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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80화 (80/740)

80화 첫 번째 교리

난 벽면에 놓인 수많은 성물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벽화와 미술관보다 아름다운 광경.

성스러운 빛을 뿌리며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모습은 누구라도 넋을 잃을 만한 것이었다.

비록 그 내면에 탐욕과 강해지고자 하는 갈망이 있더라도 탓하는 이는 없으리라.

그만큼 성물이라고 불리는 물건들은 대단했으니까.

[빙결의 조화 (A)]

-문신형 아티팩트

-아이스 아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전자의 신성력과 마력에 따라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업화의 도장 (A)]

-꺼지지 않는 불꽃을 낙인시킵니다.

-불의 가호를 받은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데이커의 투구 (AA)]

-얼음과 불의 신전, 팔라딘으로 활동했던 데이커의 투구.

-그의 신성력이 남아 있습니다.

-3성급 이하의 언데드가 두려워합니다.

-언데드 공격 시 추가 데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에는 보인다.

성물이라 불리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

얼핏 본 것만 A급 아이템.

더러 B급 아이템도 보였지만 등급을 뛰어넘을 만한 효과나 메리트가 있었으며, AA급 간혹가다 AAA급 장비도 보였다.

말 그대로 보물 창고.

한동안 말없이 벽면을 바라보던 난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내가 첫 번째 발견자라고 했는데 저곳들은 뭐지?’

수많은 성물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지만, 벽면에는 빈 공간이 존재했다.

많지는 않다, 대략 3개?

원래 없던 것인지 없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였고.

“저건.”

그중 하나에는 뭔가가 있었다.

다른 것에 비해 눈에 띄지도 않고, 신성력도 내뿜지 않아 있는지도 몰랐던 것.

[서리 불꽃 검의 검신 (A)]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검신만 남아 대부분의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리 불꽃 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적당히 보수한 것에 불과한 물건이었지.

‘15층에서 봤던 것과 똑같아.’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보였던 환영.

그곳에 있던 여인이 들고 있던 검이 그랬다.

한쪽은 새하얀 검신, 다른 쪽은 푸른색 검신.

반면에 내가 쥐고 있는 검은 평범한 철검이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우우우웅!

자신의 짝을 알아본 걸까. 서리 불꽃 검이 강렬하게 진동했다.

찬란하게 터져 나오는 빛.

그동안은 느껴지지 않았던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그그그극

그것에 화답하듯 벽면에 있던 검신도 진동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릴카와의 내기. 서리 불꽃 검을 봤을 때 행운 스텟이 발생한 이유를.

유적을 통해 검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시선을 돌렸다.

성물에 눈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이 자리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성물을 들고 찾아오는 건 네가 처음이다.”

내 앞에 선 거대한 존재.

성물을 지키는 가디언이 나를 굽어봤다.

[마그나로크]

-얼음과 불의 신전의 판단자

-교단의 의지로 움직이는 시스템

-마그나로크는 교단의 총체와 같습니다.

-신의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파괴 불가

-???등급

설명만 봐도 살벌하다.

교단의 총체.

파괴 불가 옵션.

등급은 확인조차 안 된다.

저런 경우는 딱 두 번 봤다.

NPC, 그리고 봉인된 달칸의 원래 등급.

5성급 괴물인 화갑룡도 정보는 떴다.

“이곳은 얼음과 불의 제단. 교단의 기둥이 될 자를 선별하는 곳.”

내가 답이 없자 마그나로크가 말을 이었다.

다리는 땅에 박혀 있는지 몸통부터 보이는 형태였지만 그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할까.

마그나로크의 말에 경청했고.

“그대는 교단의 교리를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파아앗

그의 손짓에 신성력으로 막혀 있던 성물 진열장이 열렸다.

한층 뚜렷하게 보이는 물건들.

“이미 앞선 과제를 통해 기본적인 자질은 확인한바, 얻고자 하는 성물을 고르라.”

“어? 진짜?”

