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20층 안전지대
조현수가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을 얻고 20층으로 올라가고 5분 후.
공동에 홀로 서 서리 불꽃 검을 만지작거리던 필드 보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떤가. 어차피 나뿐이야.”
그의 말에 기둥 너머에 숨어 있던 인물이 걸어 나왔다.
“아함. 졸려 죽는 줄 알았네. 그냥 쉽게 끝내고 보내지 않고. 계속 기다렸잖아.”
아담한 키.
올라간 귀와 풍성한 꼬리털.
릴카였다.
“오랜만에 흥이 돋아서 말이지. 훌륭한 인재의 역량을 보고 싶었달까.”
“그런 거치고 너무 격하게 시험하던데? 보통은 죽었어.”
릴카가 눈꼬리를 올렸다.
사실 조현수가 아니었다면 절대 통과할 수 없는 난이도였다.
그녀의 핀잔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뚫렸지만 말이지. 마지막 일격은 상상 이상이더군.”
“그야 그딴 고철을 쓰니까 그렇지.”
보스가 쓰던 방패를 말하는 거였다.
아무런 옵션도 붙지 않은 쇠 방패.
대장장이기도 한 릴카가 보기에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이었다.
동시에 한 층의 지배자가 쓰기에 턱없이 하찮은 장비기도 했다.
“이제 쓰고 싶어도 못 써. 다 갈렸거든.”
그가 바닥을 가리킨다. 조각나 널브러진 방패.
수리가 아니라 녹여서 새로 만들어야 할 수준이다.
“그거 잘됐네. 얼음과 불의 신전의 기둥 중 하나가 그런 걸 쓰면 쓰나.”
-쿵
릴카가 허공에서 물건을 소환했다.
떨어져 내리는 붉은 방패.
조현수가 15층 히든 퀘스트를 진행하던 날 봤던 환영. 그 안에 나온 그 물건이었다.
휴고 아르테.
19층의 지배자이자 얼음과 불의 교단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한 명.
꺼지지 않는 업화 속에서 긴 시간 자책하는 자의 이름이었다.
휴고 아르테가 방패를 잡았다.
낯익은 감촉.
상실한 이후, 오랫동안 보지 못한 인생의 파트너였다.
마그나로크의 인정을 받고 선택한 성물이기도 했고.
-파아아앗!
주인을 알아본 걸까.
방패에서 빛이 터지더니 강력한 신성력을 뿜어 댔다.
[자격을 지닌 자를 만났습니다.]
[성물이 각성합니다.]
[불의 수호자 (SS)]
-불의 인장을 가진 자만이 다룰 수 있습니다.
-불의 기둥, 히알틴 신성왕국의 방패, 업화의 지배자. 휴고 아르테의 방패.
“시간이 좀 걸렸지? 아무도 퀘스트를 안 받으려고 해서 말이야. 받은 놈 중에서도 화갑룡의 비늘을 가져오는 애는 없더라고.”
“10층대에서 화갑룡의 비늘을 뜯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꾸국
희미하게 미소짓던 휴고 아르테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묵직하다. 동시에 신체 일부인 것처럼 익숙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릴카가 꼬리를 흔들었다.
대장장이로서 고객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제법 이름 있는 자가 흡족해하는 건 더욱.
“이걸 들었다면 마지막 일격은 충분히 막았겠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릴카의 물음에 휴고가 입꼬리를 올렸다.
조현수가 날렸던 일격.
방패가 부서진 시점에서 막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상처는 없었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기준에는 아니었다.
데미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방패를 잃었다는 건 이후에 있을 공격을 막을 수단이 사라졌다는 것.
완벽하게 흘려보내야 했다.
만약 이 방패를 들고 있었다면 막는 걸 넘어서 전진했을 수도 있었을 터.
휴고 아르테가 릴카를 응시했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친다.
“일부러 안 주고 기다렸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움찔.
릴카의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아 확실하다.
“그, 그럴 리가. 그냥 갑자기 등장하면 그러니까 숨어서 보고 있던 거지.”
“으흠, 그렇단 말이지?”
별로 나무라려는 건 아니다.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거지.
“아무튼 이걸로 계약은 끝!”
“보수는 바로 보내 주도록 하지.”
“오래 기다렸으니까 10퍼센트 깎아 줄게.”
“10년이 늦어져서 10퍼센트인가?”
“으윽…….”
주거니 받거니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잠시.
정산이 끝나고 할 말이 없어지자 정적이 감돌았다.
슬쩍 휴고의 눈치를 살피던 릴카가 입을 열었다.
“결국 얻었네. 29층으로 갈 거야?”
그녀의 시선은 휴고가 들고 있는 서리 불꽃 검에 닿아 있었다.
