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다
눈을 떴다.
등을 축축하게 적신 식은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자 묘하게 낯익은 곳이 보였다.
이곳은.
“10층 여관?”
그러고 보니 투기장 이벤트를 하기 전에 숙박 기간을 늘렸었다.
너무 길게 잡았나 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마터면 광장 한가운데 떨어질 뻔했다.
얼굴이 팔린 건 아니라서 대형 길드의 공격을 받지는 않겠지만 장비를 도둑질당하는 건 피할 수 없으니까.
난 손에 들린 서리 불꽃 검을 살폈다.
[서리 불꽃 검 (S)]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
-마그나로크의 인정을 받지 못해 봉인되었습니다.
“역시인가.”
아무래도 제단에 있던 성물과 합쳐지면서 제약이 생긴 모양.
제 기능을 잃기는 했지만 놈에게 엿을 먹였으니 만족해야지.
뭐, 어디까지나 이게 시작이지만.
“뒤졌다. 무한 코인의 무서움을 보여 주지.”
어차피 난 탑 안에서 몇 번을 죽어도 되살아난다.
유적에 몇 번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것.
너희, 유적 잘못 만들었어.
유적 열쇠를 소모품으로 했어야지.
난 보물 주머니에서 유적 열쇠를 꺼내 확인했다.
입구 열고 챙겨 두길 잘했네.
뿌득.
이를 갈며 각오를 다졌다.
내가 반드시 덕춘이의 원한을…….
어?
잠깐만.
순간 머리가 띵했다.
분명 전에 시스템으로 확인했던 거 같은데.
“펫은 주인이 죽을 시 같이 안전지대로 돌아가고, 죽더라도 내가 안전지대로 가면 되살아난다고.”
그 말은?
난 훽 고개를 돌렸고.
“그에에에.”
침대 한쪽에 누워 있던 덕춘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편하게 베개에 기댄 채 배를 긁고 있는 녀석.
그새 뭘 먹었는지 입가에 부스러기가 가득하다.
“더, 덕춘아!”
“으게게겍!”
몸을 던져 덕춘이를 껴안았다.
답답한지 발버둥 치는 덕춘이.
그럼에도 난 놔주지 않았고.
-철썩!
덕춘이는 힘차게 혓바닥으로 내 뺨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목이 돌아갔다.
어우, 한 번 더 죽을 뻔했네.
감동이란 없는 개구리 자식.
누군 복수한답시고 그 고생을 했는데.
괘씸한 마음에 덕춘이의 앙증맞은 꼬리를 만지작거리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중요한가.
다시 볼 수 있는 게 중요하지.
“보고 싶었다.”
“궥궥.”
덕춘이 역시 비슷한 마음인지 슬쩍 다가와 내 다리를 두드렸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녀석.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진정되는 느낌.
흥분하느라 마비되었던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다.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아.”
과정 자체는 좋지 않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잃은 건 하나도 없었다.
아니지.
서리 불꽃 검은 기능을 잃었다.
내 유일한 A급 장비였는데.
이건 어쩔 수 없지. 장비야 또 얻으면 그만이니까.
아직까지는 특별한 장비 없어도 탑을 오르는 데 문제가 없기도 하고.
지금은 덕춘이를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안도가 된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지라 괜히 검을 쓸어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시작이니까.”
더러운 기분은 풀면 그만이다.
빌어먹을 히알틴 유적.
마그나로크 그 녀석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직접 해치우는 건 불가능하다.
시스템적으로 파괴 불가 판정을 받은 녀석이니까.
사령귀가 팁을 주기는 했다.
보다 강력한 신성력, 아니면 마기나 카오스를 써야 한다고.
신성력은 당연히 없고, 마기도 없다.
남은 건 카오스인데.
“그에?”
“왜 별로 믿음이 안 가지?”
덕춘이가 카오스 속성을 지닌 건 맞다.
다만 놈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
저번에도 한 번에 당하지 않았던가.
뭐가 됐든 공격을 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덕춘이가 죽는 걸 또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되살아나는 것과는 별개로 타협할 수 없는 건 존재하니까.
당사자야 당연히 죽기 싫을 거고.
“성물 훔치는 거로 만족해야겠군.”
대충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유적에 계속 도전하면서 전투 경험도 쌓고 스킬 레벨도 올려야겠다.
훔친 성물이야 따로 처분할 수 있겠지.