예상치 못한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모든 시련이 끝나고 성물을 고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

“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성물은 사용할 수 없다. 짧게나마 경험시켜 주는 것일 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깐 동안 빌려주는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성물이 없다면 클리어하기 힘든 난이도의 시련을 준다는 걸 테고.

이미 어떤 것을 고를지는 정해 놨기에 고민하는 시간은 없었다.

“저거, 서리 불꽃 검신을 선택한다.”

“옳은 선택이군.”

내 손짓을 확인한 마그나로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석에 박혀 있던 검신이 둥둥 떠서 내게로 날아왔다.

그와 함께 공명하기 시작하는 서리 불꽃 검.

짝을 찾은 성물이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우우우우!

보물 주머니까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저절로 주머니가 열리며 나온 것은 보석 두 개.

[불의 정수가 서리 불꽃 검을 합체시킵니다.]

[얼음의 정수가 서리 불꽃 검을 합체시킵니다.]

15층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왜 이제 봤을까.

서리 불꽃 검에는 홈이 파여 있었다.

양면에 손톱만 한 크기의 홈.

이제 보니 보석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검과 검신.

두 개의 보석.

얼음과 불의 기운을 가진 것들이 하나로 뭉쳐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꾸드득! 꾸득!

붙어 있던 쇳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푸른 검신이 자리한다.

파여 있던 홈에 보석이 안착했으며, 강력한 신성력이 서로를 끌어당겨 고정시켰다.

점차 강해지는 신성력.

시원하면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감싸더니 이내 진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서리 불꽃 검이 완전해집니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검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신묘한 분위기의 검.

“와우.”

“그에에.”

난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불완전한 상태임에도 A급이었다.

완전해진 지금은?

[서리 불꽃 검 (S)]

-얼음과 불의 신전의 성물

-두 신의 화합을 상징하는 보물이다.

-냉기와 화기를 품고 있다.

-강력한 신성력을 가졌다.

무려 S급 무기가 되었다.

놀라운 건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정보라는 점.

숨겨진 정보는 더 있었다.

[서리 불꽃 검 (S)]

-화기와 냉기에 강한 저항력을 가집니다.

-또 다른 교단의 기둥과 연결합니다.

-자체 수복 가능. 사용자 또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합니다.

추가적인 옵션들.

교단의 기둥과 연결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마그나로크의 말로 추측하자면 모든 시련을 이겨 낸 팔라딘을 교단의 기둥으로 부르는 거 같은데.

‘일종의 커넥션을 만드는 건가.’

이거야 나중에 해 보면 되는 거고.

난 검을 쥐었다. 힘이 오른 게 느껴진다.

검 자체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스텟도 많이 오르니까.

말 그대로 장비빨이라고 해야 하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물은 마그나로크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경우 봉인됩니다.]

[시련 진행 중]

[일시적으로 성물이 활성화됩니다.]

이 조건.

아직까지는 완전하게 봉인이 풀린 게 아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내게 될 거니까.

“준비는 끝났나?”

검을 몇 번 휘두르며 감을 익히고 있자 마그나로크가 물었다.

친절하기도 하지.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 주기도 하고.

“어, 준비 끝났다.”

검을 빙글 돌려 자세를 취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휘둘러 보니 알겠다.

탐난다, 이 검은 내가 가져간다.

“그럼 시련을 시작하겠다.”

마그나로크가 거체를 세웠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

그의 거대한 손이 펼쳐지더니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쿠르르르!

팔 일부가 무너지며 돌덩이가 떨어져 내린다.

하나같이 거대하고 신성력이 깃든 것들.

그것들이 서로 엉겨 붙는다.

다리, 몸통, 팔, 머리까지.

거칠었던 단면이 다듬어지고 매끄러운 몸체에 섬뜩한 빛이 감돈다.

[팔랑크스 가디언]

-얼음과 불의 교단의 판단자, 마그나로크의 분신.

-마그나로크의 의지에 따라 등급이 올라간다.

-현재 3성급

크기 대략 4미터.

그동안 봐 왔던 가디언들 덩치가 워낙 커서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3성급이라는 정보도 그렇고.

이걸로 뭘 하려나.

혹시 모르는 만큼 긴장감을 유지했다.

