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거래합시다
섬광포? 아니면 레이저 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격이 쏟아졌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거 그냥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
안개 질주로 피할까?
‘안 돼. 범위가 너무 넓어.’
완전히 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1초도 안 되는 안개화 지속 시간이 끝나면 공격에 휩쓸려 그대로 가루가 되겠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막아 내는 수밖에!
-콰드드드득!
온 힘을 집중해 검을 틀어 올렸다.
제발 조금이라도 비켜 내기를.
엄청난 충격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출력을 조절해 준 걸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강한데.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끝이다.
최대한 팔을 몸에 붙여 버텼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린다.
손가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입고 있던 배틀 슈트는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피부가 달아오른다.
물집이 잡힐 새도 없이 터져 진물이 흐르고, 진물마저 증발해 살덩이가 뜯긴다.
말도 못 할 통증.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난 느꼈다.
‘살 수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공격이 끝난다.
부르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꺾일 거 같은 손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서서히 섬광의 끝이 보인다.
이제 곧.
-빠드드득!
“제기랄!”
가장 앞선에서 충격을 버티던 검에 균열이 갔다.
C급 무기로 받아친다는 거 자체가 망상이었나.
이대로면 10초도 못 버틴다.
맨몸으로 버티는 건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고.
다른 대체재가 필요하다.
가능하면 신성력이 담긴 공격을 견딜 수 있는 게 좋을 텐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다!”
서리 불꽃 검.
신성력을 머금고 있는 성물.
사실상 성검이라고 불러도 문제없는 S급 무구.
다만 지금은 보물 주머니에 손을 뻗을 여유가 없다.
“궤엑!”
내 마음을 읽은 덕춘이가 등을 타고 내려갔다.
빨판의 위대함인가.
빠르지는 않지만 꿋꿋하게 발을 내디딘다.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성물을 꺼내는 건 덕춘이에게 맡기자.
부디 그 전에 검이 부러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근성이 좋구나! 역시 그 정도는 해 줘야 내 마음이 열리지!”
그럼 마음의 문 좀 닫아만 둬라. 두 번 열렸다가는 뒤지겠네.
속으로 욕을 삼키며 집중했다.
균열이 점차 번지고 있다.
막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여서인지 칼날은 모조리 날아간 상태.
-끼긱, 끼이이
불안한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충격에 몸은 자꾸만 뒤로 밀린다.
그렇게 대치를 이루는 듯하던 것도 잠시.
-콰직!
기어이 검이 부러졌고.
“궤에엑!”
“나이스, 덕춘이!”
보물 주머니를 여는 데 성공한 덕춘이가 서리 불꽃 검을 내게 넘겼다.
들고 있던 것을 버리는 동시에 서리 불꽃 검을 쥐었다.
성물 약탈자의 칭호가 발휘되며 봉인에서 깨어난 검이 거세게 울렸고.
-콰아아앙!
막기에도 버거웠던 공세를 한 번에 날려 버렸다.
쏟아지는 신성력.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는 빛의 파편.
-꾸득
난 검을 잡아당겼다.
아직 이곳은 밤이다.
버프는 유효했으며,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으니.
“한 방 먹여 줘야지.”
차오른 신성력.
검에 담긴 불의 기운과 얼음의 기운이 공명했으며, 들어 올렸던 검을 내리그었을 때는.
-사아아아악!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가 방출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S급 무구다.
헌터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스펙.
옵션으로 붙은 스펙만 100단위이고, 성물답게 특수 효과도 덕지덕지 붙어 있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그대로 소멸시킬 힘.
그것이 19층의 보스에게 쏟아졌고.
“그, 그건!”
입을 벌리며 경악성을 내뱉은 보스가 밀려오는 에너지에 휩싸였다.
-끄그그그극!
곁에 있던 홀리 크랩마저 외갑이 박살 나 역소환되었고, 신성력의 영향으로 옵텍터 역시 모두 증발했다.
되갚기를 썼을 때와는 또 다른 파괴의 현장.
빛으로 감싸인 공동이 요란한 소리를 냈으며, 최대치까지 신성력을 쏟아 낸 몸에서는 뼈가 비틀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푸확!
단 일격.
그 한 번으로 손이 터져 나갔다.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깨가 빠질 거 같다.
그만큼 대단한 공격이었다.
만약 내가 좀 더 단련되어 있었다면.
