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기다려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나는 모른다.
신성력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공동을 덮쳤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의 마력이 빠져나갔으며.
온몸이 걸레짝이 된 듯 너덜너덜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반발력에 가뜩이나 넝마 같았던 방어구가 모조리 찢겨 나갔다.
말 그대로 에너지의 폭풍.
번쩍였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는.
-구그그그그
반파된 마그나로크가 눈앞에 있었다.
사라진 하체.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몸통.
어깨만 남고 날아간 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얼굴.
-캉
난 검으로 몸을 지탱했다.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토를 했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안 끝났다.
저 빌어먹을 녀석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남은 마력이 얼마 없어.’
정말 딱 한 번.
전력을 쏟을 수 있을 정도가 남았다.
등 뒤에 떠오른 사령귀 역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허용된 수치 이상의 힘을 부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를 연결해 주고 있는 끈이 약해진 건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버프를 유지할 수 있는 마력 자체가 남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 마무리는 내가 지어야 한다.
그게 맞다.
나를 위해서도.
덕춘이의 복수를 위해서도.
눈금 6의 버프 다이스. 확실히 강력하지만 유지만으로도 마력이 많이 빠져나간다.
“그만 돌아가.”
만약 상황이 좋았다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위층에는 무엇이 있는지.
탑에는 언제 올랐던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지금의 내게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신성을 지닌 자를 소멸시킬 수 있는 건보다 강력한 신성력, 혹은 그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마기와 카오스뿐이다.”
이름도 모르는 사령귀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히 있던 녀석이.
“탑은 많은 것을 잃게 하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
[상호 간의 합의로 버프, 사령귀마가 해제됩니다.]
제 말만 하고 사라지는 녀석.
뚝. 사령귀와 연결되었던 것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의 위로일까.
모른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알 수 있겠지.
남은 건 하나.
마그나로크를 끝내는 것.
-타앗
삐걱거리는 몸을 강제로 움직였다.
눈앞이 아득하다.
단시간 내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반작용.
이를 악물며 달렸다.
단 한 방.
놈을 없애 버릴 공격을 준비하며.
[안개 질주 (B) Lv.4]
목표는 놈의 얼굴.
쉽사리 재생하지 못하는 녀석이 꿈틀거렸다.
-스아아악!
안개화 된 몸이 순식간에 놈에게 도달했다.
뚫린 몸통에 내려앉기가 무섭게 발동한 스킬.
[망자귀환 (A) Lv.1]
한순간에 3배로 뛰어오른 스텟.
바닥이었던 마력이 조금이나마 차올랐고, 몸 상태 역시 미약하게나마 회복이 되었다.
-턱
실체화된 몸이 놈에게 닿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녀석.
난 마그나로크의 얼굴과 몸을 끌어안았다.
“죽자.”
이미 파이어 밤과 사령귀의 공격으로 데미지는 충분히 쌓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괴물 같은 일격이었다.
그게 84층까지 오른 자의 힘인 걸까.
그걸 맞고 즉사하지 않은 마그나로크는 또 어떤 괴물인 걸까.
상관없다.
괴물 새끼 잡는 게 헌터인데.
[되갚기 (A) Lv.2]
망설임 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 중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것.
스스로를 깎아 데미지를 모아 터트리는 공격.
응축된 에너지가 나를 중심으로 넓게 펴져 나온다.
-쿠구구궁
-콰가가가강!
깊고 넓은 파동.
순도 높은 힘의 물결이 범위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돌이 부서져 가루가 되고, 균열이 벌어져 조각이 된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와 마그나로크.
눈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은 것일까.
아니면 번져 가는 빛의 향연에 눈이 타들어 간 걸까.
한쪽 고막이 터져 귀가 먹먹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잘게 나뉜다.
놈의 몸이 가루가 된 건가.
어쩌면 내 손가락이 바스러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길게 느껴지는 소멸의 과정이 끝나고.
-털썩
난 바닥에 떨어졌다.
나를 지탱하고 있던 마그나로크의 몸이 사라진 것.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몸이 쑤셔 왔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파스스스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마그나로크의 잔해.
원형으로 갈려 나간 천장과 바닥.
그리고.
-우우우웅
고고하게 허공에 떠 있는 마그나로크의 왕관.
황금빛 색채를 더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시발.”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저것부터 없애야 했던 걸까.
주먹을 움켜쥐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들어맞았다.
[마그나로크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안다.
처음부터 알았다.
말 같지도 않는 옵션이 붙은 괴물이라는 건.
-쿠득, 쿠드드득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마그나로크의 몸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비틀었다.
일어서야 한다.
다시 검을 쥐어야 한다.
파괴 불가?