탐색하는 건 기본.

‘다른 가디언과 마찬가지로 재생 능력이 있을 건 분명하고… 불이나 냉기를 뱉기도 하나?’

몸체가 날렵한 것이 움직임도 빠를 것 같다.

내구성은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건 꽤 단단해 보인다.

거슬리는 건 저건데.

“광선검?”

놈이 들고 있는 검이 심상치 않다.

손잡이까지는 평범한데 위로 솟은 칼날은 쇠도 돌덩이도 아닌 빛이었으니까.

아니, 얼음과 불의 교단이면 불이나 얼음 검을 쥐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것도 신성력이니까 상관없다는 건가.

머리를 굴려 봤지만 역시 부딪쳐 봐야 자세한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

-구그그그

분신을 만들어낸 마그나로크가 붉은 안광을 뿜었다.

“그대의 자격을 시험하겠다.”

천천히 그의 손이 들린다.

“얼음과 불의 교단에는 세 가지 교리가 있다.”

이어 신성 마법이 펼쳐져 제단을 보호하는 막이 형성되었고.

“그 첫 번째는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냐.”

그의 물음과 함께 빛무리가 나를 감쌌다.

탐색하듯 너울거리는 빛의 물결.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전신을 훑는 감각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알아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달까.

난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

있던가.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친우들은 연락조차 안 된다.

대격변 때 죽은 친구만 열 명이 넘으니까.

살아남은 이들 역시 저마다 살길을 찾느라 바빴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사실상 내게 남은 인간관계라고는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사람이 전부.

굳이 더 있다 말한다면 탑에 올라와 인연이 생긴 커뮤니티 멤버들과 NPC 몇 명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모르겠어.’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건?

내가 아끼는 뭔가가 있었나?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어릴 적 추억이 남은 집은 무너졌고, 자연스레 그때의 물건들은 땅속 어딘가에 묻혔으니까.

성인이 된 이후에도 특별할 건 없었다.

“생각보다 무미건조하게 살았네.”

잃기만 하고 세상에 치여 구르기만 해서 그런지 남은 게 없다.

한없이 무력하고 비참했던 삶이 길었으니.

힘도 배경도 돈도 없던 생활.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았던 시대.

살고자 하는 본능은 남아 발버둥 쳤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탑의 부름을 받기를 원한 걸지도 모른다.

탑을 오르고 강해지고 헌터가 되어,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그런 내게 소중한 게 있다면…….

“궥궥!”

응?

입을 열기도 전에 덕춘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마그나로크도 의아한지 목을 뺀다.

이놈의 개구리가 밥때가 됐나, 왜 이러지?

“궥! 그에에에.”

의구심이 든 것도 잠시.

덕춘이가 당차게 몸을 세우더니 가슴을 두드렸다.

뿜어져 나오는 박력.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콧김.

뿌듯함에 움찔거리는 입꼬리.

“게게게겍.”

코를 한번 쓱 닦은 녀석이 멋지게 뒤돌더니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표정이 뭐랄까, 그니까.

‘역시 내가 제일 소중하지?’

이런 표정?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빛을 보아하니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것 같다.

순간 마그나로크와 눈이 마주쳤다.

뭐. 왜. 뭐.

왜 그렇게 쳐다봐. 내 개구리가 그렇다는데.

“그, 그럼. 덕춘이가 제일 소중하지!”

“게엑!”

난 빳빳하게 목을 쳐들며 소리쳤고, 덕춘이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내게 달려와 안겼다.

그래. 탑에 올라와서 같이 뒹구는데, 덕춘이가 최고지.

따지고 보면 옆에서 놀아 주는 친구이자,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자, 밥 잘 먹는 식충이가 아니겠는가.

소중한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확고히 결정을 내린 난 마그나로크를 노려봤고.

“…그래. 문제 될 건 없지.”

미간을 긁적인 마그나로크가 인정을 했다.

내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빛무리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좋다. 시험을 시작하지. 맞서 싸워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쿵! 쿵! 쿵! 쿵!

저기 달려오는 팔랑크스 가디언을 때려잡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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