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88화 (88/740)

88화 19층의 지배자

무슨 상황일까.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불길 속에서 돌아다니다 보니 더위를 먹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눈앞의 광경은 바뀌지 않았다.

“자네를 보고 싶었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고기 위주로 준비했지. 자고로 남자 하면 고기 아니겠는가!”

떡대 아저씨.

아니, 19층의 보스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상당한 거구. 몬스터 급은 아니지만 사람 기준으로는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는데 한 손에는 앙증맞은 폭죽을 들고 있다.

왜, 그거 있지 않은가. 케이크 사면 같이 주는 그거.

생일인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에에에!”

덕춘이야 아무래도 좋은지 냉큼 식탁에 달려가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

안에 독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음, 아니다.

특성에 독이 있는 앤데 독이 있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겠지.

나 역시 독 내성이 있으니 뜬금없이 독살을 당할 일도 없고.

“내가 예절에 밝지는 못하다네. 워낙 밖에서 굴러먹다 보니까. 하하하하!”

“아, 예.”

모르겠다.

적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내 쪽에서 먼저 칼을 꺼내기도 뭐하다.

원래 19층이 이런 곳이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전투가 아니라 인정을 받는 게 목적인 만큼 커뮤니티에 올라온 후기도 종류가 다양했다.

대련을 한 이도 있었고, 체력을 증명한 이도 있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불길 속에서 체스를 둔 사람도 있었단 것 같은데.

난 식사를 같이하는 게 인정받는 건가?

그럼 개꿀이긴 하다.

‘공격 의사가 없으니 16층 때처럼 그냥 올라갈지도 모르지.’

불의 정령이 싸울 생각이 없어서 저절로 포탈이 열렸던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오!”

의자에 앉아 음식을 입에 넣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생긴 건 투박한데 맛이 기가 막히다.

뭐랄까. 어디 캠핑가서 구워 먹는 고기?

불맛도 살아 있고 의외로 속은 부드럽다.

지방이 바짝 익어 고소하면서도 감칠맛 나고.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이것 먹게. 내가 만든 특제 소스라고.”

“좋지요.”

그가 내민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자 달콤하면서도 진한 풍미가 올라온다.

이 사람 사실 보스가 아니라 요리사인가?

그래. 요리 하면 불이지.

독에 중독됐다는 메시지도 안 뜨고 이참에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안 그대로 등반하느라 상점표 도시락만 먹어 댔는데.

결정을 내린 난 이때다 싶어 음식을 욱여 넣었고.

“크하하하! 아주 좋아! 맛있게 먹어 주니 내가 다 뿌듯하구먼!”

보스 역시 호탕하게 웃고는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

먹는 양이 대단하다.

나도 배 굶고 살던 시절이 있어서 밥깨나 먹는데…….

먹을 게 귀해지면 먹을 수 있을 때 잔뜩 먹어 두는 버릇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이 양반은 더 했다.

아주 식탁을 씹어먹을 기세로 식사에 임했으니까.

“개구리 친구도 제법 하는군!”

입가에 뭔가를 잔뜩 묻힌 보스가 소리쳤다.

덕춘이?

“…워.”

식탁 끝쪽부터 먹어 치우던 덕춘이가 어느새 중앙까지 밀고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뼛조각과 부스러기들.

빈 접시가 몇 개야.

사실 그동안 적당히 먹고 있던 건가.

혼자 도시락 두 개씩 까먹더니 위장이 는 건가.

애초에 저 몸뚱이에 다 들어가는 게 가능하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거 같은데.

[Tip. 아귀나 다른 특정 몬스터는 본인 몸집의 수십 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덕춘이는 아귀가 아닌데요.

됐다. 먹을 수 있으니까 먹는 거겠지.

배탈 나면 소화제나 사 주자.

얌전히 고기를 씹으며 19층의 보스를 살폈다.

밥은 밥이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지.

[19층의 지배자]

-본신의 힘을 전부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책하는 성자.

-불의 가호가 함께합니다.

역시나 대단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이름조차 19층의 지배자로 되어 있으니 실명조차 확인이 불가능.

눈에 띄는 정보는 하나.

불의 가호.

분명 히알틴 유적에 있던 마그나로크가 말했었지.

내가 불의 가호를 가지고 있다고.

한번 물어볼까.

힐끔, 그를 바라봤다.

탑에 올라오고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 필드 보스.

느낌이 뭐랄까.

‘적보다는 NPC에 가까운 느낌인데.’

