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준비하는 또 한 사람
난 커뮤니티를 껐다.
간만에 좀 쉬려 했더니만 쉬지도 못하겠네.
10층에 투기장 이벤트가 있다면 20층에는 디펜스 이벤트가 있다.
“말이 많은 이벤트지.”
말 그대로 디펜스.
안전지대로 몬스터가 밀려온다.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기도 하다.
안전지대가 왜 안전지대인데.
몬스터 없고, 다쳐도 시간만 지나면 나으니까 안전지대다.
그런 고정 관념을 깨부수는 게 이번 이벤트.
“사실상 물갈이에 가깝지.”
“궤에에.”
디펜스 이벤트는 꽤 많은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벤트 참가자들은 지정 구역을 지킨다. 안전지대의 규모가 큰 만큼 참가하는 사람도 많고, 자연스럽게 단체로 움직이게 되는데.
“탑에서 처음으로 하는 협력전.”
그동안 홀로 몬스터와 싸워 왔던 이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다.
밖에서도 대부분의 던전은 헌터 단독으로 공략되지 않는다.
팀을 이루고, 길드가 움직여 깨부수는 거지.
개인의 기량만큼 중요한 게 집단적인 전략과 수행 능력, 협동성이다.
10층 투기장 이벤트가 싹수 있는 헌터들의 데뷔장이었다면, 이곳은 실질적으로 함께할 동료와 데리고 갈 인재를 찾는 장이었다.
게다가.
“퀘스트를 생성하는 역할도 하고 말이야.”
몰려오는 상대로 디펜스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을에 피해가 생긴다.
수백, 수천 마리가 몰려드는데 완전히 막는 건 힘든 일이니까.
안전지대에 있는 상가와 편의시설들이 파괴된 결과, 대규모 복원사 업이 펼쳐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퀘스트가 발생하게 된다.
상가 건물 복구 퀘스트, 건축 자재 보충 퀘스트 등등.
파괴와 회복.
그를 통한 끊임없는 순환을 반복하는 곳이 20층 안전지대다.
여러 가지 목적이 섞여 있는 대형 이벤트인 만큼 성과에 따른 보상도 확실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10층, 투기장 이벤트처럼 공개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치 있는 것들을 얻는다고 하던가.
예전, 밖에 있을 때 주워들었던 이야기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뭐든 좋다.
“어차피 1등은 내 거니까.”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된다는 말은 곧 비교를 한다는 것.
랭킹 시스템이 적용되어 순위별로 점수가 매겨진다.
여러모로 복잡하면서도 강렬한 이벤트.
난 시스템 메시지 로그를 켰고.
[디펜스 이벤트까지 남은 시간- 37:24:12]
[이벤트 참가 희망자는 NPC와 접촉해서 디펜스 지역을 정하십시오.]
이벤트 관련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Tip. 디펜스 이벤트는 한 번만 참여 가능합니다.]
[Tip. 디펜스 이벤트 중에는 NPC와 비참가자의 활동 영역이 제한됩니다.]
[Tip. 디펜스 이벤트는 한번 정한 구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레면 이벤트가 시작한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듣기로는 짧으면 2주, 늦으면 4주마다 한 번씩 발생한다고 들었는데.
타이밍이 꼬이면 이곳에서 발목 잡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필요 없으면 참가하지 않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 큰 이벤트라서.
특히나 자금이 부족한 이들은 20층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니, 몇 주 정도 이곳에 있는 건 흠이 안 된다.
나도 움직여야겠다.
“가자, 덕춘아.”
“그에에에.”
귀찮은지 덕춘이가 갔다 오라며 손을 까딱거렸지만 어림도 없지.
주인이 가는데 펫이 뒹굴 수 있겠느냐.
냉큼 갑옷 속에 덕춘이를 넣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속에서 덕춘이가 가슴을 꼬집었지만 무시했다.
약 30분.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가장 많은 디펜스 이벤트를 겪은 이는 누구인가.
위로 올라간 헌터들? 아니면 20층을 관리하는 대형 길드?
아니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NPC들이다.
그리고 나와 인연이 있는 20층의 NPC라고 하면.
“어?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저기, 릴카가 외상으로 음식을 먹었던 분식점의 주인 벨라뿐이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예. 한번 오라고 하셔서 바로 왔습니다. 밥을 안 먹어서요.”
의자에 걸터앉으며 주변을 살폈다.
삭막하다. 다른 구역에 비해 벨라의 분식점이 있는 곳은 건물 수도 적었고, 장사를 하는 NPC도 많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더 없고… 일부러 피해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밥은 잘 챙겨 먹어야죠. 안 그래도 힘든 곳이 탑인데.”
“그렇긴 하죠.”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벽면에 붙은 메뉴를 쭉 살폈다.
역시 분식점에는 그거지.
