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유적인가?
핥짝이가 몇 층까지 올라왔을까.
하루 전에 출발했으니 대략 12층? 빠르면 13층에 있을지도 몰랐다.
13층은 8시간 동안 버티는 게 클리어 조건이니까 14층까지는 시간상 못 올라왔을 거고.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핥짝이가 보여 준 퍼포먼스를 생각해 보면 13층까지는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내가 올린 공략도 있으니 시행 착오를 거칠 일도 없고.
어, 잠깐만.
“15층 공략법은 어떻게 하지?”
이걸 생각 못 했네.
지금까지 올린 공략은 14층까지.
15층은 아직 안 올렸다. 사실 올릴 게 없었다.
난 정식 루트가 아닌 히든 퀘스트를 통해 15층을 클리어했으니까.
9층 때처럼 히든 퀘스트 공략법을 올리는 방법도 있지만.
“안 될 거야, 아마.”
히든 퀘스트 자체가 무조건 발생하는 게 아니다.
확실한 조건을 지켜야 발생하는 거지.
그리고 그 조건은 누구도 모른다. 정황을 보고 짐작할 뿐.
괜히 똑같은 조건을 갖추었는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예로 들어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고블린 100마리를 잡아야 발생하는 히든 퀘스트가 있다고 치자.
운 좋게 반지를 낀 채 사냥하여 처음 히든 퀘스트를 발견한 사람이, 조건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기에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고블린 100마리를 잡으면 히든 퀘스트가 생깁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음 사람도 고블린을 사냥했지만, 맨손이었기에 1,000마리를 잡아도 히든 퀘스트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욕 나오는 거지.
‘저 새끼가 구라 쳤어요!’
‘왜 난 안 되는 건데!’
이런 식으로.
“9층이야 조건이 명확하니까 상관없었지만.”
대놓고 알림창으로 히알틴 유적 열쇠를 언급했으니까.
15층은 달랐다. 짐작되는 조건만 해도 세 가지.
“대학살의 실마리를 찾을 것, 4성급 몬스터를 잡은 경험이 있을 것, 서리 불꽃 검이 있을 것.”
이미 여기서 탈락이다.
실마리를 찾는 거야 어떻게 가능하다 쳐도 4성급을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저층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서리 불꽃 검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릴카가 아니었다면 있는 줄도 몰랐을 거다.
사실상 나 말고 깰 사람이 없다.
“무작정 올리기에는 역효과도 심하고.”
내가 가진 공략자 칭호.
공략 공헌도는 반응에 따라 점수가 바뀐다.
신빙성 없는 공략을 올리면 역효과로 점수가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
아무래도 15층 공략법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니까.
“16층도 포기해야겠네.”
난 헥헥거리는 불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이곳도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클리어를 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
불의 정령이 공격을 안 해서 클리어됐다고 말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테니.
슬프다. 공헌도를 올릴 기회가 이렇게 사라지다니.
[공략자-칭호 (성장형)]
-올 스텟 +10
-행운 스텟 +5 (행운 스텟은 일반 스텟과 별개로 적용됩니다.)
-현재 공헌도: 102점 (다음 보상까지 48점 남았습니다.)
“48점만 더 올리면 되는데.”
아깝다. 뭐라도 적어서 올리고 싶지만 괜히 허튼짓해 봤자 반감만 사겠지?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다.
“다음 층을 깨고 공략법을 올리는 것.”
“그엑. 그엑.”
덕춘이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똑똑한 녀석.
할 일은 정해졌다.
망할 무한 코인 때문에.
공략 공헌도를 위해.
핥짝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위로 올라가야 한다.
따지고 보면 반드시 핥짝이를 피할 이유는 없는데.
“나사가 몇 개 빠진 것도 같고, 괜히 정체를 밝혔다가 탈모맨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진단 말이야.”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난 덕춘이를 어깨에 올리고 포탈 앞에 섰다.
“끼잉. 끼이잉.”
“왕! 왕!”
아쉬운지 내 주변으로 다가오는 불강아지들.
꼬리를 흔드는 것이 퍽 귀여웠지만 귀여움으로는 핥짝이를 막을 수 없다.
“너희도 살고 싶으면 핥짝이한테 배 까고 꼬리 흔들어, 알겠지?”
이해할 리는 없지만 난 충고를 남겼다.
잠깐이지만 만지작거리면서 힐링한 대가라고나 할까.
그럼 가자.