“어쩌라고, 그래서.”
아직 내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적이 굳건한데 내 멋대로 멈추는 건.
“그만큼 소중하지 않았다는 거지.”
-카강!
검을 땅에 내리찍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많은 걸 잃고 살아왔다.
대격변이라는 재앙은 ‘상실’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익숙해질 만도 했고 수긍할 만도 했지만, 내 성격이 꼬인 건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탑에 올라 정점을 찍겠노라 다짐했던 이유가 뭔데.
뭐 때문에 짐꾼 노릇까지 하며 던전을 들어갔던 건데.
“두 번째 교리, 복수. 그대는 훌륭하게 해냈다. 아니, 그 누구도 이 정도로 해내지는 못했다.”
“닥쳐.”
상체가 복구된 마그나로크의 말에 난 중지를 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다르지.
‘몸은 반병신, 마력은 바닥. 고막이 제대로 터졌는지 이명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
스킬? 못 쓴다.
파이어 밤은커녕 워터 한 번 쓸 마력도 남지 않았다.
사실 지금 어떻게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대의 분노는 불처럼 강렬했으나, 불길이란 모든 것을 태우면 사라지는 덧없음 또한 가지고 있다.”
상체에 이어 하체도 반쯤 모습을 갖춘 마그나로크.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다.
탑에는 저런 괴물들이 차고 넘치겠지?
잠깐이지만 함께했던 사령귀 역시 그렇고.
놈이 떠드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잦아든다.
떠들어라, 나는 속으로 칼을 갈 테니.
“마지막 세 번째 교리를 알려 주마.”
-파앙!
그가 손뼉을 치자 불길과 얼음이 맞부딪쳐 수증기가 되었다.
아늑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몸 전체를 껴안는 포근한 감촉이었지만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역겨웠다.
“얼음과 불은 그 하나만으로는 완벽하지 않은 것. 딱딱한 얼음을 녹여 줄 불과 스스로 불사르는 불길을 녹여 줄 얼음. 그것이 화합이며.”
마그나로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바탕에는 용서가 있지. 세 번째 교리는 용서다. 도전자여, 현실을 받아들이고 분노를 꺼라. 나를 용서하라.”
-파아아앗
더없이 성스러운 빛줄기가 나를 반겼다.
마그나로크에게서 흘러나오는 후광.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안해지는 기운이 물씬 풍겼다.
이만하면 됐다고.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두어야 한다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우습게도 일어나는 건 반발심과 놈에 대한 가증스러움이었다.
-카가가가각!
끊어질 것 같은 근육을 달래며 검을 내질렀다.
반동에 손아귀가 찢기고 전완근의 감각이 무뎌진다.
검이 울리는 통에 뼈와 근육이 분리되는 통증이 느껴진다.
다리가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카앙!
-콰가가!
난 검을 멈추지 않았다.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온다.
불똥만 튀어 오를 뿐 작은 파편 하나 만들지 못했으나,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놈도 알아야 한다.
상처가 남는다는 게 뭔지.
“…그만하라, 도전자여.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도 있는 법이다.”
체력이 고갈된다는 말을 몸으로 체득했다.
극한에 극한까지 이르러,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느낌.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 멈춰야 할 근육을 쓰는 감각.
이상하게 정신만은 점차 살아났다.
-캉! 카앙!
둘만 남은 공동.
쇳소리만 어지럽게 울려 퍼지고.
“분노만으로는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놈의 속삭임을 연료 삼아 다시금 검을 찔렀다.
-떨그렁!
손이 찢겨 검을 놓쳤다.
다리가 풀려 무릎이 꺾였다.
앞으로 기었다.
-퍽, 퍼억
주먹으로 놈의 발등을 찍었다.
들리는 건 무른 살이 으깨지는 소리뿐.
손이 부어오르다 이내 터져 피가 흘렀고, 근육이 뭉개져 더는 주먹조차 쥐지 못했다.
“그만.”
놈이 날 막았지만 무시했다.
오로지 내려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주먹이 안 되면 팔뚝으로.
팔뚝도 안 되면 팔꿈치로.
그마저도 안 되면 머리라도 박았다.
“그만.”
뇌진탕이라도 왔는지 시야가 노랗다.
속이 비어 위액밖에 없는 위장이 요동친다.
그래서 뭐.
이대로 쉴 건가?
바닥에 나자빠져 다 포기할 건가?
절대 그럴 수는…….
“그만!”
“커흑!”
마그나로크가 호통을 쳤다.
그 안에 담긴 신성력에 내장이 뒤흔들렸다.
속이 뒤틀리는 고통.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떨었다.