“떡튀순 세트 3개만 포장해 주시겠어요?”
“3개나요?”
“입이 하나 더 있어서요.”
덕춘이 있는 만큼 밥은 여관에 들어가서 먹을 생각.
혹시라도 밖에 뒀다가 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뭐, 보아하니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
“좋죠. 선불인가요?”
“에이, 어떻게 돈을 받아요. 외상값도 받게 해 줬는데. 밥이라도 먹이고 싶어서 오라 했던 거예요.”
“그럼 감사하죠.”
아싸, 돈 굳었다.
안 그래도 디펜스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돈 나갈 일이 많을 거 같은데.
소소하게라도 아낄 수 있으면 땡큐다.
-달그락, 치이이익
아예 새로 만들려는지 재료를 꺼내 손질하는 벨라를 바라봤다.
준비되는 동안 물어보면 되겠지.
“디펜스 이벤트가 코앞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잘 안 돌아다니네요.”
“후우, 그쵸. 안 그래도 장사가 안 되는데 이벤트 기간에는 더 심해요.”
깊게 한숨을 쉬는 벨라.
쌓인 게 많았던 걸까.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제가 있는 서쪽 구역은 인기가 없거든요.”
“선호하는 곳이 따로 있나 보네요.”
“아무래도 건물이 많은 곳을 좋아하죠. 그 자체로 바리케이드가 되니까요. 이쪽은 보다시피 뭐가 없거든요.”
그녀의 말대로 서쪽 구역은 공터나 폐건물이 많다.
건물도 띄엄띄엄 있고. 장애물로 쓸 만한 게 아예 없다고 해야 하나.
“물론 건물도 지켜 내면 추가 점수를 받기는 하지만 누가 그런 걸 신경 쓸까요. 죽는 것보다 건물을 방패로 쓰는 편이 낫지. 이벤트에서 죽으면 보상을 못 받거든요.”
“엄청 힘드네요. 기껏 열심히 점수 올렸다가 다 잃으면 엄청 허무할 것 같은데.”
“다른 살아남은 사람들은 좋아할걸요? 죽은 사람 점수는 해당 구역 사람들한테 나누어지니까요. 가끔 못된 놈들은 일부러 죽게 놔두기도 하더라고요, 에휴.”
“어딜 가든 나쁜 사람들은 꼭 있네요.”
커뮤니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고급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특히 저 부분. 해당 구역에 있던 사람이 죽으면 그 점수를 나눠 가지는 것.
상황에 따라서 커다란 변수가 될 수도 있었다. 혹은 위협이 되거나.
벨라가 더 떠들 수 있도록 리액션을 하며 방금 들은 정보를 잊지 않게 잘 기억해 뒀다.
“서쪽도 그렇고 남서쪽도 그렇고, 디펜스 이벤트에 참여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매번 피해가 커요. 다시 건물 짓느라 장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장사가 안 되니 재건축 퀘스트 보상도 줄 게 없고 결국 사람들은 다른 구역으로 가고, 악순환이죠.”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릴카 이 녀석은 이런 사람한테 외상을 한 거야? 인성 제대로 터졌네, 진짜.
조만간 만나면 꿀밤 한 대 더 때려 줘야겠다.
그거야 나중에 하고.
‘이거 어쩌면 디펜스 인원이 극적으로 나뉘겠는데.’
이벤트에 참가한 사람은 지정 구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
디펜스 실패는 곧 죽음.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난이도가 올라가는 특성상 서쪽 구역은 참가자 자체가 드물 거다.
‘반대로 그곳에서 실적을 쓸어 담을 수도 있고 말이지.’
결정했다.
사람이 최대한 적은 곳으로 가자.
그곳에서 몬스터를 몰살하면 그만큼 보상이 많아지겠지.
이미 17층 유적에서 가디언을 상대로 신나게 싸워 봤다.
물량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뭐, 처량하게 떡볶이를 볶는 벨라가 안쓰럽기도 하고.
“디펜스 이벤트는 참가하고 싶은 구역의 NPC한테 부탁하면 된다던데, 맞나요?”
“맞아요. 아직 안 정했어요? 사람 몰리면 NPC들도 귀찮다고 안 줄 수도 있어요. 빨리 가 봐요.”
본인한테 참가 신청을 넣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한 모습.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도 안 간다.
난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걱정은 없겠네요. 저는 이쪽을 지키려고 하니까요. 참가 신청 좀 해 주시겠습니까?”
-딸그랑
예상외의 답변에 벨라가 국자를 떨군다.
놀람, 환희, 걱정.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표정이 바뀐다.
“지, 진짜요?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손해만 보는 거고. 솔직히 디펜스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한.”
“그건 걱정 마요.”
어차피 내 코인은 무한이니까.
그렇다고 이 사실을 말하기는 좀 그렇고.