충분한 신성력과 언제든지 검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속으로 등반하는 것도 허언은 아닐 거다.
‘빠르면 50층대 중후반. 보통 60층대에 들어서야 S급 장비를 구경이라도 한다는데.’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서리 불꽃 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겠지.
이걸로 서리 불꽃 검을 다시는 쓸 수 없게 되었다.
마그나로크의 인정을 받아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궤에에.”
덕춘이를 죽였던 놈인데 절대 굽히고 들어갈 수 없지.
가자. 10층대는 이제 지겹다.
20층이 날 기다린다.
난 몸을 돌려 도착지점으로 향했다.
아무리 19층의 보스라도 이만한 공격을 받았으면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도착 지점에 입장했습니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포탈이 생성됩니다.]
-우우우웅
한바탕 신나게 싸우고 나서 그런지 포탈이 반갑기 그지없다.
오케이. 이걸로 공략은 끝.
보스한테 보상을 받아 보실까.
분명 인정을 받으면 좋은 걸 준다고 했었는데.
설마 한 대 얻어맞았다고 안 주는 건 아니겠지?
부디 그런 좀생이가 아니기를 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와우.”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반파된 공간, 그는 우뚝 서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방패는 조각나 사라졌다.
그 외에는 똑같다.
상처 하나 없다.
갑옷이 좀 그슬리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만 빼면 멀쩡하다.
다만 표정은 멍했는데.
-흠칫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나를 응시했다.
마주친 시선에 표현 못 할 감정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올라오는 압박감.
살의는 없었지만 모든 것을 압도하는 뭔가가 숨통을 조여 왔다.
‘진짜 맞았다고 화난 건가? 지금이라도 포탈에 들어가?’
몸이 굳는다는 게 이런 말이었나.
침조차 함부로 삼킬 수 없었다.
-쿵, 쿵, 쿵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검을 등 뒤에 차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일 뿐이건만 하나의 산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코앞까지 다가온 보스.
나보다 한참 큰 사람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니 식은땀이 다 난다.
이거, 아까는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정색하니까 인상이 엄청 험상궂다.
얼굴도 시뻘게진 것이 제대로 열받은 거 같은데.
“아하, 하. 많이 아프셨나요?”
“게, 게엑!”
철썩. 덕춘이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이게 아니었나?
좀 더 찰지고 괜찮은 멘트를 준비하려는 순간.
-턱
그가 내 양어깨를 잡았다.
안광이 번쩍인다.
입술이 살짝 떨리나 싶더니.
“그 검은 어디서 났나! 완성된 서리 불꽃 검이라니! 대체 어디서 아니, 무슨 수로!”
날 잡고 흔드는데 머리가 다 아프다.
힘 진짜 세네.
아까 공격 맞은 건 데미지도 없었나?
양심이 없다. 그래도 S급 장비인데.
내가 스텟이 허접해서 딜이 안 박힌 건가.
“으게에에에.”
덩달아 같이 흔들리는 덕춘이가 울음을 토해 냈다.
“머리 아픕니다. 좀 놔줘요!”
“서리 불꽃 검은 이미 파괴되었을 텐데! 어디서 구한 것이냐!”
“아니. 알겠으니까 흔들지 말라니까!”
“내게 주게. 내게 달란 말이야!”
안 되겠다. 말이 안 통한다.
일단 좀 진정시켜야겠다.
후우. 심호흡 한 번 하고.
“아! 진정 좀 하라고!”
-빠아악!
힘차게 턱을 갈겨 줬다.
어우. 사람 맞나. 왜 내 주먹이 아픈 거지?
가뜩이나 손바닥 다 터져서 아프구먼, 손가락까지 작살난 거 같다.
생김새만큼이나 단단한 양반이다.
데미지 하나 안 받아 보이는 게 얄밉기는 해도 정신은 차린 모양.
“아이고. 크흠. 내가 잠시 흥분했군. 미안하이.”
“됐고 일단 보상부터 주시죠.”
난 손을 내밀었다.
그가 강한 건 안다.
하지만 서리 불꽃 검은 나한테 있지.
힘으로 뺏으려 할지도 몰라 슬쩍 혈괴의 저주 단검도 꺼냈다.
허튼짓하면 바로 안전지대로 도망쳐야지.
“오. 특이한 저주가 걸려 있는 검이군. 옵션이 이상하게 달린 거 같지만.”