[포탈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웅
시야가 일렁인다.
전에는 멀미도 살짝 났던 거 같은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없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부유감만 느껴질 뿐.
열기가 가시는 덕분에 포탈 안이 더 편한 것도 같다.
-파아아앗
[17층에 입장합니다.]
그래 봤자 잠깐의 여유에 불과하지만.
시야가 돌아오며 건조한 바람이 뺨을 훑었다.
입술에 달라붙는 모래 알갱이.
“이번에는 사막인가.”
“그에에에.”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거로 치면 사막만 한 곳이 없기는 하지.
단순히 덥기만 할까.
“그늘도 없고, 물도 없지. 은신처는 더 없고. 방향 감각은 사라져.”
생존하는 것 자체가 힘든 곳이다.
역설적이게도 탑에서는 오히려 버틸 만했지만.
상점창으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으니까.
아. 맞다.
“생각해 보니까 덕춘이 먹고 싶은 거 사 주기로 했는데.”
한 번, 상점창에 있는 거라면 뭐든지 사 주기로 약속했다.
이번에 상점창도 실버 등급으로 올랐으니 선택지도 많아졌을 텐데.
다시 바빠지기 전에 고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에에에.”
정작 덕춘이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지만.
아직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까.
“궤에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덕춘이.
“지금은 포인트 얼마 없어서 안 고르겠다고?”
“궥궥.”
이번에 소비를 많이 하기는 했다.
스킬 승급도 하고 상점창 등급도 올렸으니.
하여간 영악 아니, 똑똑한 녀석.
그래도 아직 6,000포인트가 넘게 있는데 뭘 사려고 저러는 걸까.
이제는 두려울 지경이다.
돈 많이 벌어야지.
‘다행히 돈 벌 방법도 생겼고.’
스킬 합성을 이용한 스킬북 조합.
하위 등급의 스킬북을 사서 상위 스킬북으로 만들어 팔면 말 그대로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조합식을 일일이 알아내야 한다는 거랑 스킬 합성이 언제 비활성화될지 모른다는 것.”
지금까지야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과 행운 스텟에 의지해서 스킬을 합성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계속해서 작업을 하려면 상점창에서 구매할 수 있는 스킬북을 위주로 조합해야 하고.
여러 가지로 제약이 있었다.
뭐, 이것들도 어느 정도 돈이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거지만.
6,000포인트로는 시도하기 힘들다.
적어도 몇만 포인트는 있어야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쉽게 가는 게 하나도 없네.”
“그에에에.”
힘내라며 덕춘이가 어깨를 두들긴다.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어.
“그런 의미에서 도시락 하나로 퉁쳐 주면 안 될까?”
“으게게게.”
어림도 없다며 혓바닥을 내미는 녀석.
얄밉다. 언젠가 내가 더 강해져서 혼내 주마.
내 마음을 읽은 덕춘이가 피식 웃은 거 같지만 착각이겠지.
뭐,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고.
“클리어 조건이 그리 어렵지는 않네.”
[17층]
[샌드맨 처치 (0/30)]
[샌드웜 처치 (0/30)]
[오아시스 발견 (0/1)]
몬스터 사냥은 쉽다.
샌드맨과 샌드웜. 각각 1성급, 2성급 몬스터니까.
샌드웜도 말이 2성급이지 공격성이 낮아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은 아니었다.
내 스펙이면 몇 마리가 몰려와도 처리할 수 있다.
“오아시스가 문제인데.”
사방에 솟은 모래 언덕.
바람이 불 때마다 변화하는 지형.
불쑥 튀어나오는 샌드웜에 의해 모래 언덕이 무너졌다 생기기를 반복한다.
사실상 위치를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다.
운이 나쁘면 같은 자리를 뱅뱅 돌 수도 있다는 말.
이런 조건 때문에 17층에서 리타이어된 헌터들이 상당했다.
상점창이 없었다면 더 많이 떨어졌겠지.
“나야 상관없지만.”
-꾸욱
근처, 가장 높은 모래 언덕에 자리 잡은 난 제자리 높이 뛰기 자세를 취했다.
팽팽하게 당기는 허벅지.
강화된 근력에 막대한 힘이 모였고.
-콰앙!
강하게 땅을 박찼다.
사방으로 나부끼는 모래.
내가 있던 자리로 큼지막한 구덩이가 생겼다.
3미터 가까이 떠올랐을까.
[파이어 밤 (B) Lv.9]
-콰아아아앙!