“크게 기대했건만 그대는 이미 분노에 잡아먹혔구나. 용서가 없는 자는 교단의 기둥이 될 자격이 없다!”
“누가 그딴 거에 관심 있데?”
교단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
신앙심? 쥐뿔도 없다.
애초에 얼음과 불의 신전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곳은 내가 지나가야 할 고난 중 하나일 뿐이며, 동시에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일 뿐이다.
내게 필요한 건 마음의 평화나 교인이 되기 위한 자격이 아니라…….
“이런 개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 힘이라고!”
-쿵!
놈의 발등에 머리를 내리찍었다.
살이 찢겨 피가 줄줄 흘렀지만 아픔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무력함.
나보다 한없이 강한 대상에게 어떤 위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만이 뼈아프게 사무쳤다.
밖이나 탑이나 힘의 논리는 통했고, 용서니 뭐니 하는 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뭐가 용서야. 억지로 하는 것도 용서냐, 포기하는 거지. 용서받고 싶으면 사과부터 했어야지, 씹새야.”
위에 있는 것이 당연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녀석.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지.
쿨럭.
피를 토했다.
이미 한계다. 아니, 한계를 넘어섰다.
기절하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대는 자격이 없다. 성물을 회수할 것이며 그대는 이곳에 잠들리라.”
-우우우우웅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신성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얼핏 따뜻해 보이지만 난 안다.
저 안에 숨어 있는 파괴의 힘과 강건한 탄압을.
뒤이어 서리 불꽃 검에도 신성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조금씩 떠오르는 검.
양아치가 따로 없다. 죽이는 거로 모자라 물건까지 뺏으려 하다니.
반은 내 건데, 젠장.
난 목을 비틀어 놈을 노려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날 굽어보는 녀석.
그 무기질적인 면상을 보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좋다. 강자가 이기는 거 당연하고 이기면 물건 뺏을 수도 있지.
나도 오지혁의 아티팩트를 훔쳤으니까.
10층 처리관도 밖으로 내보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끝까지 사과 한 번을 안 하네, 개새끼.”
절대 본인 아쉬운 소리를 안 하는 저 태도였다.
난 꺼져 가는 의식을 애써 잡으며 버르적거렸다.
놈을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엿 먹일 수는 있지.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차앙
그나마 멀쩡한 왼팔을 움직여 보물 주머니를 열었다.
손에 감기는 단검.
10층 안전지대에서 산 숨겨진 옵션이 달린 물건.
[튼튼한 단검 (F)]
-주인의 피를 머금으면 혈괴의 저주가 생길 수 있습니다.
-흡수한 피 (0/100)
-가장 먼저 먹은 피를 주인으로 인식합니다.
-단, 저주는 주인에게만 적용됩니다.
이걸 이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푹
허벅지에 검을 꽂았다.
반쯤 맛이 갔는지 통증이 그리 심하지 않다.
방어구가 다 뜯겨 맨살이 드러나 있는 게 다행.
덕분에 피는 잘 묻겠다.
그런 나를 보며 마그나로크가 얼굴을 찌푸렸다.
“분노에 차 이제는 자해까지 하는 것이냐. 어리석다, 어리석어.”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 수 있는지 보자.
[튼튼한 단검이 주인의 피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피 (25/100)]
[흡수한 피 (47/100)]
“고통 없이 보내 주마. 그것이 나의 마지막 배려다.”
마그나로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의지에 따라 신성력이 요동친다.
피할 곳은 없다. 피할 상태도 아니었고.
‘제발 빨리 좀 돼라!’
서서히 다가오는 신성력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온다. 진짜 곧 있으면 죽는다.
부르르 떨리는 몸으로 난 앞으로 기었다.
[흡수한 피 (81/100)]
[흡수한 피 (94/100)]
천천히 나를 짓누르는 신성력이 거세진다.
머리카락이 신성력에 타들어 가는 게 느껴질 정도.
난 초조하게 알림창을 확인했고.
[흡수한 피 (100/100)]
지금이다!
[숨겨진 옵션이 생성됩니다!]
혈괴의 저주가 생기는 타이밍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떠오르던 서리 불꽃 검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퍼지는 죽음이 눈앞까지 찾아왔다.
[혈괴의 저주 (A)가 적용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한다.
혈괴의 저주가 피를 모조리 썩게 만들었다.
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고.
“이, 이런!”
당황한 마그나로크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의식을 놓아 주었다.
또 보자, 이 자식아.
[사망했습니다.]
[남은 코인: 999,999,999×∞]
[안전지대에서 부활합니다.]
[조현수 님의 사망을 확인.]
[펫, 덕춘이가 함께 부활합니다.]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을 훔쳤습니다.]
[칭호-성물 약탈자가 생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