릴카가 상인이자 대장장이니까 해결책을 내주지 않을까.
당장 물어보고 싶지만 저번에 20층으로 올라간다고 했었다.
가능하면 마그나로크의 인정을 받지 않고 성물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건 나중에 확인해 보고.
“이건 또 뭐야.”
난 알림 내역을 살폈다.
한 가지 눈에 걸리는 게 있다.
“칭호를 얻었다고?”
아무래도 막바지에 서리 불꽃 검을 가지고 부활한 게 업적으로 처리된 것 같았다.
역시 시스템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나야 좋으니 상관없지만.
새롭게 얻은 칭호의 정보를 띄웠다.
[성물 약탈자-칭호]
-교단의 성물을 훔친 도둑놈!
-윤리를 떠나 그 과정은 쉽지 않죠.
-대담함. 빠른 판단과 행동력. 잡히지 않고 탈출하는 영민함!
-방향성은 글렀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뭘까. 이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것은.
잡다한 설명을 넘어가고 효과가 뭔지나 보자.
공략자처럼 스텟을 올려 주는 걸까.
아니면 밤을 부르는 자처럼 특별한 능력을 주는 걸까.
칭호라는 게 얻기 힘든 건데 어쩌다 보니 벌써 세 번째다.
[성물 약탈자-칭호]
-교단의 성물을 훔친 자. 신성 또한 얻으리라.
-신성력 +10
-훔친 성물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각 성물 당 한 번 사용 가능.)
-훔친 성물이 많을수록 신성력 수치가 올라갑니다.
[신성력 스텟이 개방됩니다.]
“오? 신성력?”
기대 이상의 효과다.
사실 힘이나 민첩 같은 스텟은 있으면 좋지만 급하지는 않다.
각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스텟을 정산해 주니 등반하는 것만으로도 올릴 수 있으며,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자연스럽게 향상되니까.
반면에 신성력 같은 특수 속성은 제법 귀하다.
“성직자 계열이 아니면 보통은 없는 건데.”
아니면 신성 무구를 쓰던가.
값이 비싼 건 말할 것도 없다.
잘됐다. 탑을 오르면서 느끼지 않았던가 조금이나마 신성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무엇보다 맨 마지막 설명이 마음에 든다.
내가 하려는 짓과 딱 맞아떨어지니까.
이거 어쩔 수 없이 성물을 털어야겠구먼.
단 한 번이지만 성물을 사용할 수도 있고…….
오케이, 칭호는 확인 완료.
다음은 이거.
[혈괴의 저주 단검 (E)]
-주인 한정, ‘혈괴의 저주 (A)’를 쓸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평범한 단검.
“효과가 엄청나던데.”
진짜 바로 저주에 걸려 죽었다.
나한테밖에 못 쓴다는 게 함정이기는 하지만 유용하기는 하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안전지대로 도망칠 수 있는 탈출 아이템으로 쓸 수 있으니까.
나중에 저주 내성 스킬을 얻으면 레벨 올리는 용도로도 쓸 수 있을 거 같고…….
화기 내성도 효과를 톡톡히 보지 않았던가.
“어? 그러고 보니 내성 스킬 하나 더 있지 않았나?”
[독 내성 (E) Lv.1]
-모든 독에 내성을 지닙니다.
“이걸 잊고 있었네.”
내성 스킬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법.
언제 독을 내뿜는 적을 만날지 모르는 만큼 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다.
역시 가장 빠르게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독에 노출되는 건데.
슬쩍 덕춘이를 바라봤다.
“덕춘아.”
“궥?”
“너, 독 특성 있지? 뱉어 봐.”
“으게에에에.”
운이 좋게도 내게는 살아 있는 독 생성기가 있다.
특유의 띠꺼운 표정으로 날 보던 덕춘이가 침을 뱉었다.
-치이이익
“악! 좀 살살 하지!”
팔뚝에 묻은 독액에 살갗이 물러진다.
산 채로 녹는 통증은 상당했지만 얼굴을 찌푸리며 버텼다.
그렇게 10분. 팔뚝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무렵.
[스킬 레벨업!]
[독 내성 (E) Lv.2]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통증이 줄어든다.
거기에 안전지대에 적용되는 회복 효과까지 적용되니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히는 느낌.
시간이 지나니 독성도 줄어들어, 30분이 지나자 상처가 완전히 나았다.
