
‘이 사람들보다는 저쪽이 더 짜증 나서 말이지.’
박웅식. 저놈은 이 상황에도 선동을 해 댔다.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 않았습니까! 우린 살았다고요! 설마 우리를 죽게 놔두겠습니까!”
징그러운 새끼.
-쿠구구궁
그들의 앞에 도달한 내가 김소담과 이상옥을 내려놓았다.
집중되는 시선.
난 성큼 다가가 박웅식의 멱살을 잡았다.
“맞아. 살려 줄 거야.”
[수호의 의지 (AA)가 발동됩니다.]
-보호 대상자는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너만 빼고.
-콰아아앙!
“케헥!”
박웅식의 멱살을 잡은 채로 파이어 밤을 터트려 날아올랐다.
성물의 보호를 받는 이들이 뭐라 뭐라 소리치는 게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허공을 날며 가장 몬스터가 많은 자리를 찾았고.
-쿠웅
“알아서 살아 봐, 쓰레기 자식아.”
몬스터의 틈바구니에 착지하며 박웅식을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