그렇다면 그가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난 릴카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NPC들의 호감을 얻었으니까.

이거 잘하면 날로 먹을 수 있겠는데?

속으로 흡족해하며 음료수를 마셨다.

더 이상은 배불러서 못 먹겠다.

그 역시 비슷한 것 같고.

덕춘이는.

“야, 야. 일로 와라.”

“궤에에에.”

빈 접시를 핥고 있었다.

누가 보면 밥 굶긴 줄 알겠네.

“그, 잘 좀 먹이지 그랬나.”

필드 보스가 나무란다.

오햅니다. 저보다 많이 먹여요.

불쑥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털어 냈다.

“자, 배도 채웠겠다. 시련을 시작해 보실까?”

“시련이요?”

그냥 밥 먹고 끝나는 거 아니었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내 인정을 받아야 포탈이 생기는데 해야지. 아니면 여기서 계속 머물 건가? 말리지는 않겠네. 나도 말벗이 있으면 좋거든.”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거짓말처럼 테이블과 의자가 사라졌다.

순간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향상된 반사 신경으로 민망한 순간은 면할 수 있었고.

“난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식사는 그저 호의일 뿐이지.”

-쿵!

내가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며 그가 검을 땅에 꽂았다.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대검.

과연 휘두를 수나 있나 싶었지만 그에게는 가벼워 보였다.

“개인적으로 고마운 일이 있어서 말이야.”

고마운 일?

난 저 사람을 처음 본다.

당연히 뭔가 해 준 게 있지도 않다.

의문이 쌓였지만 생각은 길지 못했다.

[불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불의 친화력이 깃듭니다.]

[불의 심상과 연결됩니다.]

[불의 그릇이 완성되었습니다.]

내 앞으로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으니까.

이게 다 뭐야.

“말하지 않았는가, 호의라고.”

“설마 내가 먹은 음식들이?”

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단순한 식사 대접이 아니었다.

일종의 버프? 그것을 주기 위함이었지.

대체 왜?

아니, 그전에 덕춘이도?

“궤에에에에!”

-푸화아아악!

나만 적용된 게 아닌지 덕춘이가 불길을 뱉어 냈다.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거 같은데.

특성을 살펴보니 화염 등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고작 밥 한 끼 먹었다고 생긴 변화치고는 극적이다.

물어볼 말이 많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이걸로 그릇은 준비되었군.”

-쿠득

씨익. 입꼬리를 올린 그가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꺼내 들었다.

몸 전체를 가릴 정도로 커다란 방패.

아무런 장식도 없이 투박했지만 쇳덩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단단해 보였다.

-키릭

보스는 땅에 꽂아 넣었던 대검까지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무지막지한 괴력이다.

대검도 방패도 무게가 어마어마할 텐데.

“시련을 시작하겠다. 나를 뚫고 지나가라.”

-화르르륵!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길이 치솟는다.

다른 곳으로 세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양옆을 막아 버린 불의 장벽.

정면에는 보스가 있었고, 그 뒤에는 도착 지점으로 보이는 원이 그려져 있었다.

“저곳까지 도달한다면 내가 좋은 선물을 줄 터이니 힘내 봐라, 도전자여.”

장난스러운 미소.

호기심 어린 눈.

겉으로 드러난 호승심과 즐거움.

이 자리를 기대했다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줘야지.

“호의 감사히 받아가겠습니다.”

-차캉

검을 뽑았다.

서리 불꽃 검은 아니다.

봉인되면서 기능을 잃어 단단한 거 말고는 의미가 없어서…….

성물 약탈자 칭호를 이용하면 한 번은 쓸 수 있겠지만 지금이 그 때는 아니다.

[길잡이 검 (C)]

-당신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검로가 좀 더 매끄러워집니다.

-힘 +17

-민첩 +12

-체력 +6

상점에서 산 물건.

딱 C급 평균 정도 되는 스펙.

약간이지만 도움이 되는 옵션이 달렸다.

이걸로 충분할까?

으쓱. 어깨를 털었다.

해보면 알겠지.

가자, 덕춘아.

“뚫자!”

“궤에에에!”

힘이 넘치는 덕춘이가 괴성을 질렀고, 난 전방에 워터와 디그를 남발했다.

이어서 파이어.

-슈아아아

곳곳에 파인 구덩이.

그 안에 고인 물.

물을 증발시키는 불.

삽시간에 수증기가 공간을 덮었다.

어차피 목표는 도착 지점.