이거 잘만 쓰면 레벨을 극단적으로 올릴 수 있겠는데?
덤으로 덕춘이의 특성도 강화하고.
“덕춘아, 이대로 계속하자. 독으로 핥고 회복을 핥고. 반복 오케이?”
“으엑? 게에에에.”
덕춘이의 특성도 등급이 있는 거로 봐서 계속해서 사용하면 오를 가능성이 있다.
나도 나지만 덕춘이도 강해져야지.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제대로 당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망가진 가고일 슈트를 벗어 던지고 보물 주머니에 넣어 뒀던 배틀 슈트를 입은 뒤, 덕춘이는 갑옷 안 넣었다.
“으게에에. 핥!”
배틀 슈트의 지퍼를 연 덕춘이가 가슴을 핥는다.
한 번은 독액을.
그다음에는 회복을.
살이 짓물렀다 낫기를 반복하는 기묘한 감각에 솜털이 바짝 선다.
어오. 짜릿해.
죽을 거 같은데 살 만하다.
뇌에서 엔돌핀이 팡팡 터지는 기분.
견디기 힘들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다 강해지기 위한 노력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준비는 끝.
나갈 시간이다.
-끼이익
나가는 김에 여관 숙박 일자도 늘렸다.
앞으로 유적을 여러 번 드나들 거라 몇 번이나 이곳에 올지 모르니까.
발걸음을 옮기며 안전지대를 살폈다.
“확실히 분위기가 바뀌었어.”
킬더레스와 릴카가 힘써 준 덕분에 대형 길드의 입지가 줄었다.
여전히 몰려다니며 위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전처럼 나대지는 않는달까.
새롭게 뽑힌 처리관들도 조용히 지내는 것 같다.
대형 길드가 나서지 않아도 치안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이 되었다.
좋은 변화.
괜스레 흡족한 마음이 들어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즐긴 나는.
[포탈에 진입합니다.]
[11층]
곧장 위로 올라갔다.
기다려라, 마그나로크.
내가 간다.
* * *
17층. 오아시스 아래.
열쇠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히알틴 유적.
-구구구궁
유적 가장 깊은 곳, 얼음과 불의 제단에 잠들어 있던 마그나로크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유적을 뚫고 있다.
그는 유적을 지키는 자이자, 교단 성물의 주인을 찾아내는 시스템이었으며, 교단을 지탱할 기둥을 고르는 의지였다.
유적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도전자가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불의 길을 돌파하고 있는 것을.
이 속도라면 얼음의 길 또한 금세 뚫릴 것이다.
“대단한 자질이군.”
마그나로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질만 따지면 첫 번째로 이곳에 찾아온 자와 비교할 만하다.
움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첫 번째 도전자가 훔쳐 간 성물이 떠오른 탓.
신의 의지로 창조된 자신을 우롱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으며, 용서할 줄만 알았다면 훌륭한 교단의 기둥이 됐을 거라는 아쉬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어리석은 녀석, 훌륭히 모든 시련을 거치면 잃었던 것을 돌려주거늘.”
아직까지 제대로 유적을 클리어한 자가 없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그나로크는 도전자의 소중한 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없앴다가 다시 생성한다.
얼음과 불의 신전은 그렇게 혹독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모든 시련을 통과한 자에게는.
“이번에는 부디 멀쩡한 놈이 왔으면 좋겠군.”
도전자가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 마그나로크가 허리를 세웠다.
부디 이번에는 교단의 기둥이 탄생하기를.
몰락한 교단을 부흥시킬 새로운 전도자가 생기기를.
-쿠구구구구
-구구구궁
진동이 지척이다.
예상보다도 빠르다.
조금 있으면 제단의 문이 열릴 것이고 도전자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영겁의 세월을 제단에 묶여 살아가는 마그나로크에게 있어서는 가장 즐거운 시간 중 하나.
-구궁, 쿵!
이제 코앞이다.
마그나로크가 천천히 팔을 벌렸다.
맞이하자, 새로운 희망을.
무료함을 없애 줄 신선한 신도를!
-우우우우웅!
[얼음과 불의 신전, 제단에 진입합니다.]
도전자의 입장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찬란한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사람.
마그나로크는 기쁜 마음으로 입을 열었고.
“얼음과 불의 제단에 들어온 게 누구인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전자가 검을 뽑았다.
“나다, 씹새끼야.”
조현수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