“릴카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꽤 강합니다. 다른 이유 없어요.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다 잡으려는 거지.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벨라를 가리켰다.
이게 참, 내 잘못은 아닌데.
“그, 릴카 때문에 고생한 것도 있잖아요. 어쨌든 간에 걔랑 인연이 있기도 하고, 양심상 그냥 두고 보기 뭐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나도 내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만 벨라는 감동한 거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아니.
[NPC 벨라의 호감도가 올라갑니다!]
눈앞으로 메시지가 떴거든.
덥석. 벨라가 내 손을 붙잡았다.
-우득
“당신은 착한 사람이군요! 좋아요. 힘낼 수 있도록 저도 도울게요.”
“어, 예. 근데 손 좀.”
부러질 것 같습니다. 잊고 있으신가 본데 전 연약한 인간이라 NPC가 꽉 잡으면 으스러져요.
이미 부러진 건가, 감각이 없다.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눈치챘는지 황급히 손을 놓은 벨라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잠시 실수를. 앉아서 잘 들어요.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모두 설명해 줄 테니까요.”
아까보다 적극적인 자세.
부지런히 요리를 하며 벨라가 디펜스 이벤트의 정보를 알려 주었고, 난 조금씩 디펜스 이벤트를 완료할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 * *
조현수가 이벤트를 대비하던 때, 이 사람 역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층 안전지대 서남쪽 구역. 서쪽 구역만큼이나 버려진 곳이었다.
번화한 다른 곳에 비해 확연히 적은 상가와 시설들이 듬성듬성 모여 있었고, 그마저도 비어 버린 건물이 부지기수다.
유령 마을, 할렘가, 위험 지대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만큼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해가 떨어져 가는 시간. 하늘마저 어둡게 가라앉아 분위기는 더욱 무거웠고, 초인의 반열에 오른 헌터들 조차 지나다니지 않았다.
장사를 해야 할 NPC들도 호객 행위에는 관심 없는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포커를 치며 잡담을 나눈다.
“이제 곧인가?”
“웨이브? 조만간 하겠지.”
“이번에도 건물 무너지겠네, 하여간 썩을 것들.”
“시스템에 묶여 있지만 않았어도 단칼에 없애는 건데.”
부질없는 소리인 건 안다.
NPC는 탑에 속한 존재. 탑의 법칙을 받고 활동 구역으로 지정된 곳 너머로는 벗어날 수 없다.
몇몇 편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으니, 이벤트마다 시스템의 의지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말이야.”
카드를 살핀 NPC 한 명이 공터로 시선을 던졌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다 쓰러져 가는 폐건물.
사람들이 갖다 버린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가득한 공간에 한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호리호리하지만 큰 키.
다른 사람들은 눈길도 안 줄 물건들을 부지런하게 옮기고 있었다.
땅을 파고 흙을 퍼 올려 언덕을 만들고, 날카롭게 부러진 쇳조각과 나뭇가지를 꽂아 바리케이드를 만든다.
곳곳에 설치된 트랩과 몰려드는 몬스터를 관측할 수 있는 타워까지 생겨난 상태.
NPC의 눈에는 조잡해 보였지만 만든 당사자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물건들을 배치한다.
나름 나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보완해야 할 곳이 보였고.
“어이! 고생하는데 미안하지만 그렇게 쌓으면 덩치 큰 애들이 밀면 다 쓰러져!”
“저짝은 토대가 약하거든? 땅이 무르니까 바리케이드 치지 말고 차라리 땅을 파서 함정을 만들라고.”
“손이 보인다. 라떼는 말이야!”
포커를 하다 말고 저마다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아! 조언할 거면 하기 전에 하라고요! 노닥거릴 거면 지나가는 사람 좀 붙잡아 주고! 잡아다가 여기다 쓰레기 버리라 하게.”
한참 일하던 이가 빼액 소리 지르면서도 다시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에잉. 저, 저 성격하고는.”
“그니까 말이야. 도와줘도 지럴이여.”
“너무 그러지 말게나. 그래도 이곳 지켜보겠다고 애쓰는 애한테.”
“애쓰는 건 좋은데 자꾸 지나가는 사람들 잡아다가 잡동사니 버릴 거면 이곳에 버리라고 협박하잖아. 그거 때문에 손님이 더 줄었어.”
“듣자 하니 혼자 웨이브를 막아서 1등 하는 게 목표라던데?”
“이제 막 20층에 올라온 애송이가 가능한가?”
“쟤라면 가능하겠지.”
“난 못할 거 같은데. 내기나 할까?”
어느새 관심사는 포커에서 디펜스 이벤트로 넘어갔고.
“이, 씨! 이곳 땅 무르다면서. 겁나 안 파지네! 디그 배워 둘걸.”
핥짝이는 열심히 땅을 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