난 진짜 폭발을 일으켰다.
최근 들어 꽤 유용하게 쓰는 방법.
폭발을 이용한 가속과 위치 변환.
반발력을 타고 더 높이 올라갔다.
-쾅! 콰앙!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나보다 높은 모래 언덕이 없을 때까지 파이어 밤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마력이 쭉쭉 빠진다.
반발력에 몸이 흔들리고, 중력을 거스른 탓에 다리에 피가 몰린다.
높은 곳에 떠올라 현기증이 날 시점.
“찾았다.”
난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쪽. 미친 듯이 멀지는 않다.
모래 언덕 여러 개에 가려 있지만 직선상의 거리로만 보면 10킬로미터 안쪽.
오아시스의 위치를 뇌리에 새겼다.
-후웅
추진력을 잃은 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빠르게. 더 빠르게!
자이로드롭을 타듯 솜털이 쭈뼛 서고, 바람에 따라 몸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잘못하면 허리나 머리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쑤아아아악!
“궤에에에엑!”
귓가로 바람이 찢기는 소리를 내고 덕춘이도 내 목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난 덕춘이를 잡아끌었다.
“덕춘아, 나 믿지?”
“그에? 그에에에!”
잠시 머리를 갸웃하던 덕춘이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을 읽어 무슨 짓을 할지 알아차린 모양.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믿어!”
“궤에에에에!”
땅에 내다 꽂히기 직전, 난 덕춘이를 하늘 위로 던졌다.
우렁찬 비명과 함께 허공을 나는 덕춘이.
바닥까지 1미터.
[안개 질주 (B) Lv.4]
-스아아아아
난 안개로 변해 부드럽게 땅에 내려앉았다.
충격은 없었다.
0.5초의 짧은 시간이 지나고 육체를 되찾은 난 손을 뻗었다.
“궥!”
“옳치.”
손에 폭 들어오는 덕춘이.
정신이 혼미한지 입을 딱 벌리고 벙긋거리던 덕춘이가 눈빛을 되찾았다.
“그엑!”
-휘익
내 뺨을 노리고 날아오는 혓바닥.
난 목을 꺾어 피했다.
후후. 그동안 뺨 맞은 게 몇 번인데. 이 정도는 예측 가능하지.
이게 인류의 위대함이다, 양서류야.
-푸화아아악!
“악! 야! 불 뱉는 건 반칙이지!”
“으게게게게.”
뺨을 때리지 못한 게 분한지 덕춘이가 불을 내뿜었다.
머리카락이 타기 전에 빠르게 털어 냈지만 오징어 구운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홀라당 안 태워 먹은 거에 감사해야지. 하마터면 대머리 될 뻔했네.
다음부터는 곱게 뺨을 내줘야지.
머리카락은 안 된다, 요놈아.
“후우. 가자.”
잠깐의 소동을 끝내고 난 덕춘이를 어깨에 올렸다.
방향은 잡았다. 남은 건 그곳으로 가는 것뿐.
방법은 어렵지 않다. 점프하고 파이어 밤으로 추진력을 얻어 날아가는 것.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괜히 뛰어가다 엉뚱한 길로 가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이동과 위치 확인을 번갈아 하며 움직인 지 10분.
마력이 말라가는 게 느낄 때쯤 육안으로 오아시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샌드웜과 샌드맨?
“으으으으.”
“그어어어어.”
[샌드맨 처치 (13/30)]
[샌드웜 처치 (9/30)]
폭발에 휘말려 죽은 놈들만 해도 제법 된다.
남은 건 오아시스 근처에서 사냥하면 그만.
17층도 별거 없구먼그래.
“여기부터는 뛰어가도 되겠다.”
마력도 아낄 겸. 사냥도 할 겸.
굳이 눈에 보이는 데 날아갈 필요는 없겠지.
-차앙
난 서리 불꽃 검을 뽑았다.
가는 길에 사냥도 할 생각.
“그어어억!”
“가으으으!”
달려가는 경로에 있는 몬스터를 베고 또 베었다.
거리가 닿지 않는 놈은 파이어 밤을 사용해 쓸어버렸다.
내게 있어 1, 2성급 몬스터는 장애물조차 되지 못한다.
그렇게 오아시스가 가까워질 무렵.
-우우우웅!
“어?”
[히알틴 유적 열쇠가 반응합니다.]
보물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유적 열쇠가 진동하기 시작했다.