씁쓸하게 웃던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미움받을지도 몰라.”
“그건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 얼음과 불의 신전, 3번째 교리는 용서라네. 아하하하! 마그네타도 이해해 줄 거야!”
서리 불꽃 검.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이자, 29층의 보스 히알틴 신성 왕국의 검인 마그네타 프랫이 쓰던 성검이다.
휴고의 방패와 함께 소실된 성물 중 하나이며, 교단에서도 특별히 여기는 귀물이었다.
화합의 상징.
얼음과 불의 신전을 대표하는 성물.
그 가치와 상징은 대단했고.
서리 불꽃 검의 또 다른 이름은.
[서리 불꽃 검 (S)]
-또 다른 교단의 기둥과 연결합니다.
포탈을 여는 열쇠.
그것이었다.
교단의 기둥에게 갈 수 있는 성물.
활동 반경이 정해져 있는 NPC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었다.
“무사히 갔다 오지.”
잠시 추억에 잠겼던 휴고가 릴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머리 만지지 말라고, 깡통 자식아!”
발끈한 릴카가 그의 정강이를 찼지만 역시나 데미지는 없었다.
껄껄 웃으며 한 번 더 쓰다듬는 휴고.
코를 찡그린 릴카가 점프해 그의 머리를 때리더니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마그네타한테 두들겨 맞아라, 멍청이!”
-사아악
혓바닥을 내민 릴카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홀로 남은 휴고가 서리 불꽃 검을 들었다.
그녀와의 오랜 오해를 풀 시간이 왔다.
* * *
20층. 안전지대.
어느덧 두 번째 안전지대에 진입했다.
층마다 탈락자가 나오는 곳이 탑.
10층보다 사람 수가 확연히 줄었지만, 마을 규모 자체는 똑같은지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 정도면 딱 좋은 건가.”
갑옷 안에 덕춘이를 넣고 거리를 걸었다.
10층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출근길 지하철 같았는데.
여기는 그나마 번화가 정도다.
30층에 가면 더 줄겠지.
40층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핥짝이도 여기 어딘가 있다는 걸 텐데.”
“궤에.”
답답한지 덕춘이가 갑옷 위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다시 집어넣었다.
조금만 참아라. 여관 잡으면 거기서 놀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전지대는 편안하게 쉬다 올라가는 곳이겠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대형 길드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그나마 요즘에는 분위기가 누그러졌지만.
‘분위기가 다르네.’
난 안전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다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하고 올라와서 그런가, 한층 날카로운 기세를 풍겼다.
무장을 한 채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이제 무장하고 다니는 게 익숙해졌다 이거겠지.
10층과 비교하면 훨씬 성숙해졌다.
“좋군.”
나도 분위기에 편승해서 투구를 쓴 채 거리를 걸었다.
19층 보스한테 얻은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은 아니었다.
노랑 흉갑에 빨강 투구까지 쓰면 너무 관종 같지 않은가.
그나마 평범한 목걸이 투구를 활성화해 사용했다.
빨간 투구, 그러니까 빨간 머리통은 언제든 쓸 수 있게 인벤토리에 넣어 놨다.
보물 주머니도 나쁘지는 않지만 손으로 열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19층에서도 직접 열 여유가 없어서 덕춘이의 도움을 받았고.
20층에 진입하면서 인벤토리의 공간이 5칸으로 늘어났기에 문제는 없었다.
“분명 어디 있을 텐데.”
눈을 찌푸렸다.
아무 생각 없이 광장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릴카를 찾고 있었다.
분명 본인 입으로 20층으로 간다고 했으니 어딘가 있을 텐데.
그녀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부탁할 것도 있고.
그렇게 1시간 정도 서성였나.
“아니, 그러니까 으으. 앗! 저기 있어!”
손에 호빵을 들고 있는 릴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보며 세차게 손을 흔드는 녀석.
왜 저렇게 반기는 거지.
불안감이 싹트는 그때.
도도도도 달려온 릴카가 나를 끌고 상가로 향했다.
“얘가 계산해 줄 거야!”
“응?”
계산이요? 내가 잘못 들었나?
이 망할 수인이 드디어 미친 것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도 잠시.
“릴카, 그렇게 아무 사람이나 끌고 오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노점 상인으로 보이는 NPC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
세상에나. 10층에서는 강제 퀘스트를 뿌리고 다니더니, 20층에서는 강제로 사람을 끌고 와서 외상값을 갚게 만드는 것인가.
대단하다 릴카!
커뮤니티가 인정한 기피 대상 1호 NPC!
머리가 아픈지 분식점 주인이 이마를 문질렀다.