굳이 치고받으면서 땀 뺄 필요는 없다.

“으하하하!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

쾅!

그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고.

-쿠구구구궁

-쿠화아아아!

단번에 열기가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열기.

[화상이 방지됩니다!]

눈이 건조해지고 코끝이 뜨겁다.

한증막 사우나에서 전력 질주를 하면 이럴까.

들어오기 전에 마신 포션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몸이 익었을 거 같은데.

“화끈하게 들어와 봐라!”

“큭!”

열기에 수증기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보스가 방패를 들이밀었다.

정면으로 덤프트럭이 달려드는 것 같다.

몸으로 받기에는 무리다. 그렇다면…….

[안개 질주 (B) Lv.8]

그대로 지나치는 수밖에!

안개화 된 몸이 흩어져 뻗어 나간다.

빠른 속도.

레벨이 오르며 지속 시간도 조금이지만 늘어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지나갈 수……!

“어림 없다!”

-파아아앙!

그가 괴성을 질렀다.

강렬한 파장이 퍼진다.

물론 데미지는 없다.

안개화 한 순간만큼 모든 공격에서 면역이니까.

하지만 저지하는 건 별개였다.

충격에 안개화 된 몸이 밀려났다.

젠장!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할 줄이야.

안개화 된 몸이 자유분방하기는 하지만 실체 자체가 없는 건 아니다.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쿠당탕!

지속 시간이 끝나며 복도에 뒹굴었다.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해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그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보스가 거체를 날려 덤벼들었으니까.

[절삭 (C) Lv.8]

-카아아앙!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

절삭까지 사용해 위협을 주고자 했으나 그의 방패에 막혔다.

타이밍을 맞춰 날아오는 대검.

-콰가강!

몸을 굴려 간신히 피해 냈다.

소름이 돋는다.

연계가 엄청나다.

공격이 막힌 뒤 반격이 들어올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다.

나보다 족히 반박자는 빠른 타이밍.

‘공격을 막을 거란 걸 확신하고 있던 거야.’

그렇지 않는다면 이렇게 빠르게 대검을 내리칠 수 없다.

대단한 자신감.

본인의 방패술을 믿고 있다는 증거였다.

실제로도 뛰어난 게 맞았고.

그렇다는 건.

‘이용해 먹을 수 있겠군.’

가능성이 보였다.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남은 손은 슬그머니 뒤로 뺐다.

꿈틀거리는 보스의 눈썹.

이상하겠지.

갑자기 검을 한 손으로 쥐니까.

“덕춘아, 준비해라.”

“궤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어차피 덕춘이와 나는 연결되어 있는 사이.

생각만으로도 작전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 (B)]

[버프 다이스 (B) Lv.1]

[4]

[리플렉션]

난 버프를 둘렀다.

2배로 오른 스텟.

눈금 4 버프, 리플렉션.

내가 받은 데미지의 일부를 공격자에게 되돌려 주는 유용한 버프다.

“드디어 맞붙을 준비가 됐나 보군. 들어오라.”

내 기세가 달라진 걸 느낀 보스가 방패를 내밀며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든 내려칠 수 있게 들어 올린 대검.

-타앗

난 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파이어 밤 (A) Lv.1]

[파이어 밤 (A) Lv.1]

A등급에 오른 파이어 밤을 무작위로 터트렸으며.

-스으윽!

폭발에 몸을 숨겨 그에게 접근.

검을 쥔 손을 빠르게 찔러 넣었다.

“나쁘지 않은 접근이다!”

뒤늦게 날 발견했음에도 여유로운 표정.

그야 그렇겠지.

다가가 봤자 방패 앞이니까.

아무리 나라도 찌르기로 쇳덩이를 뚫는 건 불가능하다.

보스 역시 그걸 아는지 다른 공격을 대비하는 듯했고.

나 또한 그의 예상에 어울려 줬다.

[프로즌 브레이크 (A) Lv.5]

보스를 뒤덮는 냉기.

서리가 두터워지고 이내 얼음이 된다.

온몸을 얼려 버리기가 무섭게 피어오르는 연기.

-콰장창!

“이따위 얼음으로는 날 붙잡을 수 없다!”

내 저럴 줄 알았다.

하여간 사기꾼들이야. A급 스킬을 이따위로 받아치다니.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진짜는 이거니까.

난 뒤로 뺀 손으로 보물 주머니를 열었다.

[성물 약탈자(칭호)가 발동됩니다.]

성물을 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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