단검의 효과를 눈치챘는지 그가 어깨를 으쓱인다.
“일단 보상부터 주겠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줄 생각이 없었는데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검에 관심이 있어 특별히 더 좋은 거로 주지.”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불의 기운이 응측된다.
설마 이대로 날 날려 버리는 건 아니겠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 저절로 경계심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불의 기운이 점점 구색을 갖추더니 하나의 문양이 되었다.
“받게. 도움이 될 거야.”
[자격 확인]
[불의 그릇이 형성되었습니다.]
[불의 인장이 스며듭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불의 인장이 내게 스며들었다.
따뜻하면서도 생동적인 감각이 전신을 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건?”
[불의 인장의 효과]
-불에 대한 모든 능력치 증가.
-신성력 +50
-불의 교단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효과가 하나같이 대단하다.
불 관련 능력치 증가?
이런 광범위 버프는 권능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다.
파이어 밤의 위력이 더욱 증가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신성력을 50이나 올려 준다고?
말도 안 되는 옵션이다.
칭호 두 개를 모두 합쳐서 80이 올랐는데 이건 그냥 50을 올려 주네.
성직자 관련 헌터가 봤으면 상대적 박탈감 느끼기 딱 좋다.
마지막은 좀 의외인데.
“불의 교단의 인정?”
“별거 아니네. 보니까 성물을 사용하더군. 보나 마나 17층에 있는 유적에 들어간 거겠지.”
어떻게 알았지?
역시 탑에 속한 이들끼리는 나름의 커넥션이 있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내게 너무 호의적인데.
난 마그나로크와 척졌으면 졌지 좋은 관계는 아니다.
반면에 그는 내게 호의적이고…….
“딱 보니 마그나로크의 인정은 못 받은 거 같고. 반쪽짜리지만 내가 인정해 주지. 불의 신전에 속한 성물은 쓸 수 있을 거야.”
세상에나.
불과 관련된 성물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이 있다니.
내게 있어서는 굉장한 소식이었다.
1회용품이었던 성물을 재사용할 가능성을 열어 준 거니까.
내가 훔쳐 온 성물은 총 여섯 개.
다행스럽게도 그중 하나는 불의 교단에 속한 성물이었다.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에 쓴 것들은 불의 교단의 성물이 아니라서 재사용은 못 하겠지…….
“감사합니다.”
그래도 대단한 선물을 받은 건 변하지 않는다.
19층에서 얻기에 과분할 정도.
난 고마움을 전했고.
“그럼 그 검을 내게 주겠나?”
이때다 싶었는지 그가 서리 불꽃 검을 가리켰다.
다시 봉인된 검.
성물 약탈자 칭호도 사용한지라 이제는 다시 쓸 방법도 없다.
단단하기는 하니 급할 때 예비용 검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다만.
따지고 보면 내게 더 이상 메리트가 없기는 한데.
불의 인장만으로는 활성화할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
그래도 뭔가 아깝다.
내 첫 S급 장비인데!
지금은 일반 아이템이나 다를 바 없지만 어쨌든.
“어차피 쓸데도 없지 않은가. 봉인을 풀려면 마그나로크의 인정을 받아야 해. 자네는 힘들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그냥 줄까.
불의 인장도 얻었는데.
“나도 그냥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자네에게 꼭 필요한 걸 주지.”
솔깃하다.
내게 필요 없는 걸 다른 물건이랑 바꿀 수 있다면 나야 땡큐다.
“흠흠. 한번 봐 볼까요?”
난 슬쩍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고.
피식 웃은 그가 허공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강렬한 붉은색 투구.
얼핏 보기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다.
-톡톡
그가 내 갑옷을 두들겼다.
“자네가 입고 있는 것과 세트인 장비지.”
“예?”
내 갑옷이랑 세트라는 것은 설마?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 (C)]
-세트 아이템 (1/7)
-거래되지 않아 더 이상의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진짜다.
내가 입고 있는 펠라인의 노랑 몸통과 한 세트인 장비.
상점창에도 안 보이고, 안전지대 매장에도 없어서 퀘스트나 유적에서 나오나 했더니만.
설마 19층의 보스가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기회다. 이건 지금 아니면 못 얻는다.
난 그를 바라봤고.
“거래, 합시다.”
손을 내밀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주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