“아니, 돈도 많으면서 왜 자꾸 외상으로 먹는 거예요.”
“외상이 맛있거든!”
오. 당당하고 화나는 대답이다.
같은 생각인지 NPC와 눈이 마주쳤고.
[벨라-NPC]
-분식점을 하고 있다.
-릴카의 꼬리를 만지고 싶은 눈치.
쓸데없는 정보를 읽었다.
슬쩍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자 여기저기로 살랑이는 꼬리를 따라 눈동자가 굴러가는 게 느껴진다.
“됐고 외상값 갚아요. 싫으면, 크흠. 꼬리 한 번 만지는 거로 해도 좋은데.”
“싫어!”
빼액 소리를 지른 릴카가 내 옆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내 품을 뒤졌다.
뭐지 이 새끼?
“에헤헤. 외상은 외상이고 덕춘이 데려왔지? 안전지대 올라올 때마다 만지게 해 주기로 했잖아.”
그러고 보니 약속했었다.
이런 건 잘 기억하는구나.
본인이 만져지는 건 싫지만 다른 이를 만지는 건 좋아한다라.
어처구니가 없어 머리가 띵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갑옷 속에서 덕춘이를 빼낸 릴카가 환하게 웃었다.
“일루 와, 덕춘아! 언니가 예뻐해 줄…….”
-찰싹
“궤에에에에!”
어림도 없다며 손등을 쳐 내는 덕춘이.
그보다 잠깐.
“…언니?”
너 이 녀석, 설마 암컷이었냐?
흠칫하며 덕춘이에게 고개를 돌리자, 여태까지 몰랐냐는 표정으로 띠껍게 바라본다.
내가 무슨 수로 개구리 성별을 알아차려.
오늘 여러 번 당황하네.
“오, 저기 릴카다.”
“이번에는 저 사람인가?”
“10층에서도 저러더니만 20층에도 피해자가 속출하네.”
“탑은 뭐 하나 몰라. 저런 애 안 잡아가, 여기가 탑이네. 시발.”
약간의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모여든다.
재빠르게 덕춘이를 갑옷 속에 넣고 릴카에게 속삭였다.
“덕춘이 만지고 싶으면 외상부터 갚아, 사고 치지 말고.”
“어, 어째서! 만지게 해 준다고 했잖아!”
“언제 어떻게 만지게 해 준다고는 말 안 했다. 꼬우면 말고. 나중에 포탈 올라갈 때나 만지게 해 줘야지.”
“으윽.”
부들거리던 릴카가 코를 찡그리더니 NPC 벨라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묵직하다. 도대체 얼마를 외상으로 한 거야.
“외상값 8,700포인트 잘 받았습니다.”
비록 꼬리는 만지지는 못했지만 외상값을 받아 기분이 좋은 벨라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양심도 없는 녀석. 8,700포인트를 외상으로 쓰다니.
그걸 참아 준 벨라도 대단하지만.
“저걸 나보고 갚으라 했다고? 에라이.”
“악!”
그걸 다짜고짜 갚아 달라 한 이 녀석이 더 대박이다.
덕춘이에게 홀려 있어서 그런지 딱밤을 때릴 수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는 녀석.
거, 쌤통이네.
뭐, 대충 일은 끝났고.
사람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빠져나가야겠다.
“좀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
“이, 씨.”
날 노려보면서도 순순히 따라오는 릴카.
“오늘 고마웠어요. 시간 날 때 한번 와요. 좋은 거 드릴게요.”
멀어지는 내게 다시 오라며 손을 흔드는 벨라를 뒤로한 채 우리는 골목으로 향했다.
10층 안전지대보다 사람 수가 적어서 그런지 한적한 곳은 많았다.
“무슨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와? 전에 처음 만날 때도 골목으로 오더니. 골목길 페티쉬라도 있어?”
“…보통 은밀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나.”
됐다. 저 나사 빠진 수인의 페이스에 넘어갈 생각은 없다.
바로 본론으로 가자.
“너, 상인이라고 했으면 물건도 사냐?”
“쓸 만한 거라면? 이번에 재밌는 것 좀 얻었네? 나한테는 필요가 없지만.”
잠시 고민하던 릴카가 목을 가리킨다.
“네가 가진 달칸의 털목도리는 살 생각 있어. 좋아하는 애들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그건 팔 생각이 없다.
2성급 이하의 몬스터에 두려움 효과.
그거 덕분에 필드에서도 마음 놓고 자니까.
“덕춘이도 살 생각 있어!”
“안 판다니까.”
“궤에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보물 주머니를 열었다.
손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촉감.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투자해야겠지.
난 그녀에게 물건을 내밀며 물었다.
“너, 펠라인 세트에 대해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